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기간
박정란
아파트 옆 노인 쉼터 앞
허옇게 바랜 파란 화분 하나
귀퉁이 잘린 채 버려져 있다
산목숨 버리지 못해
버티고 서 있는 행운목
혈액이 안 돌아 잎은 누렇게 시들고
햇살 보듬고 목숨 지탱하고 있다
젊은 날은 나도 한때 잘 나갔지
사랑도 받았고
새끼도 낳아 분양해 주고
향기 나는 꽃도 피웠었지
낡은 스웨터 추레한 모습으로
유효기간 지난 영양제 한 알 털어 넣고
혹시나 자식 한 놈 찾아와줄까
누가 말동무라도 해줄까
정신줄 붙잡고
지막골 골목에 앉아 있는 저 여인
----박용숙 외, 애지문학회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아침해가 아름다운 것은 어둠을 뚫고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새날의 시작을 알려주기 때문이고,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그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저녁노을로 완성되고, 내일은 저녁노을로 시작된다. 살아가야 할 때와 죽어가야 할 때를 안다는 것처럼 가장 자연스럽고 소중한 것도 없다. 겨울이 너무 길고 봄이 짧다면 어떻게 되고, 가을이 너무 길고 겨울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꽃이 아름다운 것은 곧 열매를 맺기 때문이고,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곧 나뭇잎의 일생을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늙고 병들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오래오래 살며 그 엄청난 복지비용과 천연자원을 낭비하는 것처럼 더럽고 추잡스러운 것도 없다. “아파트 옆 노인 쉼터 앞/ 허옇게 바랜 파란 화분 하나”도 볼썽 사납고, “산목숨 버리지 못해/ 버티고 서 있는 행운목”도 볼썽 사납다. “너희들은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라는 어느 유명 가수의 노래도 있지만, “젊은 날은 나도 한때 잘 나갔지/ 사랑도 받았고/ 새끼도 낳아 분양해 주고/ 향기 나는 꽃도 피웠었지”라는 말처럼 상투적이고 허무맹랑한 소리도 없다.
현대의학과 영양제에 의지한다는 것, 즉, 수명연장의 삶은 오래 산다는 것이고, 오래 산다는 것은 “낡은 스웨터 추레한 모습으로/ 유효기간 지난 영양제 한 알 털어 넣고/ 혹시나 자식 한 놈 찾아와 줄까/ 누가 말동무라도 해줄까”, “정신줄 붙잡고/ 지막골 골목에 앉아 있는 저 여인”과도 같은 삶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야 할 이유와 이 세상의 삶의 권리도 다 잃어버렸고, 새로운 꿈과 희망도 없다. 오래 산다는 것은 그 엄청난 복지비용과 천연자원을 낭비하는 것이고, 제때에 죽는다는 것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숨통을 터주고, 아름답고 깨끗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장수만세이며, 어느 누구도 이 장수만세의 재앙을 퇴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장수만세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며, 유효기간이 지난 영양제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자기 자신의 행복을 연주하지 못하는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이다. 동물이나 식물이 현대의학과 영양제에 의지한다면 어떻게 되고, 동물이나 식물이 더욱더 오래 살고 싶어 미래의 후손들의 앞날을 가로막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물은 모두가 다같이 저마다의 타고난 수명이 있고, 이 수명에 따라 자연스러운 순리의 삶을 살아간다.
장수만세는 재앙이고 악이며, 제때에 죽는다는 것은 축복이고 최고의 선이다. 어느 누구도 늙고 병들고 더럽고 추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와 모든 국제기구는 하루바삐 인간수명제(존엄사 제도)를 실시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일삼성一日三省----. 반성과 성찰은 모든 성인군자들의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반성과 성찰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장수만세는 우리 인간들의 탐욕의 극치이며, 반자연적인 대재앙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세계가 가장 좋은 세계가 아니라, [유효기간]이 지난 삶이 가장 나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