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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골에는 오늘 새벽 첫눈이 왔습니다. 새벽에 강아지 열무가 소변을 본다고 낑낑대서 마루 문을 여니 작은 마당이 환했습니다. '아!', 밤새 첫눈이 온 것입니다. 90살 되도록 18세기풍으로 맨발로 살고 있다는 할머니, 타샤 튜더는 밤눈이 내리는 날에는 이미 대낮부터 공중에 떠도는 희미한 눈냄새를 맡는다고 했는데 저같은 사람은 그저 눈이 와야 "아, 눈이 왔구나!!", 하고 좋아합니다.
정오가 지나자 반가운 사람이 툇골연구소에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제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떠들석한 시간이 지난 후에 가벼운 점심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심현숙님이 77세의 일본할머니가 벌인 독창회 이야기를 하셨지요. 이번에는 그 연배의 할아버지와 그의 제자 이야깁니다.
그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셨는데 그 당시에 벌써 참교육을 실천하시려 애쓰신 선구자같은 분이셨나 봅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시어 아이들이 즐겁고도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하도록 늘 애쓰셨답니다. 한번은 '심청전'을 공부한 후에 그 내용을 연극으로 꾸몄습니다. 반 아이들 모두에게 골고루 대사를 나누어 주셨는데 그 반에 좀 어리숙한 애가 있었답니다. 이 아이는 대사 한 줄도 외울 능력이 없어 선생님은 고민고민하시다가 '풍덩!'이라는 두 음절의 대사만을 주셨답니다. 그 학생은 심청이가 임당수 푸른 물에 몸을 던질 때 큰 소리로 '풍덩!!'하고 성공적으로 외쳤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기가 외운 대사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린 그림을 모아 보니 반의 모든 학생들이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그 어리버리한 학생만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추상화를 그렸답니다. 차고 캄캄한 물 속에 뛰어든 심청이의 머리속이 어찌 추상화처럼 복잡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그 어리버리한 어린이, 곰곰 심청이의 마음과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인당수를 생각하다 하다가,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추상화를 그려내고야 말았던겁니다. 선생님은 애들이 그린 그림을 교실 뒷편 게시판에 죽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어울리지 않아 할 수 없이 교실 가운데 툭 튀어나온 기둥에 따로 걸었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특별대접한 '풍덩화'를 많이 칭찬해주셨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야말로 유수와 같이 세월은 흘러서 어느덧 당시 가르치던 학생들도 장성하여 아들 딸 낳고 잘들 살아갈 즈음, 반창회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늙으신 선생님도 당연히 모임에 참석했지요. 그런데 그날 모인 사람들을 보니 반에서 1등에서 10등 안에 들던 똑똑하고 잘난 녀석들은 한 녀석도 오질 않았고, 중간이나 꼬래비 근처에서 어슬렁대던 애들만 잔뜩 모였답니다. 당연히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풍덩'도 왔지요.
술이 한잔 두 잔 들어가고 술안주처럼 옛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지요. " 선생님, 저는 지금 보일러 배관공을 하고 있습니다." 풍덩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를 칭찬해 주신 분은 오직 선생님 단 한 분 뿐이십니다. 저는 그래서 제 인생의 단 한번 받은 칭찬이었던 '풍덩 그림'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비록 소박한 보일러 가게 하나를 운영하고 있지만 선생님께서 제 그림을 칭찬해 주신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보일러 가게 이름을 '풍덩보일러 가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게 한쪽 벽에 선생님이 특별대우로 기둥에 걸어주셨던 풍덩그림을 붙여 놓았습니다. 언제 한번 놀러오십시오, 선생님." 선생님은 너무나 감동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고 하십니다. 반창회가 끝나고 헤어지기 전에 이래저래 기분좋게 취하신 선생님께서 화장실에 가셨는데 풍덩이 주춤주춤 따라오더니 막무가내로 주머니에 봉투를 밀어넣더랍니다. 그후 얼마 뒤 선생님은 풍덩의 보일러 가게를 방문하시고 정담을 나눈 후, 형편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느끼시고 슬그머니 돈봉투를 돌려주셨다지요.
'풍덩'이라는 이름을 붙인 보일러 가게는 정릉 어딘가에 있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지나가시다가 풍덩보일러, 어쩌구 하는 이상한 간판이 눈에 띄시면 시침 뚝 떼고 그 가게에 들어가 거기 가게에 붙여져 있는 30년도 더 되었을 그 추상화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우습기도 하지고, 여러 차례 들어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풍덩 그림'이 저도 참 궁금하네요. 풍덩보일러가 올 겨울, 장사를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첫눈 오 신날, 마음 훈훈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기쁩니다. // 정상명 |
첫댓글 정말 훈훈한, 눈도 녹일 이야기다. 이런 정겨운 사람들의 숨은 자잘한 이야기들 때문에 인간은, 삶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아. 나도 따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 ㅎㅎ
에고 눈아퍼라...그래도 정상명씨 이야기 잼잇게 잘하신다~!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