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
제2편 불교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다
홍익인간 광명이세
Ⅰ. 서 론
제1편에서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고불(古佛 : 한인․한웅․한검)이 있었고, 그 고불에 의하여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 바탕을 둔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성립되어
외래종교가 전래되기 전에 상고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있었음을 밝혔다.
이에 근거하여 우선 석가불교의 유래를 추적하여 본 결과
석가불교는 근본적으로 인도종교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유종교였다.
즉,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씨족적 근원은 인도의 원주민도 아니었고 드라비다계도 아니었으며
아리아계도 아니라 단군족이었고, 그 출생지인 가비라도 네팔의 타라이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 기슭으로서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민족이었다.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 염부주(閻浮洲) 역시 인도의 히말라야산맥 어느 곳도 아니고,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도 아닌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였다.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녹야원(鹿野園)도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Sarnath)가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이었다.
또한 불경은 소승경과 대승경으로 나뉘어지는데, 소승경(4부아함경)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경전이지만 대승경은 우리나라 고조선에서 인도로 전승된 신선도의 경전이었다.
대승경을 기록한 범어(산스크리트어)도 인도어가 아니라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글자와 언어였다.
불교의 사상과 의식과 고유명사 및 전문용어도 우리민족의 신선도와 일치되었다.
따라서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였다.
이러한 학설은 석가불교가 우리나라에 역수입(逆輸入)되어 1600여년 만에 처음 제기되는 문제로서
불교학자와 불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너무나 이색적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이설(異說)이라
할 수 있다.
이래서 본 연구를 주체적 애국적 대다수의 불자들에게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우는
일이라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반면에 수도에만 전념하여 조국도 민족도
떠나야 한다는 극히 이상적인 불자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생기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를 지나치게 믿던 나머지 인도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동경하고,
인도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극찬하면서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잘 모르고
제 민족에 대하여 관심이 그리 없는 극소수의 불자들에게는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이고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나왔다고 할 경우, 무조건 거부반응이 생기고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의 주장은 불교의 신앙사회를 교란시키는 처사라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널리 이해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 연구를 정독해 오해가 있으면
그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고 높으신 비판과 가르침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Ⅱ. 석가세존은 한국사람이다.
1. 석가세존의 탄생지는 가비라이다.
석가세존이 한국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기로 한다. 이 문제는
석가세존의 탄생지와 성장지는 어디이며, 씨족적 근원은 어디냐 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첫째의 문제, 즉 석가세존의 탄생지와 성장지는 어디냐 하는 문제이다.
{장아함경} 대본경을 보면 "내 아버지는 정반(淨飯)이라 이름하는 찰제리의 왕족이요,
어머니의 이름은 대청정묘(大淸淨妙)이다. 왕이 다스리는 성은 가비라(迦毘羅)라 이름하였다.
부처님은 다시 계송으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찰제리, 이름은 정반, 어머니는 대청정묘,
땅은 넓고 백성은 풍족하였으니 나는 거기에서 태어났노라"하였다.
곧 석가세존은 가비라성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가비라성은 동서남북에 4개의 문이 있고
수십채의 궁전이 있는 자그마한 성읍국가로서 마갈타국에 속해 있었다.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일반상식이다. 그러면 가비라성은 어디에 있는 어떤 성인가?
{석가씨보(釋迦氏譜)}에 의하면 가비라는 염부주 중의 한 지역으로 지구에서 가장 중심이라 하였고,
과거의 고불(古佛)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중아함경} 유연경에는 "나(석가세존)를 위하여 여러 채의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과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여 가비라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었고, 석가세존 혼자만을 위한 궁전도 세 채임을 말하고 있다.
{근본설 일체유부 비나야파승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제5를 보면,
"설산 남쪽 기슭 경가하(古伽河) 곁이 가비라 선인이 사는 곳이니 가비라성과 멀지 않다"하여
가비라성이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석가세존께서도 가섭에게 말하기를 "까마득한 옛날 나는 설산선인(雪山仙人)으로서 설산에 살면서
보살행을 닦았다"고 했다. 이를 보면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인 가비라는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근세조선 세조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따르면 석가세존이 입멸하여
화장하자, 여덟섬 너말(8만 4천개)의 사리(舍利)가 나왔는데 이를 제천(諸天)과 용왕(龍王)에게
나누어주니 모셔다가 7보탑을 세웠다 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명기하기를
"인간 세상에 큰 탑이 넷이니, 가비라국 부처가 나신 곳에 하나와 마갈제국 성도하신 곳에
하나와 파라날국 녹야원 전법하신 곳에 하나와 구시국 열반하신 곳에 하나가 있더라"고 하였다.
즉 석가세존이 입멸하자 탄생지인 가비라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 근거하여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을 인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가비라는 마갈타국에 속해 있는 성읍국가였다.
둘째, 가비라성은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다.
셋째, 가비라는 지구(세계)의 중심에 있었다.
넷째, 과거의 고불이 모두 가비라에서 일어났다.
다섯째, 가비라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
여섯째, 가비라성 내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이 있었다.
일곱째, 가비라성의 넓이는 수만평이라 추정된다.
여덟째, 가비라성에는 수십채의 건물부지가 있다고 추정된다.
아홉째, 가비라성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
열째, 가비라성 곁을 경가하가 흐른다.
위의 요건은 가비라성의 특수요건임과 동시에 성립요건으로서 여기에 부합일치되면
가비라성이라 할 수 있고, 부합일치되지 않으면 가비라성이라 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2. 가비라는 네팔의 타라이가 아니다
그러면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은 어디인가?
지금까지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를 네팔의 타라이라 생각해왔고, 그것이 통설로 되고 있다.
이제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위에 제시한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에 대입하여 확인해 보기로 한다.
첫째, 가비라성은 마갈타국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가 마갈타국에 속했었느냐의 문제이다.
네팔(과거의 인도)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로서 고대역사는 모두 말살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타라이가 마갈타국에 속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논외로 한다.
둘째, 가비라성이 설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가 설산 남녘 기슭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타라이 북쪽에 히말라야산맥이 있다. 그래서 타라이를 가비라성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히말라야산맥 가운데 설산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설한다.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타라이는 가비라성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가비라는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가 지구의 중심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가비라성은 아시아의 중심이 아니라 지구의 중심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는
아시아의 중심에 있다고 볼 수는 있으나, 지구의 중심에 있다는 주장이나 기록을 본적이 없다.
육안으로 세계지도를 보아도 네팔이 지구의 중심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넷째, 가비라에서 과거의 고불이 모두 일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에서 과거의 고불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본 바 없다.
다섯째, 가비라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없고 우기와 건기만이 있다.
여섯째, 가비라성에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 4개의 성문부지가 없었다.
현지답사 결과 동서에 두개의 성문부지 밖에 없었다.
곧 남북에는 성문부지가 없었다.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일곱째, 가비라성지의 넓이는 수만평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 곳의 넓이가 수만평이 되느냐의 문제이다.
현지를 답사할 때, 목측에 의하면 동서의 길이 약 150m, 남북의 길이 약 80m로서 성의 넓이는
약 2천평 전후라 추정되었다. 수만평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여덟째, 가비라성 내에 수십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 수십채의 건물부지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석가세존이 거처하던 세 채의 부지와 부왕과 모후께서 거처하던 건물부지 그리고
신하들의 사무실과 시녀들의 숙소인 건물부지를 생각하면 가비라성지 내에 수십채의 건물부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는 다만 두 개의 건불부지만이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부정된다.
아홉째, 가비라성 내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타라이에 있는 가비라성지라는 그곳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었느냐의 문제이다.
현지를 답사할 때 안내원의 설명 가운데 사리불탑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마야 부인이 친정 고리국으로 가던 도중에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세존을 출산했는데
룸비니 동산이라는 거기에도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없었다.
룸비니 동산이라는 그곳 역시 동산이 아니라 평지였다.
열째, 가비라성 곁을 강물이 흐른다고 했다.
그런데 타라이나 그 곁을 흐르는 강물이 없었다. 강이 있었다는 설명도 듣지 못했다.
이상과 같이 네팔 당국이 석가세존의 탄생지라고 주장하는 타라이는 어느 하나도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네팔의 타라이는 가비라성지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가비라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기슭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 기슭이 가비라성의 성립요건에 부합되느냐의 문제이다.
첫째, 가비라성은 마갈타국에 속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백두산의 남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에 걸쳐 말갈국이 있었고, 어느 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가비라성도 우리나라의 상고사에 나온다고 한다. 석가세존의 어머니는 그 친정이 고리국(?離國)인데
우리나라의 상고사에도 고리국이 나온다. 따라서 백두산 남쪽 기슭은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1차로 부합일치된다.
둘째, 가비라성이 설산 남쪽기슭에 있었다. 그런데 백두산이 설산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상설된다.
셋째, 가비라는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이 지구의 중심에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세계지도를 보면 일본열도는 좌청룡, 지나대륙은 우백호에 해당되며,
남북아메리카 대륙은 외청룡,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대륙은 외백호에 해당되고, 시베리아 대륙은
현무, 오세아니아주는 주작에 해당되어 백두산이 비교적 지구에서 가장 중심인데,
세계지리학회에서 위성사진을 근거로 백두산을 지구의 중심이라 했다.
따라서 백두산 남쪽 기슭은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3차로 부합일치된다.
넷째, 과거의 고불이 모두 가비라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에서도 과거의 고불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한웅․한검 등 과거의 고불이 모두 백두산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1편에서 밝혔다.
따라서 백두산 남쪽 기슭은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4차로 부합일치된다.
다섯째, 가비라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백두산에도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다. 이는 가비라성의 성립요건과 제5차로 부합일치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밝힌 것 외에 나머지 성립요건은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논외로 한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 남쪽 기슭과 석가세존의 탄생지라는 가비라성이 서로 부합일치된다.
다만 부수적인 문제만이 몇가지 확인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따라서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이 설산 남쪽 기슭에 있었다는 불서의 기록이 틀림없다면 가비라성은 백두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대숭복사비명병서(大嵩福寺碑銘?序)에도
"석가세존은 우이(?夷 : 해돋이땅)의 태양인데 서토(西土)에서 드러냈으나 동방에서 출생하였다"하여
석가세존의 탄생지는 인도가 아니라 동방 해돋이땅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해돋이땅이란 동이족이 사는 동방을 지칭하는데. 동이족이 사는 동방은 우리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음을 {최문창후전집}이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석가불은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이 반은 증명됐다고 할 수 있다.
4. 석가세존의 씨족적 근원은 단군족이다.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가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쪽 기슭이라면 당연히 그 씨족적 근원도
단군족 곧 우리민족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불타의 三十二大人相을 보면, 불타는 전신이
황금색이라 하고, 불상을 보아도 전신이 황금색이며, 두상(頭上)에는 우리민족의 고대 풍속인
왕의 상투가 있다. 이를 보아도 석가세존은 우리민족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종래의 통속적인 관념에 의하여 무조건 석가세존은 인도 사람이며, 흑인종으로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불체(佛體)의 황금색은 석가세존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종교적으로 미화하여
우리들 황인종의 심성에 맞게 도색한 것으로 생각하고, 머리의 상투는 새가 새끼를 까고 간 새의
둥우리라는 전설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나 전설은 근거없는 독단이며,
기록을 보면 석가세존은 우리민족과 같은 단군족이었고 석가세존은 그 후예였다.
종남산(終南山) 도선(道宣)의 {석가씨보(釋迦氏譜)}에 의하면 부처님의 성씨를 구담(瞿曇)․감자(甘蔗)․
석가(釋迦)․사이(舍夷)․일종(日種)이라 하였고, 승우(僧祐)의 {석가보(釋迦譜)}에는 좀더 자세히 밝혀
주고 있는데, 구담을 사이라 하고 사이는 외국의 귀성(貴姓)이라 하였다.
감자는 묘족(苗族)의 후예라 하고 석가는 단종 찰제리(檀種刹帝利)라 하였다. 사이의 이(夷)는
동이(東夷)․서이(西夷)의 이(夷)이며, 사이는 외국의 귀성이라 하였으므로 사이는 인도의 원주민도
아니고, 드라비다계(系)도, 아리아계(系)도 아니라 외국에서 인도로 이주한 동이(東夷)나 서이(西夷)의
일파로서 넓게는 알타이족(族)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석가세존은 알타이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민족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알타이족이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민족과 같은 황인종이라 할 수 있다.
묘족은 사전에 의하면 옛 몽고계 인종이라 하였다. 영국의 인도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
(Vincent Smith)도 석존을 몽고계 인종이라 주장하였다. 우리민족도 몽고계 인종이다.
'몽고'을 서구식으로 발음하면 "몽골리아(Mongolia)"이고, 본토의 발음은 "?고려(Mongolia)"이다.
그 어원을 말하면 [?]은 말(馬)의 고어이며, 고려는 왕건태조가 세운 근세 우리나라의 국명이기도
하지만 상고시대부터 불러오던 우리나라 지역에 대한 이칭(異稱)이다. 즉 '?고려'는 '말고려'란 뜻으로
말을 잘 기르고, 잘 다루며, 잘 타는 고려족이란 뜻이다.
따라서 몽고족은 원래 우리민족의 지류이다. {단군세기}를 보아도 몽고족은 단군조선 제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의 후손으로서 우리민족의 지류이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이 몽고계 인종이라면 곧 우리민족이라 할 수 있다.
단종(檀種)도 단군종족이란 뜻으로서 직접 우리민족을 가리키고, 찰제리(刹帝利)도 {삼국유사}에
신라왕을 찰제리라 하였으므로 우리민족을 가리키며, 일종(日種)은 광명을 숭상하는 태양족이란
뜻인데 우리민족도 광명을 숭상하는 태양족으로서 일종 역시 우리민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석가세존은 우리민족이다.
더욱이 석가세존의 초상화를 보면, 그 모습이 동양적인 이목구비(耳目口鼻)에 복장이
인도풍(印度風)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한복선이다. 이를 보아도 석가세존은
한국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우리민족은 부처님을 낳은 민족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이 문화인류학 또는 형질인류학 등의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전설이나 추정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의 소론은 불교론사들의 저술인 {석가씨보} 및 {석가보}와
만인이 공인하는 사전에 의한 주장으로 함부로 부정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로만 보아도 후대가 선대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볼 때,
석가세존은 우리민족의 상대사상인 신선도를 수용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일반상식으로는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이라면 무엇 때문에 머나먼 인도에까지 갔느냐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신선도의 교리에 의하면 세계인류는 모두 삼신에 의해서 태어난 동포이며
한집안 식구이다. 따라서 인도인의 고민이 곧 우리민족의 고민이며 인도인의 행복이 곧 우리민족의
행복이다. 그런데 인도인은 지금도 브라만․찰제리․바이샤․수드라의 사성계급(四姓階級)으로 시달리고
있듯이 과거에는 더욱 시달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 석가세존이 인도로 가게 된 동기가
있고, 인도에 불교가 보급되게 된 동기가 있는 것이다.
Ⅲ. 석가세존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고행성도하였다.
1.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는 설산이다.
석가세존이 단군족의 후예라면 당연히 고행성도지(苦行成道地) 역시 우리나라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석가세존은 보살 당시 설산(雪山) 염부주(閻浮洲)에서 6년동안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고 그 곁의 가야산(伽倻山 또는 가사산;伽寐山)에서
수도고행중 동방계명성(東方啓明星)의 밝은 별빛을 보고 도를 깨치었다고 한다.
그후 설산 총림방 중의 진귀조사(眞歸祖師)로부터 종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설산은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 가운데 있는 어느 산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인가?
더욱이 백두산에도 눈이 일년 내내 녹지 않으므로 백두산을 일명 설산이라 하며,
백두산을 우리민족의 순수한 고유어로 표현할 경우, 그것은 히머리산, 히마리산, 히마리야산이 되고,
히마리야산을 영어로 표기하면 "Himalya"산이 되며, 이를 발음하면 히말리야산이 되며,
히말리야가 전음되어 히말라야(Himalaya)산이 된다.
염부주도 신주(神州) 또는 진단(振旦)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백두산 일대 또는 천지일대(天池一帶)
도 거기에서 신선도가 베풀어졌고, 신선과 성인들이 살았으므로 신시(神市) 또는 신주(神州)라 하고,
그곳은 불사약인 자연생 인삼의 원산지여서 진단(震檀․振旦․震丹․眞丹)이라 불리웠던 것이
후에 우리나라의 이칭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 염부주가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천지주변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경우 흔히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택한다.
그것은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미확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떠한 판단기준에 의하여 확정하여야 한다.
이때 인용하는 방법이 가설검증법(test of hypothesis)이다.
가설검증법이란 어떠한 가설 즉 어떤 판단기준을 세우고 그 판단기준에 의하여 미확정적인 문제를
확정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판단기준은 불서의 기록 밖에 달리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불서의 설산과 염부주가 우리나라 및 인도의 그것 가운데 어느 것과 일치하느냐에 따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확정되게 된다.
2. 설산은 어떤 산인가?
그러면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과 염부주는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우선 판단기준으로서 불서에 기록된 염부주와 설산의 특수요건을 요약정리한다.
참고서적은 장아함경․중아함경․석가씨보․석가방지 등이다.
우선 염부주의 성립요건이다.
* 염부주는 수미산 남쪽 해중(海中)에 있다.
* 염부주는 3변이 비등하나 북은 넓고 남은 좁아(北闊南狹) 인면상(人面像)이다.
* 염부주를 진단 또는 신주라 한다.
* 염부주 중에 한 개의 큰 못인 아뇩달지가 있고, 4방으로 4대하가 흐르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다음은 설산의 성립요건이다.
* 설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
* 설산은 3층이다.
* 설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水之靈府)이다.
* 설산의 정상에 큰 못인 아뇩달지(阿?達池)가 있고, 이를 당(唐)에서는 무열뇌지(無熱惱池)라 하였다.
* 아뇩달지에서 북쪽으로 굉장한 폭포(謎羅川)가 흐른다.
* 아뇩달지의 둘레는 8백리이다.
* 아뇩달지에 용왕이 산다(龍王住處).
* 아뇩달지에서 4방으로 4대하가 흐르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 아뇩달지의 4안(四岸)이 보물장식 같다.
* 아뇩달지의 정남과 동쪽에 대단한 평지가 있는데 동서로 경사를 이루고, 5천리에 이른다.
* 아뇩달지의 정남은 첨처(尖處)이며, 그 밑은 지옥이다.
이상은 석가세존이 6년간 고행성도한 염부주와 설산의 성립요건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지역이나 어느 산이 위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되면 그곳이 염부주 또는 설산이라
할 수 있고, 부합일치되지 않으면 염부주 또는 설산이라 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3. 인도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에는 설산이 없다
그러면 불자들이 성산으로 모시는 히말라야 산맥 가운데 어느 산이 위에 제시한 설산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되느냐의 문제이다. 최소한 히말라야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 하수의 원천인 큰 못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산상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있는
티티카호와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 있는 라도카호라 하여 인도 히말라야산맥의 어느 산의
정상에도 큰 못(호수)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이는 곧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에는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더러 현장(玄濱)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비롯하여 어느 불서를 보아도 석가세존이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산에서 고행했다는 기록을 일절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학자들의 불교사서를
보면 석가세존의 설산고행을 허무맹랑한 전설같이 흘려버리고 있다. 그것은 인도 지역에 불서에
기록된 그러한 설산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에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이 없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4. 인도의 부다가야는 설산이 아니다.
그러면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가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가? 현재 인도 당국은 부다가야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 하여 여러가지의 시설을 갖추어놓고 있으나 이제 기록과 현지를
비교하면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첫째, 부다가야는 산악이 아니라 평지이다.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은 산악이다. 이는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는 산악이 아니라 평지이다. 그밖에도 부다가야는 설산의 특수요건을
어느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인도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부다가야는 인도 중부에 가까운 곳으로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중의 어느 산을
설산이라 할 경우 거기에서 2천여리 이상 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둘째, 부다가야의 네란자라강은 불서의 니련선하가 아니다.
석가세존은 6년 고행 마지막에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고, 가야산(가사산 또는 고석산)의
보리수 밑에서 성도했다. 니련선하는 종교용어로서 강물이나 그 주변의 풍경을 나타낸 표현이다.
그 뜻으로 말하면 강바닥에 깔려 있는 모래가 보일 정도의 깨끗하고 맑은 물을 의미하며,
강변에 연이어 서 있는 병풍석은 마치 비구니가 줄지어 서서 기도하는 것 같은 선경을 의미한다.
인도의 부다가야 가까이에도 네란자라강이 흐른다. 네란자라강은 건기에는 말라 버리고 우기에만
흐르는 강으로서 맑지도 않고 강변은 흙과 모래로 된 얕은 언덕으로서 병풍석이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니련선하는 설산에서 동남해로 들어가는 항하의 지류로서 동쪽 아니면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부다가야의 근교를 흐르는 네란자라강은
인도 중부의 데칸고원을 시발로 하여 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러므로 부다가야의 네란자라강은 불서의 니련선하라 할 수 없다.
셋째, 부다가야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다.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의하면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에 불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는 부다가야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다.
있다면 석가세존이 입멸하여 약 2백년 후에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돌기둥과 정사와
그후에 만들어졌거나 다른 데서 옮겨온 승려들의 불탑만이 있을 뿐이다.
넷째, 부다가야는 조작되고 있다.
부다가야는 가야에 부다를 붙인 명칭으로써 가야보다 후에 조작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야를 힌두교의 성지로 만들면서 어쩔 수 없이 붙인 명칭인 것이다.
그런데 부다가야의 불탑들은 다른 데서 옮겨온 것인가 하면,
정사의 작은 원판 자체가 근대의 위작이라는 학자(B.M.Barua)도 있으니,
부다가야의 유물과 유적들은 인도인의 긍지를 높이고 인도를 찾아오는
외국불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하여 후대에 와서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 근거하여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다가야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고 믿는
우리나라의 승려들이나 불교학자들의 심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부다가야에 막대한 금액을 드리면서 절까지 지으니, 신앙이란 그렇게도 맹목적인가?
맹목적 신앙으로 어떻게 견성성불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5.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맥도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며,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도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는 어디인가?
자연히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고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염부주와 백두산의 천지(신시), 설산과 백두산을 비교한다.
먼저 염부주와 백두산의 천지를 비교한다. 참고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학자의 논문들이다.
1) 염부주는 海中에 있다고 했는데, 고조선을 海中이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상설한다.
2) 염부주는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인데,
백두산의 천지 모형도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3) 염부주를 진단 또는 신주라 했는데, 백두산의 천지주변을 진단 또는 신주 또는 신시라 한다.
4) 염부주에 아뇩달지라는 못이 있어 거기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는데,
백두산 정상에도 천지라는 못이 있고 거기에서도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이상과 같이 백두산 천지의 특수요건이 염부주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된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염부주가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 곧 신시임을 의미한다.
또한 {석가방지}를 보면 "염부주를 크게 3분하면 2분은 북쪽인데,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며,
흉노가 사는데, 도(道)에 힘쓰지 않는다. 1분은 남쪽인데 3면이 바다에 닿았고, 사람은 많으나
마음이 맑고 성인의 교화를 잘 받은 대성도(大聖都)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염부주는
한편 만주․러시아의 연해주․한반도를 포괄하는 상고시대의 고조선 강역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염부주는 좁게는 백두산 천지 곧 신시를 의미하며,
넓게는 상고시대의 고조선 강역 전체를 의미한다.
다음은 설산과 백두산의 비교이다.
1) 설산을 히마리야산이라 하는데, 백두산도 우리민족의 순수한 고유어로 표현하면,
히마리야산이며, 한편 설산이라 한다.
2) 설산은 지구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백두산이 지구의 중심에 있다고 세계지리학회에서 발표하였다.
3) 설산이 3층인데 백두산도 3층이다.
4) 설산은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인데, 백두산도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이다.
5) 설산의 정상에 아뇩달지라는 큰 못이 있고, 당나라에서는 그 못을 무열뇌지라 하였다.
그런데 백두산의 정상에도 천지라는 큰 못이 있고, 천지를 최남선은 무열뇌지라 하였다.
6) 아뇩달지는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인데,
백두산의 천지 모형도 3변이 비등하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7) 아뇩달지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고, 그 하수는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는데,
천지에서도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고 그 하수 역시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8) 아뇩달지 북쪽에 굉장한 폭포(謎羅川)가 흐르는데, 천지의 북쪽에도 굉장한 폭포가 흐른다.
9) 아뇩달지 정남벽상에 첨처가 있고, 그 밑에 지옥이 있는데,
천지의 정남벽상에도 예각직암이 높이 솟아있고, 그 밑은 낭떠러지이다.
10) 아뇩달지의 남쪽과 동쪽에 5천리에 이르는 대단한 평지가 있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의 남쪽과 동쪽에도 약 4만km2의 대평지인 개마고원이 있다.
11) 아뇩달지의 못 둘레가 8백리라 한다. 그런데 천지의 못 둘레는 80리라 한다. 단위는
과거와 현재, 인도와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다르므로 [8]이라는 숫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12) 아뇩달지의 4안이 보물장식 같다는데, 천지의 4위도 형형색색하여 보물장식 같다.
13) 아뇩달지는 용왕주처(龍王住處)인데, 백두산 천지를 용왕담(龍王潭) 또는 용담(龍潭)이라 한다.
이상을 도표화하면 도표(6)과 같다.
도 표(6) 설산과 백두산의 비교표
설산 | A | 아뇩달지 인면상 미라천 정남첨처 4안보식 龍王住處 |
B | 지구중심 4대하 수지영부 동,남평지 3층 池周8백리 | |
백두산 | a | 천지 인면상 천지폭포 정남직암 4위보식 龍王潭 |
b | 지구중심 4대하 하수원천 동,남고원 3층 池周8십리 |
"A와 a, B와 b를 비교하시요"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백두산의 특수성이 설산의 성립요건에 부합일치되고,
인도에는 그러한 설산이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연역할 수 있다고 본다.
1) 불서의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 염부주도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이다.
3) 석가세존이 설산 염부주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 가야산에서 성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의 가야산(우리나라의 {신교총화;
神敎總話}에도 나오는 산으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승려들이 수도하는 산)에서 성도하였음을
의미한다.
4) 석가세존에게 종지를 넘겨준 진귀조사 역시 인도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다.
5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도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
6)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민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