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은 남덕유산을 등에 지고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멀찍이 벌린 채 남쪽 저 멀리 황매산을 내다보며 한들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수승대(搜勝臺)의 거창 신(愼)씨, 건계정(建溪亭)의 거창 장(章)씨, 위천의 초계 정(鄭)씨, 갈천(葛川)의 은진 임(林)씨 등이 일찍이 세거지(世居地)로 삼아 서부 경남 굴지의 고을로 성장했다. 조선 전기 산청의 조식, 함양의 정여창이 경상우도 영남학파를 형성할 때 거창에서는 동계(洞溪) 정온(鄭溫.1569~1641)이 이 고을 유림의 한 전통을 세웠다.
동계는 임훈의 문인으로 정인홍을 사사하고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사간원 정언을 지낼 때 광해군의 폐모를 부당하다고 직언해 국문을 받고 제주도 대정에서 무려 10년간 유배됐다. 인조반정 후 동계는 절의를 지킨 선비로 지목돼 대사간.대제학. 이조참판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23년 광해군 시절 전권을 휘두른 정인홍이 마침내 참수당했을 때 아무도 그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그때 동계는 주위의 위협과 냉소를 물리치고 초연히 옛 제자로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러다 그의 나이 67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항복이 결정되자 동계는 대성통곡한 다음 국가의 수치를 참을 수 없다며 칼로 배를 갈라 자결했다. 그러나 너무 늙어 힘이 모자랐는지 그는 죽지 않고 기절해버렸고, 의사의 구원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다시 목숨을 부지하게 된 동계는 고향 거창으로 내려가서는 집을 떠나 남덕유산 산속으로 들어가 조(粟)를 심고 고사리를 캐며 삶을 유지하다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이 어디로 갔냐고 물어오자 그는 모리(某里), 즉 아무 동네에 들어갔다고만 대답했다. 그곳이 동계의 은거처인 모리재(某里齋)다.
거창 위천면에는 사랑채의 겹처마 매무새가 아름다운 동계 고택이 있다. 경주 최부자집 딸로 이곳에 시집온 종부는 지금도 깔끔히 명문 종가를 지키며 접빈객(接賓客)의 전통으로 언제나 답사객을 따뜻이 맞아준다.
동계 고택 북쪽 북상면 갈계는 남덕유산 초입으로, 여기서 서쪽으로 길을 바꾸면 월성계곡이 나온다. 아직도 찾는 이 드문 월성계곡가엔 이팝나무 가로수가 오월이면 하얗게 피어나고, 요즘 같은 늦가을이면 인적 드문 도로변 가드레일엔 볏단을 널어 나락 말리는 일이 한창이다.
월성계곡을 어느 만큼 타고 오르다 강선대(降仙臺) 마을에서 내를 건너 이정표도 없는 산자락길을 40여분 오르면 모리재가 나온다. 10년 전만 해도 호젓한 억새길과 다 허물어져 내린 모리재 구옥이 쓸쓸한 대로 처연한 기상이 있었다. 그러나 연전엔 임도(林道)가 개설되더니 올해는 모리재를 번듯한 누마루(백세청풍루)가 있는 서원 규모로 복원해 놓았다. 복원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과도한 형식은 내용을 약화시키는 법, 동계의 모리재 정신은 그저 먼 산빛에만 아련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동계 이후에도 거창은 조선시대 내내 굴지의 선비고을이었다. 구한말 나라가 무너질 때 거창엔 면우(傘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 있었다. 면우는 남명을 잇는 영남학파의 적통으로 3.1운동 때 파리 강화회의에 보낸 조선독립 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의 대표로 결국 2년형의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내 세상을 떠났다.
한때 면우는 북간도로 망명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그는 내 땅에서 나라를 잃은 죄인으로 고행의 길을 가겠노라고 거절했다. 지금 거창시내를 가로지르는 영천의 침류정 아래에는 면우의 '파리장서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 거창에 6.25 동란은 양민학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안겨주었다.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는 거창 읍내에서 40여km 떨어진 캄캄한 산골로 합천.산청.함양과 경계를 이루는 또 다른 하늘 아래 끝동네였다. 1951년 2월, 국군은 공비 토벌을 명목으로 4일간에 걸쳐 신원면 4개 마을 7백19명을 죽이고 마을을 불질렀다. 그 작전 이름은 "견벽청야(堅壁淸野)"였다. 적의 근거가 될 곳은 말끔히 청소한다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그때부터 거창 사람들은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끝없는 투쟁을 벌인다. 관계자 처벌, 빨갱이의 누명을 쓴 원혼들의 명예회복, 그리고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정말로 외롭고 억울하고 피눈물 나는 저항을 대를 이어가며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다. 언젠가 신원면 거리에 걸려 있던 현수막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울리고 울리고 또 울리고 울리고'.
신원면 과정리, 산청으로 빠지는 길목 뒷산엔 두 개의 작은 봉분에 박산골에서 죽은 5백17명의 뼈를 묻은 합동 묘소가 있다. 54년 3년간 방치했던 유골의 뼈를 남자.여자.어린애로만 분류해 1백9구의 남자 합동지묘, 1백83구의 여자 합동지묘, 그리고 2백25구의 소아 합동지묘(아이는 묘를 쓰지 않는다)를 만든 것이다.
60년 4.19혁명으로 자유를 얻게 되자 이들은 합동묘소 앞에 노산 이은상이 쓴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이 비석은 글자가 으깨진 채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27년 뒤인 88년 다시 민주화 바람이 일자 거창 사람들은 땅속에 묻힌 이 비석을 꺼내 받침대에 비스듬히 걸쳐놓았다. 그리고 정부에 요구했다. 이 비석을 너희 손으로 세우라고.
결국 거창 사람들이 이겼다. 96년 국회는 '거창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지금은 피해보상을 위한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슬프도록 작고 쓸쓸한 합동묘소 건너편에는 무려 40만평 규모의 으리으리한 위령관과 위령탑이 세워져 내일모래 개관한다고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합동묘소의 비석을 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지금도 그렇게 누워 있다.
사실 양민 학살이 자행된 곳은 거창만이 아니었다. 산청에도, 함양에도, 또 어디에도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 신원(伸寃)을 이룬 곳은 거창 신원(神院)뿐이었다.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나는 동계 선생과 면우 선생으로 이어지는 뿌리깊은 거창의 정신 이외엔 답을 구할 수 없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