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퇴근을 덕촌으로 했다.
지난 월요일 취중에 포두원예조합장 송기신 형한데 억지로 고흥오이 세 박스를 얻었다.
수요일 아침 일찍 학교 현관에 두었기에 교직원께 나누라고 행정사들께 부탁을 했다.
두 박스도 충분하니 한박스는 나 가져가라고 사무실로 들고 온다.
동생네와 친정, 사무실 직원들과도 나눠 먹으라고 바보에게 가져다 주려고
차에 싣고 가다가 과역에서 아나고회를 조금 뜬다.
둘이 소주 한잔 한다고 2만원어치를 달랬더니 올랐고 3만원부터란다.
맥주를 아껴 마시다가 참는다.
바보가 무돌길 후유증 중인 발톱에 처치를 해 준다.
아침에 어머니께 다녀온다.
두분이 같이 계시니 서로 사랑하여 행복하시길 빌며 새삼 절을 해 본다.
삼우제도 삼년상도 아니면서 주변 사람들이 자주 간다고 흉볼까 두렵다.
난, 농막 자리를 생각하며 두 분을 어떻게 모실까 고민에 고민만 하고 있다.
일찍 혼자 밥을 막고 나온다.
산을 가기도 어중간하고 해는 이미 떠서 볼만하지 않다.
기름값도 무섭다. 째째하다.
국도를 벗어나 두원을 공부하기로 하고 무열사를 검색한다.
운대에서 소재지 쪽으로 운전하는데 오수 입구의 건너마을에 정자 같은게 보여 들어간다.
내가 찾고자 했던 하구정이다.
'무엇을 구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수양하고 교육했을까?
밀양박씨 계원들이 세운 듯한데 앞쪽에 박형득의 유적비가 있다.
후손인 박정진이 찬하고 경주인 이계인의 썼는데, 이선생의 글씨는
어느 곳이나 비슷하고 인쇄체의 느낌도 나 별로다.
윤용구의 현판에 기문과 차운한 시액들이 여럿이다.
보성의 소파 송명회와 엊그제 분청박물과에서 만난 삼호당 송주헌의 시액도 보인다.
(대게 검은 판인데 자료를 더 찾아보니 옛판들과는 다 다르다.
옛 글씨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멋이 떨어진 건 참 안타깝다.)
방이 두칸은 될 것 같다.
곁에 배롱나무가 기울어진 연못도 보인다.
왜 와룡인지는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벌판 뒤로 바닷가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며
무열사를 찾아간다.
을축년은 1925년이다. '윤영구尹寗求'를 찾아보니 1868년 생으로 조선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 있다. 호도 못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