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시효 소멸(家門 時效 消滅)”
이라고 했단다. 얼마나 간단명료한 답변인가! 최부잣집이라는 명성은 할아버지 대(代)에서 끝났고, 후손들은 평범하게 살고 있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항상 남에게 베풀고 겸손의 미덕을 전하려 했던 최부잣집의 전통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다음에는 국보 31호 첨성대였다. 내가 경주에 여러 차례 들렀지만 첨성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첨성대는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이었던 선덕여왕 [본명: 김만덕] 때 만들어진 천문관측대이다. 화강석을 가공하여 조성한 기단(基壇)에 27단의 석단(石段)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렸다. 밑변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 지대석(地帶石) 한 변의 길이가 5.35m이다. 약 1,400여 년 전에 설치됐는데도 원형그대로였다. 최근 경주 지진여파에 첨성대가 기울었다고 하나 그건 풍문이었다. 옛날부터 북쪽방향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는 해설사의 답변이다. 동양에서는 최초로 방향, 별자리, 기후변화를 측정했던 곳이라 하니, 선조들의 통찰력과 혜안(慧眼)에 가슴 뿌듯했다.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은 신라시대 무덤 중 제일 아름답게 꾸며졌다는 괘릉(掛陵)이었다. 38대 원성왕묘소로 원래는 절터였는데 능을 모시다보니 밑바닥에 물이 흘렀다고 한다. 물에 젖지 않도록 관을 걸어 놓았다 해서, 걸 괘(掛)자를 붙여 괘릉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괘릉은 석인상(石人像)으로 유명하다. 왼쪽에는 무인상, 오른쪽은 문인상, 앞쪽에는 중국인과 아리비아인도 세워져 있다. 천마총에도 아라비아에서 만든 유리가 출토되었다고 하니, 그 당시 서구와의 무역이 활발했음을 짐작케 했다. 둘레석에도 십이지신상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어 천년의 세월이 무색함을 느꼈다. 십이지신상은 5세기 이전에는 능 안에 설치됐으나 그 이후로는 능밖에 설치했다는 사실과 능(陵)과 총(塚), 묘(墓)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능(陵)은 왕이나 왕비의 것으로 확인된 곳, 총(塚)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유물이 출토된 곳, 묘(墓)는 신하들의 무덤임도 알게 되었다.
경주에는 월성을 중심으로 서천, 남천, 북천이 흐르고 있다. 신라가 서라벌에서 1,000여 년 동안 도읍지를 옮기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는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가 편리했기 때문이란다. 호남을 토대로 융성했던 백제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면 찬란했던 백제문화가 전 세계에 빛을 발했으려니 싶으니, 나도 모르게 야릇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하여 6월 26일˜ 28일까지 2박3일간의 KT&G경주수련회를 마쳤다. 모두들 아쉬웠지만 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퇴직사원들을 따뜻하게 배려해준 KT&G 임직원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KT&G경주수련관을 또다시 찾고 싶었다.
(2018. 6. 29.)
첫댓글 자세한 내용과 의미가 있는 좋은 글이네.
나날이 좋아지는 수필이구만, 축하해.
Way t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