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65
10월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연중 제2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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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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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작으니 사랑받습니다!>
운전 중에 작고 하얀 잡견 하룻강아지를 만났습니다.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서 뭔가 냄새를 맡고 있었습니다.
차를 멈추고 기다리고 있던 저는 안 되겠다 싶어 갓길에 차를 주차 시켰습니다. 녀석에게 다가갔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녀석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야! 너 이름은 모르지만, 여기 도로 한가운데서 이러고 있다가 큰일 난다. 앞으로 절대로 도로 한가운데로 나오면 안 된다. 알았지?”
그러면서 녀석을 덥석 품에 안고 걱정스런 눈빛의 어미 개에게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작고 귀여운 강아지, 눈에 쌍꺼풀까지 있는 강아지를 바라보면서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작으니 사랑받는구나!’
아마도 이런 공식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분 품에 푹 잠기고 싶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작은 야생화처럼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요? 탄탄대로가 아니라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좁은 길의 성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입니다. 그녀의 삶이 마치 깊은 산속 외딴곳에 홀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작은 꽃 같다고 해서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불립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성인(聖人)이 되기에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셨다가 1897년에 돌아가셨으니 불과 24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그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 바라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짧디짧은 수도 생활의 연륜, 그것도 봉쇄수녀원 안에서, 그마저도 지병으로 골골하면서...도무지 대단한 뭔가를 해낼 조건이 아닌 그녀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웬걸, 데레사는 자신의 탁월한 봉헌 생활을 통해 나이와 연륜이 성덕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그 어떤 성인보다 크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빛나는 성덕은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회 수도자였던 그녀를 전 세계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겸손, 복음적 단순함,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는 결국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戀人)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과 주고받은 대화 곧 기도는 마치도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하는 연인들끼리 주고받은 연서(戀書)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한 송이 작은 숨은 꽃이길 원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작은 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그녀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로 안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디작은 그녀를 당신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꼭 안아주셨습니다. 숨은 것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녀 특유의 빛나는 작은 길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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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혜안>
조금만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깨물어보지만 악습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또 다시 방황을 시작하는 알콜 중독자들, 마약환자들, 노숙자들, 정신 질환자들,이 세상 어딜 가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몇몇 출소자들... 오늘도 한 아이는 제게 "차라리 소년원에서 그냥 있을걸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너무나도 엄청난 벽 앞에서 제 정신이 아닌 형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큰 숙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새천년기"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새천년기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이 얼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이웃들의 고통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이웃을 바라봄에 있어 가장 필요한 노력이 영적인 눈(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눈, 이기적인 욕망이 배제된 영혼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육적인 것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영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리 형편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지니고 다가갑니다.
"저 사람, 비록 지금은 주어진 상황이 몹시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원인이 있었을거야. 저 사람 역시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나와 똑 같은 인간이다."
아무리 부족해 보이고 아무리 한심스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긷든 하느님의 손길, 창조 때의 그 고귀한 품성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예수님도 인간을 위한 존재였고, 복음도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역시 어디 딴 하늘 아래, 딴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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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업적지향적 삶과 의미지향적 삶>
어떤 아이에게 손가락을 빠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손가락을 빨지 말라고 타이르거나 혼내도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15분씩 열심히 손가락을 빨아라. 그럼 아빠가 100원 줄게.”
얼마 후 아이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아빠, 나 이제 손가락 빨기 싫어요!” 또 이런 실험도 있습니다.
심리학자 그린과 스턴버그는 초등학교 4, 5학년 어린이들에게 새로 개발된 재밌는 수학게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재미를 붙여 틈만 나면 게임을 즐겼습니다. 10일 뒤쯤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재밌지? 지금부터 오래 하는 사람에겐 트로피와 상을 주기로 하마.”
처음엔 아이들이 앞 다투어 더 오래 게임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신나서 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경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트로피와 상을 주지 않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참조: ‘리듬: 내 안의 부정적 생각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어떤 것에 대한 노력을 멈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 드는 것에 비해 결과가 미약할 때 노력을 멈추게 됩니다.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경쟁을 지나치게 많이 하게 되면 에너지가 소진되어 포기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만든 사람에게 보복을 하게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힘의 경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겨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경쟁상대로 생각하여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일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이 벌어집니다. 봉사자들이 본당 사제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당 신부님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인정해주는 것 같으면 그 다른 사람도 미워하고 본당 신부도 미워합니다.
너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분들은 대부분 이런 함정에 빠지고 지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경쟁에서 누구보다 앞선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지옥체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두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각자 자신이 한 일들을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사실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성령의 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선교에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라고 하시며 그들이 잘 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녀서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선교를 통하여 옵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직행버스입니다. 그냥 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여 기쁘게 하려면 더 많은 선교를 하는 사람, 더 멋진 성당을 짓는 사제, 더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업적주의자로 전락해버립니다. 결국 이도저도 되는 일 없이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는 일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 일 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행복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시선의 차이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뉩니다. 업적, 혹은 목적지향적 인간과 의미지향적 인간입니다. 그 일을 통해 목적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는 일 자체에 의미를 두고 성패는 상관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자매님이 참으로 마음이 찡하다고 하며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함께 묵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여름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하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가지가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다.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면 풍성한 꽃도, 꽃이 진 자리에 달리는 튼실한 열매도 볼 수 없다. 내처 자라기만 하면 하늘에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뿌리로부터 점점 멀어져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잘 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장했고, 욕심을 내면 조금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들은 자라기를 멈춘다.
마치 동맹을 맺듯 ‘나도 그만 자랄 테니 너도 그만 자라렴.’ 하고 함께 성장을 멈추고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결국 나무에게 있어 멈춤은 자신을 위한 약속이면서 동시에 주변 나무들과 맺는 공존의 계약인 셈이다.” [출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우종영, 메이븐]
하늘로 오르려고만 하면 땅이 주는 에너지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면 저절로 높이 올라갑니다.
목적지향적 삶은 그래서 힘이 빠지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면 의미지향적 삶은 항상 현재 하는 일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업적은 사라지지만 의미는 영원히 남습니다. 의미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의 결과도 그래서 의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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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엄동화 선생님의 ‘진리 치유의 길’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예전에는 사느냐 죽느냐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적자생존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생명체는 위기의 순간에 ‘호르몬’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런 호르몬은 순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켜 주기도 하고,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보존하고 보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먹고 먹히는 삶의 스트레스는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욕망, 성공, 명예, 재물에 대한 스트레스를 늘 받고 살아갑니다.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호르몬은 우리의 몸을 지켜주지만 늘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의 몸에 나오는 호르몬은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원형탈모, 소화불량과 같은 증세는 스트레스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마치 국가적인 위기의 상황에 계엄령은 필요한 조치이지만 매일 계엄령 속에 산다면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발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방법에는 ‘반응과 감응’이 있습니다. 반응은 효과는 있겠지만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흔히 하는 말싸움은 ‘반응’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따르면 은총과 축복이 주어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면 심판과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회의 법과 질서도 ‘반응’을 강조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그에 따는 처벌을 받습니다. 성과를 내고 이익을 내면 그에 따른 포상이 있습니다. 감정에 따른 반응은 때로는 큰 사고가 되기도 합니다. ‘홧김’에 큰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시만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합니다. 저도 ‘욱’하는 성격 때문에 큰 상처를 준적도 있었고,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반응’을 유보하거나 끊어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반응’을 하지 말고 ‘감응’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응의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고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응이 유리판에 물이 튀는 것과 같다면 감응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즉각적인 반응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에 새기며 감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땅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 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땅을 축복해 주셨고,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제1독서로 묵상하는 욥은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나쁜 것을 주신다 할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나는 알몸으로 이 세상에 왔으니 알몸으로 간다 해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재물과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요즘 나의 삶이 즐겁지 않다면, 감사할 일이 없다면 내가 주어지는 시련에 감응하기보다는 반응하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분노와 미움이 있다면 내가 주어지는 삶에 감응하기보다는 반응하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많은 아픔이 있었고, 이른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지만 반응하는 삶이 아니라 감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수도원 밖을 나와 보지도 않았던 데레사 성녀를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감응하는 삶이 선교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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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기쁨에 넘쳐 보고드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두 그를 경배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처럼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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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그동안의 일을 보고하고, 예수님께서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거나 즐거워하셨다는 표현은 복음서에서 매우 드물게 발견됩니다. 평소 복음서가 표현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환히 미소 지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봅니다. 기쁨에 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라시던 대로 일이 잘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오히려 그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신 데에서 비롯합니다.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권한과 능력으로 이루신 놀라운 업적과 영광을 모두 아버지께 돌리십니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받으신 임무를 완수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 뜻을 이루시는 것을 당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기뻐합니까? 아마도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일이 하느님의 바람과 일치합니까? 만일 두 뜻이 서로 충돌한다면, 내 바람이 잘못된 것일 수 있고 어쩌면 우리가 더 이상 바라서는 안 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없이 바라고 기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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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 20장 21절)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오 복음 26장 42절)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오 복음 11장 26절)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복음 1장 47절)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와, 감격스런 고백과, 탄성은 ‘히브리인들의 축복기도의 전형적인 방식인 ‘감사’(berakah)를 통해 표현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복음 10장 22절)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복음 10장 22절)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복음 10장 23절)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을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기도할 일입니다.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베네딕도 규칙서 5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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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 10장 21절)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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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강론을 준비하면 할수록 ‘성경은 교만한 자 앞에서는 침묵한다.’라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 수 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쓰인 글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이 넘게 탐구와 묵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를 지닌 말씀, 하느님의 섭리 속에 주어진 이 말씀을 고작 몇 년 공부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제아무리 똑똑하다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지식으로 성경 말씀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는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이렇게 세 성녀에게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글을 배웠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가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옮겨 쓴 것이라고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도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17살까지만 공부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4살에 수녀원에 들어갔기에 그리 오래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교회 학자라고 불릴까요?
지식의 차원으로만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똑똑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교회가 선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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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김명겸 요한 신부님]
상대방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와 점점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계가 편안함을 보여주고 그렇게 관계는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은 볼 수 없었던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해지고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자기 개방은 누구에게만 이루어지고 누구에게는 이루어지지 않는 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고, 그 세상이란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을 의미합니다.
드러내 보여주심에는 받아들임이라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 응답이 있어야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슬기로움 때문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말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알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있는데, 자신들이 마주친 하느님의 모습은 그 모습과 다르기 때문에 하느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 결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선택된 이들에게만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을 세상에 파견하신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에게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귀를 막고. 무엇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나요? 나만 생각하는 욕심, 내가 최고라는 교만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두터운 막은 착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고,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그 가림막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모습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착각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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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
루카 10,17-24 (일흔 두 제자가 돌아오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기쁨>
이기는 기쁨보다
이기게 하는 기쁨을
이루는 기쁨보다
이루게 하는 기쁨을
오르는 기쁨보다
오르게 하는 기쁨을
가지는 기쁨보다
가지게 하는 기쁨을
누리는 기쁨보다
누리게 하는 기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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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주 산업의 경제 가치는 대단하다고 합니다. 2040년에는 1천조 원이 넘는 시장으로 성장하리라 예측합니다. 우리가 운전 때마다 쓰는 내비게이션, 인터넷, 위성 TV 등도 모두 우주 경제의 범주에 들기 때문에 경제 가치는 계속 늘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나라가 우주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그리고 1992년 대한민국 소유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발사되었습니다. 개발에 투입된 비용이 31억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래서 인공위성과 같은 쓸데없는 사업에 국비를 낭비한다는 질타가 심했습니다.
여기에 소비되는 국비로 수십만 명은 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말의 설득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주 산업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지금 우리나라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힙니다. 소위 IT라고 하는 것도 모두 우주 산업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기에 의미 운운하는 것이며,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남을 누르는 잘못된 힘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중요하다고 판단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은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고 하는 일이 아니지요. 바로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귀환 보고를 통해, 제자들의 전교 활동은 주님의 지시를 따랐고 자기들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마귀들까지도 복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흥분하여 호들갑 떠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태도는 태연하고 평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 말씀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귀를 이겨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진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서 기뻐하실까요? 단순히 세상 안에서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누르면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말과 행동으로 알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라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제대로 바라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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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해피 엔딩>
- 결국은 잘 될 것입니다 -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18,3)
오늘은 10월 묵주기도 성월 첫날이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일입니다. 제가 34년전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을 때 임시제의방에 있던 사진이 바로 오늘 성녀 데레사 사진이었습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던 작은 길, 작은 꽃이라 일컬어 지는 성녀로 24년 참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그 영향력은 참 놀랍습니다. 성녀보다 3배의 제 나이니 성덕聖德의 삶을 위해 남은 동안 더욱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교황 비오 10세는 성녀 데레사를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녀의 마지막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1987년 8월9일 마지막 성체를 모신 성녀 데레사는 9월30일 저녁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후 숨을 거둡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정말 해피엔딩의 복된 선종입니다.
마지막 임종어만으로도 충분한 성인입니다.
선종도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평상시 사랑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사랑할 때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헤피엔딩의 선종의 죽음을 위해 미리 임종어를 생각하여 좌우명으로 삼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잘 살았어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마지막 잘 죽는 선종의 죽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참 좋은 해피엔딩의 선종의 죽음은 이웃에게도 최고의 선물이 됩니다.
중국의 위대한 학자로 감리교 신자였다가 성녀의 자서전에 크게 감명받은후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서의 피안’의 저자인 오경웅 박사의 고백도 인상적입니다.
“성녀의 자서전을 다 읽고 난 후 ‘만일 이 책이 가톨릭 정신을 대표한다면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 책에서 겸손과 대담함, 자유와 기율, 기쁨과 슬픔, 의무와 인애, 강한 힘과 유연함, 은총과 자연, 어리석음과 지혜, 부유함과 가난, 공동성과 개성 같은 한쌍을 이루는 대립사이에서 살아 숨쉬는 종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성녀의 성덕은 불타의 심성과 공자의 덕성, 그리고 노자의 철학적 초연성을 합친 것과 같아 보였다.
24세를 일기로 죽은 젊은 수녀가 이런 완덕에 도달하다니! 그 비결은 무엇일까?
성녀가 만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불가결의 지체가 아니었던들 자기 개성을 어떻게 이렇게 충분히 실현할 수 있었으랴!”(동서의 피안, 309-310쪽, 김익진 옮김)
성인들의 삶 전체뿐 아니라 내 삶 전체도 보아야 하고 해피엔딩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함과 동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나눴던 24년전 쓴 ‘봄(觀)’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
삶은 흐른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과 겨울의 적요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이래야 해피엔딩의 삶이요 죽음이다” -1998.11.4.
오늘로서 제1독서 욥기는 끝납니다. 지금까지 참 처절한 고통을 인내하며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던 욥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욥은 해피엔딩의 참회의 고백과 더불어 큰 복을 받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이런 해핀엔딩의 참회의 고백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평상시 절망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최선을 다한 진인사대천명의 삶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큰 복을 받은 욥은 그 뒤 백사십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고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으니 정말 해핀엔딩의 죽음입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에 대해 불행선언을 하신 장면이 어둠이라면 오늘 일흔 두 제자들의 귀환을 기뻐하는 장면은 빛의 충만입니다. 이처럼 전체를 보면서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하고 해피엔딩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흔두 제자들의 해피엔딩의 귀환을 기뻐하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이 얼마나 하늘이신 주님께 깊이 영혼의 뿌리를 내린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삶의 중심이신 하늘이신 주님께 깊이 뿌리 내림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이신 주님께 우리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백절불굴의 낙관적 삶이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은 삶에 결국은 모두가 잘 되는 해피엔딩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
자기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뤄졌음을 즐거워하며 감사하는 예수님입니다. 어둠과 빛,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기에 이런 해피엔딩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어지는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까지 망라되고 있는 다음 말씀의 은총이 우리 모두 남은 동안 분발하여 해피엔딩의 삶을 살게 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이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 때 언제 어디서나 참된 행복이요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절망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주님의 매일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해피엔딩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저희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마태 11,25)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소서.”(시편 119,135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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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10,21c)
<하느님 아버지의 뜻!>
둘씩 짝지어 파견 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믿는 이들의 희망이요 목적이요 기쁨은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희망과 목적과 기쁨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내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시월의 첫 날인 오늘은 '작은 꽃'(小花)이라고 불리는 '소화 데레사 성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15살의 나이로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서 결핵을 앓다가 23살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셨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수호자'로 불리는데,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12장과 13장을 읽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 제 사랑이신 예수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자서전 中에서)
우리도 소화 데레사 성녀를 본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고, 너에게 사랑이 되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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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e5arw6qj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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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구절초 향기
그윽한 시월의
첫날입니다.
행복의 시작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사랑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채워지는
사랑의
나날들입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
우리의 생활이
감사를 통하여
가장 큰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떼어낼 수 없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통하여
무가치하다고
내버려진 것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을 통하여
새롭게 발견되는
작은 것의
기쁨입니다.
너무 큰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왔습니다.
작은 것에
관심을 돌리면
새로운 찬미가 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기쁨이 됩니다.
매일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삶의 기쁨입니다.
삶의 기쁨은
매우 간단합니다.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의 생활을
기쁘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오늘이며
사랑의 기쁜
하루입니다.
좀더
사랑하기 위해
좀더
작아지는
사랑의 따뜻한
시선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에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은총입니다.
생활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 사랑을
이루는
생활의
찬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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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복음 10장 20절)
모든 이름에는 그 나름의 의미 있는무게가 있다. 사람은 떠나가도 그 사람의 이름은 남는다. 우리 삶의 보호자가 되시는 우리 이름의 아버지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새겨지는 소중한 이름들이 있다.
기록과 기억 사이에 눈물겨운 우리의 여정 또한 뜨겁게 새겨진다. 하느님만으로 살아가는 이름들이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이름이 된다. 감출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선하신 사랑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구원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때 안에서 언제든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 어떠한 삶을 만나고 어떠한 빛깔로 새겨지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새겨질지를 또한 반성한다. 기쁨과 소중한 이름으로 새겨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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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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