초등학교를 여섯 학교 7년에
나는 초등학교를 여섯 학교나 다녔고, 햇수로는 7년이나 되었다. 그것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어린
시절을 형 밑에서 보냈는데, 일제시대 관리를 하던 형이 자주 전근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중간에 심상소학교로 개칭되더니 졸업 무렵에는 다시 국민학교로
바뀌고 지금은 초등학교가 되어 교명도 네 개나 된다.
어린시절 가세가 기울어져 입학 적령이 되어도 학교에 다니지 못하다가 아홉 살이 되어서야 겨우 문막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당시 형은 원주군청에 근무하고 있다가 경성임업시험장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1학년 여름방학 중이던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경성(서울)으로 이사를 했다.
상경한 우리는 월곡리라는 곳에서 살았다. 거기엔 월곡보통학교가 있었지만 자리가 없어서 편입을 하지
못하고 1년을 쉬었다가 다음해에 새로이 입학을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7년이나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월곡학교는 한 달 정도 다니다가 형이 횡성군청으로 오게 되어 또 다시 횡성보통학교로 전학을
했다. 여기서도 오래 다니지 못하고 3학년 때 형이 양양군청으로 가게 되어 양양보통학교로 전학을 했다.
지금까지 다닌 문막, 월곡, 횡성학교 다닐 때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고 또 너무 오래되어 동급생이 누가
있었는지 공부를 어떻게 하였는지 등은 전혀 기억에 없고, 단지 횡성학교 담임선생이 문(文)씨였다는 정도
만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가 양양학교 때는 내 나이도 열 서너살 되었을 때여서 여러 가지 기억이 되살아
난다.
담임은 ‘김천금(金千金)’이란 묘한 이름을 가진 분이었다.
다른 학교에서 전학하고 키도 작은 나였지만, 공부를 비교적 잘했으므로 매우 귀여워 해주셨다.
그래서 수업 중 발표를 많이 시키고 학예회 때에는 합창단이나 연극부에도 넣어주고 일본어로 하는 웅변
도 나에게 시켜주었다.
4학년이 되던 해 형이 양구군청으로 전근하여 다섯 번째 학교인 양구보통학교로 전학을 했다.
담임은 군지비지켕(君司美知憲)이란 일본인 선생이었다. 그는 음악을 잘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여러 가지 군가(軍歌)를 가르쳤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한창이던 당시 일본군은 중국의 북경이나 상해 등 주요 도시를 연이어 점령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일본기를 들고 주민들과 같이 양구시가지를 누볐으며, 때로는 등(燈)을 만들어
야간에 등불행진도 했다.
5학년 때 교명이 심상소학교를 바뀌고, 6학년이 되자 1주일에 두시간 있던 조선어 과목은 아예 없어졌다.
일본은 우리 한국에 대한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점차 노골화하고 일본어를 ‘국어(國語)’라 하며 가르쳤다.
6학년 가을에 형이 강원도청 국민총력과라는 데로 전근을 해서 춘천으로 왔다.
춘천에는 춘천본정심상소학교와 춘천사범학교 부속심상소학교, 그리고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미토리
오카(緣岳)심상소학교 등 셋이 있었지만, 여석(餘席)이 없어서 신북면에 있는 천전심상소학교에 편입을
했다. 이 학교가 바로 여섯 번째의 학교가 된다.
이 학교는 6개월 정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내가 졸업을 한 학교이고 졸업 후에도 이 고장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학교가 유일한 모교처럼 느껴지고 동창생들도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때 나는 약사리 지금의 약사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학교까지는 10㎞는 된다.
학교로 가는 신작로는 자갈을 두껍게 펴서 걸어다니기가 매우 어려웠다. 다만 길의 가장자리로만 사람이
다녀서 거기엔 자갈이 없는 소로처럼 되어 있어서 그리로 걸어다닌다.
양구학교에서는 상급학교 진학예정 학생들은 방과 후에도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했는데, 여기서도 특별
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먼 거리를 걸어다니기가 고역이어서 방과후 공부는 고사하고, 소양교
까지 와서는 더 가지를 않고 봉의산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다가 도시락을 먹고 귀가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 없어서, 중학교 저기 시험인 춘천사범학교에 응시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후기인 춘천공립농업학교에 응시하여 겨우 합격을 했다.
일제하 공직생활을 한 형을 따라다니며 자란 관계로 이처럼 여섯 개의 학교를 7년이나 다닌 묘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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