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베트남 전쟁(Vietnam War, 1955∼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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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공산주의에 의해 베트남이 통일된 후 1백만 내지 2백 50만명의 남베트남인들이 재교육 훈련소로 보내졌다. 재교육 훈련소에 수용된 사람들 가운데 165,000 여 명이 죽었다. 대략 10만명에서 20만명 사이의 남베트남인들이 처형되었다. 정치적 살인에 대한 연구자인 R.J. 럼멜은 《학살의 전략》에서 “신경제 구역”에 보내진 남베트남 사람들 가운데 5만여명이 고된 노역을 하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경제 구역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모두 약 1백만 명에 달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즈로 널리 알려진 캄보디아 공산당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였다. 폴 포트가 이끌었던 크메르 루주는 1백만 명 내지 3백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킬링 필드라는 이름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졌다. 크메르 루즈는 마오쩌둥 주의를 표방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았다. 중소 관계가 악화되자 중국은 베트남에 소련과의 관계 단절을 요구하였고, 베트남이 이를 거부하자 국경문제를 구실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다. 중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 루즈 역시 베트남을 향해 무력 충돌을 감행하였고, 베트남은 이에 대응해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프놈펜을 점령하고 크메르 루즈를 해산시킨뒤 친베트남계 정권을 수립시켰다.
라오스에서는 1975년 공산주의 정치 조직인 파테트라오가 내전을 일으켜 국왕을 폐위시키고 라오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은 흐몽족 반군과 라오스 인민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1975년에서 1980년 사이 약 10만 명의 흐몽족이 사망하였다.1975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은 25만여명의 라오스 망명자들을 태국으로 보냈다. 이 가운데 13만명은 흐몽족이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3백만여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해외로 도피를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베트남 보트피플은 10만여명에서 5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보트피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5년부터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인은 약 1백 40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while Canada, Australia, and France resettled over 500,000. 1988년 베트남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백만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미국 1967년 펜타곤 앞 반전시위
1965년 8월 3일 다낭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 병사
전후 미국에서는 군사개입의 교훈을 놓고 여러 의견들이 대립하였다. 미군의 개입 초기 주베트남대사이자 군사개입 입안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멕스웰 테일러는 전쟁 후 “우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몰랐다. 우리는 또 하나의 한국 전쟁을 벌이러 간다고 생각하였지만, 베트남은 전혀 다른 나라였다. 두 번째로 우리는 동맹인 남베트남을 몰랐다…… 그리고 우리는 북베트남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호찌민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적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동맹과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알 때까지 이런 더러운 일에 끼지 않았어야 하였다. 그건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미국 육군의 공식 전쟁사에서는 “군사 전술은 종종 그보다 더 큰 전략적 문제들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다.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전략적으로는 실패하였다. …… 베트남 전쟁에서는 독특한 역사와 정치, 문화 그리고 사회적 요인들이 늘 군사 작전에 영향을 주었다. …… 승리는 군사 작전으로만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었고 집단 사이의 갈등에 대한 분석, 적의 전략에 대한 이해, 동맹의 장단점에 대한 파악이 종합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베트남에서 고통스런 전쟁에서 육군은 새로운 겸손과 소양을 자신의 오랜 전통으로 남기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메모에서 “군사 전략의 조건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의 군대는 이런 종류의 전쟁에 적합하지 않아 전쟁을 종결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 맞춘 특수전 부대도 효과적이지 못합니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 역시 “미군이 베트남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리라고 보는 것은 위험한 환상”이라고 언급하였다.
광범위한 폭격의 효용성도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해럴드 케이스 존근은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자꾸 생긴다면, 공군이 제 할 일을 못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역시 폭격이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웨스트모어랜드는 폭격으로 “북베트남이 약해졌는지 여전히 의문”이라고 하였다.
하노이를 집중 폭격하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미국의 예상은 잘못된 것이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이미 30년간 독립을 위해 싸워온 조직이었다. 그들은 프랑스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단단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호찌민은 “당신들이 우리를 열 명 죽이는 동안 우리가 당신들 한 명을 죽인다고 하여도, 결국 이기는 것은 우리고 지는 것은 당신들”이라고 말하였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 육군의 교범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미국 해병대의 빅터 H. 크루락 장군은 웨스트모어랜드의 소모전 전략을 “작은 승리를 얻으려 …… 미국인의 생명을 물쓰듯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덧붙여 외국 군대의 훈련 능력도 문제라고 말하였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은 111억 달러(2008년 가치로 환산하면 686억 달러)를 전비로 사용하였고, 이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었다.
3백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 가운데 1백50만 명이 직접 전투를 치렀다. 제임스 E. 웨스트헤더는 “미군 병력이 가장 많이 파병되어 있었던 1968년을 기준으로 하면 베트남에는 543,000명의 병사가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전투 부대는 8만명에 불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된 미국의 징병제는 1973년에 끝났다.”고 쓰고 있다.
베트남 전쟁으로 58,220 명의 미군이 전사하였고, 15만명 이상이 부상당하였으며, 그 가운데 21,000 명은 장애를 갖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의 평균 연령은 23.11 세였다. 데일 퀘터에 따르면 "전사자는 백인이 86.3%, 흑인이 12.5%, 그리고 기타 인종이었다." 미군 전사자 가운데 가장 어린 사람은 댄 벌록 상병이었는데, 그는 나이를 속이고 14세에 입대하여 15세에 전사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 가운데 83만 명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을 받았다. 125,000여 명의 사람들이 징병을 거부하여 캐나다로 탈주하였고, 탈영병도 5만여 명에 달했다. 1977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병역을 기피한 모든 사람들을 조건없이 사면하였다.
고엽제
남베트남 메콩 강 삼각주 지역에서 고엽제를 살포하고 있는 미군 헬리콥터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 농촌지역을 포함하여 인도차이나반도 곳곳에서 사용된 고엽제는 밀림을 황폐하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먹이 사슬을 통한 독성 물질 전파로 생태계 역시 파괴하였고, 사람과 생물 모두가 질병과 선천적 기형으로 고통받게 하였다.
미군은 열대 우림 속에 적이 숨지 못하도록 하려고 고엽제를 사용하였다. 미군은 다우 케미컬과 몬산토의 지원을 받아 열대 우림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제초제를 개발하였다. 무지개 제초제라고 불린 이들 제초제는 조성 물질에 따라 에이전트 핑크, 에이전트 그린, 에이전트 퍼플, 에이전트 블루, 에이전트 화이트, 에이전트 오렌지 등으로 불렸다. 특히, 에이전트 오렌지는 다이옥신을 포함된 매우 독성이 강한 제초제였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베트남을 비롯한 캄보디아와 라오스 지역에 약 45,000,000 리터의 에이전트 오렌지가 살포되었으며, 특히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의 밀림을 파괴하기 위한 랜치 핸드 작전에 집중 투입되었다.
고엽제는 밀림 뿐만 아니라 논밭에도 살포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살포된 고엽제의 양은 약 75,700,000 리터이고, 고엽제가 살포된 숲과 경작지의 면적은 24,000 여 km2로 이는 남베트남 전체 국토의 13%에 해당하였다. 1965년의 경우 고엽제 가운데 42%가 남베트남의 통제하에 있던 농촌의 경작지에 뿌려졌다.
2006년 베트남 정부는 다이옥신 중독에 의한 피해를 받은 사람의 수가 4백만 명에 달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다이옥신 중독과 에이전트 오렌지 사이에 과학적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2011년 현재 베트남의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국제 허용 기준보다 100배 이상 많은 다이옥신이 검출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군측으로 참전하였던 미국과 대한민국 등의 병사들 역시 고엽제로 인한 전립선암, 폐암, 다발성 골수종, 2형 당뇨병, 림프종 등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철모에 귀국일을 적은 미군.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은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 미국의 경우 참전 자체가 사회적인 조롱거리로 변하자 병사들은 전쟁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현실적인 전투의 위험에서 이중고를 겪었다. 해병으로 참전했던 바비 머독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고 회고하였다. 닉슨 독트린이후 미군의 완전 철수가 기정사실이 되자, 병사들 사이에는 “베트남에서 죽는 마지막 미군이 되지 말자”라는 말이 떠돌았다. 미군 병사들은 끊임 없이 벌어지는 게릴라전의 공포와 함께 수색 섬멸 작전에서 일어나는 민간인 희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졌고, 장교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 작전에 대한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 장교를 살해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1969년부터 1970년가지 미군 부대 내에서는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한 수류탄 사고가 790회나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83명의 장교가 사망하였다. 배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던 미군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 복귀에 어려움을 겪었다.
대한민국의 참전 군인 역시 같은 고통을 겪었다. 해병대로서 짜빈동에 주둔하였던 김용만씨는 무고한 양민을 죽였다는 괴로움이 평생을 따라다닌다고 회고하였다. 이름을 밝히기를 원치 않는 한국군 참전 군인은 자신이 신병 때 고참의 명령에 의해 양민을 죽인 뒤 성격이 변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겪은 뒤 싸움이 일어나면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고 실제 ‘너를 죽이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가 무섭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