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원시 상태의 인간
제3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만드셨습니다. 형상과 모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이 생긴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겠다고 하셨으며 또 그렇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이 형상과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연구를 합니다.
초대교회의 일부 교부들은 형상을 겉모습, 모양을 내면적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라고 하고 [창세기 1:27]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모양이라는 말은 빼버렸습니다.
이것은 형상과 모양이 각기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히브리어에는 어떤 사물을 강조하는 표현방법으로 동의대구법(同意對句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부분이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동의대구법은 대구법에 속하는 것인데, 대구법이란 같거나 반대의 대구를 사용하는 수사법의 일종입니다.
예를 들자면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말씀에서 스가랴는 구원자가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예언하면서, 구원자는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신다는 것을 나귀,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로 이어가면서 새끼나귀를 강조합니다. 이런 표현방법을 同意對句法이라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창세기 1:26]의 “형상과 모양”이 27절에서는 “형상” 한 단어만 있는 것이 바로 이 對句法적인 표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26절에서는 형상과 모양이라고 썼다는 것입니다. “형상”과 “모양”이 의미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히브리어에서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는 그림자나 닮은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형상”은 남성명사이고 “모양”은 여성명사입니다. 사람을 만들자는 26절에는 남성명사와 여성명사를 함께 사용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실 때 이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생각을 하고 계셨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경학자가 그렇게 해석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전에 신론-하나님의 속성에서 공부했던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거룩함, 지식, 지혜. 선함, 공의 등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제4절 언약 = 베리트(자르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구약을 Old Testament, 신약을 New Testament라고 합니다. Testament는 ‘증거, 유언,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시는 이 말씀에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언약을 히브리어로는 ‘베리트’라고 합니다. ‘베리트’라는 말은 자른다는 뜻입니다. 언약이 왜 ‘자른다’는 뜻인지는 [창세기 15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 별들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양자처럼 자기 집에서 기르던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에셀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아브라함은 90세가 다 된 나이였으므로 스스로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참고로, [창세기 17:5]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서 부르시기까지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90세가 넘은 나이에 아들이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5:7]에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라고 하시며 땅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합니다.
[창세기 15: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그걸 어떻게 믿느냐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자 [창세기 15:9]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물을 가지고 오라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엉뚱한 짓을 합니다.
[창세기 15:10]입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물로 그것들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반으로 쪼개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동물들을 제물로 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창세기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제사를 드렸다면 이미 제물들은 없었을 텐데, 사체들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은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계약은 계약서를 문서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짐승을 가져다가 반으로 쪼개고, 그 쪼갠 짐승 사이로 계약 당사자 둘이 걸어가는 것으로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계약을 했는데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계약을 어긴다면 그 쪼갠 짐승처럼 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계약 - 언약이라는 것에 ‘베리트-자른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시면서 자른다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이미 그 시대에 언약-계약을 맺을 때는 가축을 자르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보다 훨씬 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당연히 그런 관습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짐승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것을 ‘아, 땅을 주시겠다는 계약을 하시자는 것이구나’하고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가축들을 가져다가 쪼개놓고,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계약이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솔개를 쫓으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창세기 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해가 지고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이 계약의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려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함께 그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야 할 텐데, 그래서 아브라함도 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기다렸는데, 밤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놔두고 혼자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약에 그 계약이 깨어진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아브라함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일방 계약이라고 합니다. 누가 계약을 파기했든 간에 계약파기의 책임을 한쪽에서만 진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이 많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다른 가축은 둘로 쪼개고 비둘기는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아서 400년간 이방 애굽에서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레위기 5:7,8]를 보면 그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레위기 5:7,8]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비둘기는 제사를 지낼 때도 쪼개지 않습니다. 쪼개지 않는 것은 비둘기의 몸체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비둘기는 두 마리를 드립니다. 쪼개지 않는 대신에 두 마리를 마주 놓아서 쪼갠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말씀을 저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일일이 다 찾아서 쪼개고 회개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창세기 15장]의 이 부분은 죄가 아니라 언약을 말씀하는 것이고, 율법에서 본 것처럼 비둘기는 본래 쪼개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도 잘못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소한 죄까지도 회개하고서야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자기의 모든 죄를 기억하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게 과연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내가 내 죗값으로 흘려야 할 것을 대신 흘려주신 것이라고 믿으면 우리의 죄는 용서받습니다. 과거, 현재의 죄는 물론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용서받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언약이나 계약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맺는 것인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는 책임이 없고 하나님께서만 책임을 지시겠다는 일방적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