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32
홍의장군(紅衣將軍)
[요약] (紅: 붉을 홍. 衣: 옷 의. 將: 장수 장. 軍: 군사 군)
붉은 옷을 입고 싸우는 장군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싸웠는데, 스스로 홍의장군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등
[내용]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별명을 잘 알려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자는 계수(季綏)이며, 관향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망우당(忘憂堂)으로 성균 사성(成均司成)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양 강씨(晉陽姜氏)이다. 1552년 명종 7년 8월 21일에 공이 태어났다.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34세(선조18년)에 정시(庭試)의 제2명(第二名)에 발탁되었으나 글귀에 말한 바가 왕의 뜻에 거슬렸기 때문에 급제자를 전부 파방(罷榜= 과 급제를 취소)하라 명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자, 상사(喪事)를 마친 뒤에는 과거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강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1592년 임진년(壬辰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제일 먼저 의병모집하고 의령(宜寧)에서 기병(起兵)했다. 처음 모인 의병은 70여 명으로 정진(鼎津) 함안(咸安)에서 잘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리자 의병이 더 많이 모여 들었다. 그가 싸울 때는 반드시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융복(戎服)의 갓에 갖추던 장식을 말함]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즉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을 내려 주셨다’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임진년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수성하느라 지쳐있던 진주성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대첩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전쟁을 하면서 기묘한 전술로 승리하여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재우는 적병의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재우는 싸울 때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帖裏]를 입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을 갖추고 스스로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말을 달려 적진을 스쳐 지나가곤 하였는데, 숨었다 나타났다 종적이 없이 하여 적이 그 단서를 잡을 수 없게 한 뒤에,말을 돌려 돌아와서 북을 치며 천천히 행진하니 적은 그 병력의 많고 적은 것을 알지 못하여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조차 못하였으며, 잇달아 척후(斥候)를 두었으므로 적이 백리밖에 이르면 우리의 진중에서 먼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하기에 편하고 수고스럽지 않았다. 또 사람을 시켜 적이 바라볼 수 있는 산 위에서 다섯 가지[枝]로 된 횃불을 들고 밤새도록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게 하니, 천만 명이나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적의 무리가 바라보고 곧 도망쳤으며, 정예한 군사를 뽑아 요해처에 숨겨 두었다가 적이 이르기만 하면 문득 쏴 죽이니, 적이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언덕에 올라오지 못하였다. 또 군중에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어 공을 자랑하는 것은 성심(誠心)이 아니다. 적을 죽일 뿐이다.” 하였으므로 끝까지 적의 머리를 조정에 바치는 일이 없었다. 《일월록》
1956년 싸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조정에서 벼슬을 받았는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죄 없이 잡혀 오는 것을 보고, 이몽학(李夢鶴)등이 1596년(선조 29)에 난을 일으키고, 여기에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무고로 연루되어 옥사하는 일어나자, 이를 통탄하면서 아래와 같이 상소문을 올리고 사직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쥐를 잡기 위해서이다. 이제 적이 이미 평정되어 저의 할 일이 없으니 물러가는 것일 옳을 것입니다. 윤허하여 주시시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나라의 부름을 받아 경상좌도 방어사를 맡고 밀양과 양산, 창녕, 현풍을 지키는 데 힘을 쏟았다. 이때 곽재우는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성을 증축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군을 맞아 수성전을 펼쳐 적을 물리쳤다.
정유년 가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해 왔다. 재우가 방어사로서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면서 사수할 뜻을 보이니 온 군중이 벌벌 떨었다. 적병이 이미 성에 다가왔는데도 재우는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하고, 다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며 말하기를, "제 놈들도 병법을 알 테니 어찌 경솔하게 덤벼들기를 좋아하겠는가." 하더니 과연 1주야를 지나자 적이 싸우지 아니하고 강을 건너갔다. -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전쟁이 끝난 뒤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1600년(선조 33)에 당쟁을 비판하고 '어부(漁夫)로 대하시어 벼슬로 속박하지 마소서'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뒤 직을 사양하고 낙향했다. 1604년(선조 37)에 조정에서 공신을 취품할 때 첫 26인의 선무공신 후보에는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선정된 선무공신 18인에서는 제외됐다. 하지만 곽재우는 개의치 않고 고향에 은거했다.
광해군 때는 왕의 간곡한 부름에 경상우도조방장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에 대한 탄핵이 제기되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고 역시 사직했다.
이날 전라 병사 곽재우(郭再祐)가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지난 날 역적 이진(李珒, 임해군)이 스스로 반역의 짓을 했기 때문에 신 역시 소를 올려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의(영창대군)는 무슨 지각이 있기에 반역의 죄를 준단 말입니까. 온 조정의 사람들이 이의를 처벌하자고 떠들어대면서 전하를 불의에 빠뜨리고 있으므로 신은 감히 반열에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 《광해군일기》 권 67, 광해군 5년 6월 21일
이렇게 낙향한 곽재우는 현풍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도인처럼 살다가 1617년(광해 9)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훗날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받았다. 전쟁에서 스스로 떨쳐 일어나 적을 물리쳤으나 살아생전에 공을 마다한 곽재우에게는 그것도 다 헛된 이름이었다.
詠懷(영회) - 내마음을 읊다
郭再祐(곽제우) 1552~1617
平生慕節義(평생모절의) 평생 토록 절개와 으리를 사모했건만
今日類山僧(금일류산승) 오늘에야 산 속의 승려가 되었구나.
絶粒無飢渴(절립무기갈) 곡기를 끊어도 주림과 목마름이 없고
心空息自凝(심공식자응) 마음을 비우니 조식(調息)이 절로 이루어지네
儒家明性理(유가명성리) 유가는 본성의 이치에 밝히고
釋氏打頑空(석씨타완공) 불가는 집착함을 놓아 공(空)을 깨우치지만
不識神仙術(불식신선술) 신선의 재주를 알지 못하네
金丹頃刻成(금단경각성) 금단이 잠깐 동안에 이루어 진다는걸
年小嘗奇六出奇(년소상기육출) 젊어서는 기문둔갑술을 맛보아 기이한 것을 다투다가
晩來調息恨無師(만래조식한무사) 나이 들어서 소식법(調息法)을 닦으니 스승 없음이 한이로다.
곽재우(郭再祐)의 위엄은 영남 지방을 벌벌 떨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 남도의 풍속에 우는 아이를 겁줄 때면 언제나 ‘곽재우가 온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곽재우’가 와전되어 ‘곽쥐’가 되었다. 어떤 이는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郭越)의 형제 다섯 사람이 모두 달릴 주(走) 변이 들어 있는 글자를 이름으로 삼았으니, 세상에서 ‘다섯 곽쥐가 아이를 겁준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였다. 청성잡기(靑城雜記)
첫댓글 홍의장군(紅衣將軍), 붉은 옷을 입고 싸우는 장군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싸웠는데,
스스로 홍의장군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즉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을 내려 주셨다’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공부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40년전에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때 선생님이 갈켜주신 이야기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래서 어렸을때 기억이 평생 간다고 하는가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