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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부활주일 누가복음24:1-12(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본문: 누가복음24:1-12
제목: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오늘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누가복음24:1-12의 말씀을 가지고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10일 정도 남았습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이번 선거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선출할지 정하셨습니까?
정해진 사람에게는 갈등이 없겠지만
누구를 찍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사람은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정권 안정론이냐 정권 심판론이냐
이 둘 사이에서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어떤 길로 갈지 정해진 사람은 갈등이 없습니다.
알고서 가는 길은 불안이 없습니다.
믿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믿었던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믿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의 믿음은 바른 믿음이었습니까?
1.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 여인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제자들도 다 도망갔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까지 따라서
무덤에 묻힌 모습까지 보았던 자들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그만한 열심과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가장 앞선 자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이 살아나시겠다고 세 번씩이나
갈릴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죽는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께 죽은 시신에 발라 드릴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식후 첫날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무덤에 가는 것입니까?
살아 날것이라는 예수님의 무덤에 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러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손에 향유와 향품이 들려 있습니다.
그것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에 썩은 냄새가 덜 나라고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행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걱정을 합니까?
본문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들은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누가 옮겨줄까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인 셋이는 옮길 수 없다고 여겼기에
그런 걱정을 하며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이 묻히었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이 본 것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아 예수님이 살아나셨구나
하고 불신을 깨뜨리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 때문에 근심하였습니다.
아 살아나셨구나 하고 감격한 것이 아니라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근심하였습니다.
무덤이 열리고 시체가 없는 두가지 증거를 보고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했을 것이라고 믿지 못하고
도리고 걱정에서 근심으로 더 깊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겁에 질려
감히 천사들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두 사람 곧 천사가 그들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리고 덧붙여 말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사실을 들려주어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7절“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그러한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여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서 돌아갔습니다.
더 이상 무덤에 있지 않고
더 이상 근심하지 않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 모두를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변화하였습니다.
1시간 전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기억나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2.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두려워하던 그들이
근심하던 그들이
걱정하던 그들이
당황하던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화된 것일까요?
이런 믿음은 언제 생기게 될까요?
모든 것이 갖추어야 믿음이 생길까요?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은 에덴동산입니다.
그곳에는 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만 먹지 않으면 믿음에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종종 왜 선악과가 있어야 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악과가 없다면 그래서 무조건 순종했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냥 순종의 본능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악과를 따 먹을지
아니면 말씀에 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살지 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선악과 나무 아래서
불순종을 하고 말았습니다.
불순종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인간을 불순종을 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기에 부족한 것이 없었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불순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고 해서
믿음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용하신
하나님께 그 영혼을 의탁하였습니다.
자신을 버리시고 얼굴마저 돌리셨던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가 되십니다.
우리의 존재는 늘 불안하고
근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을 부활하시자 마자
제자들에게 곧바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기 위해서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는 익어가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 속에서 믿음이 익어가야 합니다.
안식 후 첫날 분명 기쁘게 출발해야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기쁘게 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여인들은
여전히 무겁고 슬프고 두려웠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불안하고 두렵고 슬플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쩔줄 몰라 당혹해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합니다.
그때 여인들이 천사들에게 들을 말이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예수님은 살아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무덤을 찾았고 죽은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나 여인들의 현실은
예수님이 죽어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끝났고,
내 인생도 소망이 없고 기쁨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였기에
불안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이 사실 하나님의 현실과
다르다는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보고
슬퍼하고 당혹해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현실이 정반대의 현실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셔서 아무런 소망이 없기에 슬펐지만
정반대로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끝났다고
당황스러워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늘 이것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과 나의 현실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들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 여인들도 자기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상황으로 한 발자국 내 딛어야 합니다.
불신의 상황에서 믿음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한 걸음 내딛는 것 이것이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항상 불신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합니다.
믿는데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두렵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싶은데
마음은 가 있지만 믿어지지 않으니 당혹합니다.
내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 사이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의 특징은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입니다.
아예 내 현실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은
그 현실로 만족과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현실로 가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의 현실과 내 현실 사이에 끼어서 고통을 당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는 근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즐거웠고 평안했습니다.
그저 배부른 돼지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의심과 두려움과 방황이 있는 자는
내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3.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현실로 뛰어 들어갈 수 있을까요?
말씀입니다.
6-7을 읽겠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들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를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매일 고난 속에서 허우적 거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확 나를 잡아 하나님의 현실 속으로 이끌어 갑니다.
여인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들은 무덤을 떠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을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살아났을 때
유일한 목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목숨을 건 사랑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당혹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그들에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나서
여전히 내 감정과 상황과 상한 마음으로 반응하는
서글픈 마음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분명 주님은 말씀하고 듣게 하시고 알려 주셨는데
그냥 내 상한 마음대로 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책망하시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 주십니다. 계속 기다려 주십니다.
먼저 내 안에 말씀이 들어올 때까지
쏙 들어 올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무덤 문을 열어 놓으시고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게 하시고
천사를 통해서 무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듣고 보게 하십니다.
그렇게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말씀이 들어오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예수님의 증인이 현실이 됩니다.
가장 선전을 잘하는 사람은
써보고 선전하는 사람입니다.
입소문이 무섭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광고를 가장 잘합니다.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다릅니다.
증인은 그렇습니다.
증인은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증인과 순교자란 말과는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여인들은 8절에서 말씀을 기억하고 증인이 되었습니다.
불안해하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던 그들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현실을 증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문론 그렇게 확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가슴에 들어오는 순간
서서히 강해지기도 합니다.
알기는 알았는데 어느 순간 반짝하고
이거였구나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기억하는 것
그 말씀이 내 말씀이 되어 나를 새롭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듣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머물러 서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름답게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인들에게 말씀을 들었던
사도들의 이야기가 이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실인지 아닌지 무덤에 달려가서
들여다 보았습니다.
빈 무덤임을 확인하였지만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직 말씀에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이 아직 그들의 믿음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그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증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온 세상을 나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현실이
내 현실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오직 주님의 증인으로서
주님의 그 사랑을 따라가는 삶,
온전히 하나님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