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경환 {명시감상} 1권에서
동그라미
이대흠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 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이대흠, [동그라미]({애지}, 2003년 여름호) 전문
모든 패거리들은 동일한 이념과 동일한 이해 관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 동일한 이념과 그 동일한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어떠한 나쁜 짓도 서슴없이 자행하게 된다. 사적인 개인으로는 모두가 착하고 선량해보이지만, 집단의 패거리로서의 그들은, 마치, 제정신을 빼어놓고 살아가는 미치광이들과도 똑같다. 노동조합, 전교조, 시민단체, 여야의 정당,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이 해마다 국가의 예산을 물쓰듯이 낭비하면서, 사사건건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을 물고 늘어지는 추태들을 생각해본다면 나의 그 말은 더욱 더 타당성을 띠게 될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는 이미 그들의 시위에 의하여 장래의 이익을 대부분이 다 탕진해버린 상태이며, 경부고속철도의 사업도 이미 그들의 시위에 의하여 장래의 이익을 대부분이 다 탕진해버린 상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들어간 국가 예산이 얼마이며, 그 소송비용과 공사지연으로 인한 비용이 과연 얼마인가? 경부고속철도의 공사에 들어간 국가 예산이 얼마이며, 그 공사지연으로 인한 비용이 과연 얼마인가? 아마도 정확하게 따져본다면 이미 그 손실 비용만 하더라도 수십조원----원자력 발전소의 폐기물을 둘러싼 그 격렬했던 시위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라!----이 더 될는지도 모른다. 모든 패거리들은 그들의 단체의 목표와 그 이익만을 생각할 뿐, 그들이 속한 국가의 장래의 이익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미 어떤 사업의 정당성을 따져보기도 전에, 선악의 가치기준표를 선험적으로 간직하고 있으며, 그들의 입맛에 맞으면 선이고,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된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이 되는가, 아닌가에는 애초부터 관심 조차도 없는 것이다.
A도 하나회 회원이고 B도 그 하나회 회원이다. C는 개인적으로 퍽이나 가깝게 지냈던 A과 B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고 너무나도 크나 큰 배신감의 아픔에 치를 떨어야만 했었다. C와 어떤 무명씨와의 사이에는 몹시 어렵고도 힘든 분쟁의 소지가 있었고, 만일, 그 분쟁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상호간에 엄청난 희생과 그 피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A는 C와 함께 자그만 교실도 함께 운영했었고, 일상생활에서는 단 한 번도 다툰 일은 커녕, 마치 백년지기보다도 더 가깝게 지냈다. B는 대학교수이자 시인이며 그의 친구이었고, C는 그의 요청이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B 교수와 C와의 관계 역시도 어떤 이해 관계 때문에 단 한 번도 말다툼을 하거나 싸운 적이 없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C는 그들에게 전화상으로, 사적인 이메일로 정중하게 그 사건의 중재를 요청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명씨와는 공적으로는 같은 하나회의 동료이고, 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의형제이며, 사제지간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C는 그들이 그의 중재요청을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 들여주고, 아주 깨끗하게 해결해줄 것을 기대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정당한 C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C가 보낸 사적인 이메일들을 모조리 상대방에게 전해주고, C가 연출해낸 최고급의 문화적 사건을 그 무명씨의 걸작품으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그 무명씨를 무차별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메일을 사실 그대로 전송해줌으로써 C의 의도와 C의 약점이 사실 그대로 드러났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C는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인이며, 우리 한국인들 최초로 사상과 이론을 정립했던 지식인이다. 그가 연출해낸 문화적 사건은 만인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던 최고급의 문화적 사건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전체의 영광이 걸린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문화적 사건이 C가 주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패거리인 동료의 편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의 사악한 질투심과 시기심이 작용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A와 B가 여태까지 C와의 인간 관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승리와 C의 파멸만을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C는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분쟁의 조정자가 아니라, 그 분쟁의 사주자이며, C의 파멸만을 기도했던 대악당들이었던 셈이다. A과 B는 개인적으로 다같이 착하고 선량한 대학교수이자 시인이었지만, 그 집단의 패거리로서는 더없이 사악하고 교활한 인간들이었던 셈이다. 그 패거리들의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국가의 이익은 더없이 훼손되고, 모든 인간 관계는 상호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송자 전 연세대 총장이 표절의 문제로 낙마를 한 것은 시민단체들의 시위 때문이었지만, 이필상 고려대 총장의 표절의 문제에는 그 시민단체들이 일제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송자 연세대 총장의 표절은 최고의 악이었지만, 그 시민단체의 일원이었던 이필상 고려대 총장의 표절은 최고의 선이었기 때문이다. 표절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A과 B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교수이자 시인(?)이었지만, 동료 시인과 동료 교수들의 표절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선량한 양심을 가진 지식인들이다. 아아, 이 땅의 엉덩이에 뿔 달린 패거리들이여, 그대들이 바로 악마들이며,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전체의 영광을 통째로 갉아먹는 지옥의 연출자들이 아니던가!
아버지는 씨를 뿌리고 또 뿌리는 존재이고, 어머니는 낳고 또 낳는 존재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부성애’라는 말이 매우 희귀한 현상이듯이, 아버지라는 존재는 다소 무책임하지만,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 의식으로 무장을 하고, 자기 자식들에게 그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준다. 왜냐하면 아버지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이 여자와 저 여자들 사이에서’ 더 많은 씨앗을 뿌리려고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가 누구의 씨앗이든지 간에, 그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젖을 달라고 하면 젖을 주고, 밥을 달라고 하면 밥을 주고,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고, 빚을 얻어다가 달라고 하면 빚을 얻어다가 주는 것이 이 세상의 어머니들인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다. 그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더욱 더 강력한 적과도 싸우고, 심지어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속과, ‘공포, 그 자체’인 시퍼런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일조차도 서슴치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서 존재의 역사는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되고, 그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서 이 세상의 행복한 삶이 가능해진다.
이대흠 시인은 196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고,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상처가 나를 살린다}와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등이 있고, ‘현대시동인상’과 ‘애지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이제까지 이대흠의 시세계는 두 방향으로 구축되어 왔는데, 첫 번째는 ‘한국적 정한’의 세계이고, 두 번째는 ‘우주론적 화해’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대흠의 한국적 정한의 세계는 사회적 차원의 저항의 몸짓보다는 그 정한의 세계 속에서 그 정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진솔하게 묘사해왔던 것이고, 그리고 그 ‘우주론적 화해’의 세계는 선악의 이분법보다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대통합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대통합의 세계는 우주론적 화해의 세계이며, 그 적대적인 이분법을 무화시키면서, 모든 상대성과 다원성의 세계를 아우르는 일원론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제1회 애지문학상 수상작’인 [동그라미]에 의하면 우선 어머니는 그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어법에 의하면, ‘자느냐 사느냐’는 ‘장가 상가’가 되고, ‘오느냐 가느냐’는 ‘옹가 강가’가 된다. ‘밤나무 잎은 푸르러지고’는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가 되고, ‘장가 가는가’는 ‘장가 강가’가 된다. 이 어법은 전형적인 전라도의 어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독특한 어법 속에는 어머니의 생활 철학과 삶 자체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다. 인간과 언어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인간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 인간에게서 그의 언어를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다. T. S 엘리어트가 좀더 구체적으로 역설한 바가 있듯이, 외국어로 사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외국어로 느끼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가 않다. 시대, 인종, 장소, 남녀노소, 출신성분, 역사 철학적인 문맥에 따라서, 똑같은 언어일지라도 천차만별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언어인 데, 그 언어 속에, 그 주체자의 생명과 삶의 결이 배어 있지 않으면 외국어로 그 감정들을 느낀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대흠의 대표작인 [동그라미]의 어머니는 모든 말을 그 어머니의 어법대로 둥글게 표현한다. 그 둥굶은 이 세상의 상대성과 다원성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일원론의 세계이며, 우주론적 화해의 세계이다. 그 어머니는 일생을 흙과 함께 살고,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사신 어머니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네모의 세계이고, 어머니의 세계는 동그라미의 세계이다. 네모의 세계에서는 밑변과 윗변이 싸우고, 윗변과 아랫변이 싸운다. 좌우의 옆변과 옆변이 싸우고, 두 개의 가로변과 세로변이 서로의 대립각을 곤두세우며,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으르렁거리게 된다. 선과 악, 진과 위, 적과 동지, 남자와 여자, 주관과 객관, 흑과 백, 음과 양, 네 것과 내 것 등의 모든 이분법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나며, 그리고 그 주체자들은 범주가 구속된 사회를 형성하고, 그 패거리들의 무자비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들의 전 인류애적 사랑은 그들의 자그만 범주(사회) 속에 갇혀 있고, 그들의 전 인류애적 사랑은 오늘날의 미제국주의자들처럼,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러나 동그라미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 온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새로 꽃 피어난다. 너와 내가 영원한 숙적으로서 정반대의 길을 걸어 갔지만, 그러나 너와 내가 도착한 곳은 너와 내가 출발한 바로 그곳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동그라미의 세계에서는 시작이 끝이 되고, 그 끝이 시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없어지고, 적과 동지의 이분법도 없어진다. 네모의 세계는 다툼이 있는 세계이지만, 동그라미의 세계는 다툼이 없는 세계이다. ”일생을 흙속에서“ 살고,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사신 어머니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아버지가 사회적인 무책임과 갈등을 조장하는 존재----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라면, 어머니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 의식으로 무장을 하고 이 땅의 모든 사회적 갈등과 불만을 잠재우는 거룩한 존재라고 할 수가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느리라”의 [요한복음]의 진리는 이 어머니의 희생정신에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 주신다”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어머니는 이타적인 존재이며, 무한히 거룩한 존재이다. 그 어머니가 C자형의 구부러진 몸으로 모든 것을 다 퍼주게 되면, 어머니의 머리는 발에 닿고, 그리고 그 어머니의 생애는 동그라미 하나로 완성될 것이다. 이 세상의 최선의 방법은 사랑이며, 그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 자신의 인생 전체로 동그라미를 완성하는 것이다.
동그라미는 시작과 끝도 없고, 적과 동지도 없다. 동그라미는 남과 여도 없고, 주관과 객관도 없다. 동그라미는 흑과 백도 없고, 네 것과 내 것도 없다. 동그라미는 무한히 자비롭고 친절하고, 또, 동그라미는 무한히 평화롭고, 이 지구처럼, 이 우주처럼, 영원히 돌고 또 돈다. 동그라미는 늘, 항상, “오손도순 살아라”라고 당부하는 어머니이며,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이다. 동그라미는 서양인들이 ‘O.K'할 때의 긍정성과 우리 한국어의 부드러운 발음과 그 친숙성의 세계를 자랑한다. 동그라미는 갈등과 분열을 모르는 세계이며, 모든 사악한 패거리들까지도 다 포용하는 ’우주론적 화해‘의 세계이다. 모든 사악한 패거리들은 그들의 적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자기 자신들도 비참하게 죽어가지만, 이 우주론적 화해론자들은 자기 자신의 이웃과 그 원수들을 더욱 더 사랑함으로써, 너와 내가 다같이 살아갈 수 있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게 된다.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그지 없습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그걸 어떻게 사겠다는 것인지요?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 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 속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조셉 캠벨, {신화의 힘} 중, ‘어느 시애틀 추장의 말’에서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 온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새로 꽃 피어난다*. 존재의 동그라미는 영원히 돌고, 또, 돈다.
오오 동그라미여! 오오 동그라미여!
*이 말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지만,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사상’의 말이지, 니체의 독창적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따옴표 없이 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