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27일(금)■
(누가복음 18장)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묵상/눅 18:9-14 )
◆ 바리새인과 세리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오늘 비유는 그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다.
우리는 이 비유를 별로 불편함이 없이 듣고, 그렇게 충격도 받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청중들은 몹시 불편하고 충격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비유를 실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세리는 어떤 의미였을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나에게 목사님처럼 생기셨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최고의 칭찬으로 들렸다. 아마도 성도라면 누구라도 그런 말에 불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형편없는 목사가 많을지라도, 여전히 목사는 성도에게 존중받는 위치이고 선함과 진실함이 기대되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바리새인'같다고 하면 칭찬으로 들리는가, 모욕으로 들리는가? 십중팔구 불쾌할 것이다. 오늘날 위선자의 대명사가 된 '바리새인'에 대한 그런 편견 때문에 이 비유가 실감 나지 않으며, 그러기에 참된 교훈을 얻지도 못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바리새인은 오늘날의 목사보다 더 존경받는 신분이었고, 세리는 인간 말종이었다.
바리새인이 자신의 의를 늘어놓은 것을 보라.
적어도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일주일에 이틀이나 금식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 년에 사십일 금식기도를 두 번 하신 분은 만나보았어도, 매주 꼬박꼬박 이틀씩 금식하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이 사람은 일 년에 100일 이상을 금식한다는 소리다. 이쯤 되면 오늘날 어느 목사보다도 뛰어나지 않을까?
반면에 세리는 당시 유대를 식민 통치하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사람들을 수탈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자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군 앞잡이가 되어서 백성을 괴롭히던 자와 같다.
이 둘을 제대로 이해해야 이 비유의 참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실감하려면, 바리새인과 세리를, 매일 4시간씩 기도하는 목사와 사악한 사채업자로 바꾸어서 비교하거나 구제 많이 하는 장로와 매일 알코올에 절어 사는 알코올중독자, 새벽기도에 개근인 안수집사와 도박꾼 등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설정하고 나서 결국 사채업자나 알코올 중독자가 더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말을 들으면 심한 불편함이 몰려올 것이다. 아니 불편함을 넘어서서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맹렬히 항의하거나 트집 잡으려고 애쓸지도 모른다(눅 11:53-54).
◆ 비유의 교훈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겉으로볼 때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월등하다.
윤리적인 면이나 종교적인 면이나, 모든 면에서 바리새인을 세리와 견주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겸손을 권장하는 것일까?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은 이 본문을 읽고 난 뒤에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가 이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심지어 어떤 분은 우리가 세리처럼 되기를 기도했다. 세리가 과연 본받을 존재인가?
이 비유의 교훈은 세리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그 자만심이 세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모든 선행과 극기의 동기를 정확히 꿰뚫어 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자만심은 다른 모든 훌륭해보이는 것을 뒤집어엎을만한 죄성임을 일깨우신 것이다.
세속국가에서는 자만심을 죄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런 비유는 몹시 부당하다고 느껴진다.
더구나 자기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만심은 어떤 행위로 나타나지 않고 그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겨우 마음에서 일어난 이것 때문에 그동안 쌓아 올린 그 많은 선행과 극기가 모두 무시되고, 심지어 세리와 역전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만심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역심으로 취급된다. 왕국에서 가장 큰 죄가 역심임을 아는가?
죄성에 찌든 인간들을 움직이는 엔진은 두 개다.
하나는 욕심이고, 또 하나는 자랑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사랑의 힘보다는 자랑의 힘이 고아원을 더 많이 도왔다고 한다.
자랑은 매우 선한 탈을 쓰고 나타나서 잘만 이용하면 좋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없다. 그것은 단지 위선적 선이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씨를 뿌리면 쌍떡잎식물의 경우 똑같이 생긴 떡잎이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오른쪽으로 하나는 왼쪽으로 나와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한 뿌리이고, 같은 속성이다.
세리는 욕심이라는 죄성에 붙잡힌 존재고, 바리새인은 자기 자랑이라는 죄성에 사로잡힌 존재일 뿐이다. 사람들이 볼 때는 후자가 훨씬 훌륭해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바리새인들은 유독 예수님은 자기들을 별로 인정하지 않자, 즉시 적대시하고, 분노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게 자만심의 정체다.
적어도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건만, 바리새인은 회개는커녕 자신이 세리와는 다른 종자라고 뻐기고 있으니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겠는가?
아, 우리의 삶이 바리새인처럼 자기 자랑으로 찌들어있음을 아는가?
남을 비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예리함에 감탄이 나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한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다.
겸손한 체하지만, 사실은 그게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생기면 실천할 생각은 뒷전이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존경받으려고 하고,
무슨 일이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고,
'좋아요'라는 사람들의 칭찬에 기분이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자기 영광 추구가 원죄의 본질임을 알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 내 속에 뿌리가 너무 깊게 박혀서 뽑히지 않는'자기 자랑' 뽕나무가 있음을 아는가? 오직 믿음으로만 뽑아서 옮길 수 있는 나무다(눅 17:6).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시는 성령께서 이것을 알려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제대로 회개할 수도 없는 존재다.
내 자신도 이런 자랑의 뿌리가 너무나 깊이 박힌 것을 본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허덕이는 모습이 가련하다. 성령께서 이것을 깨우치실 때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 자랑은 내 의지로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욥과 같은 대단한 사람도 실패한 영역이다. 자기 자랑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였다(롬 7:4). 이 말씀은 자기 자랑, 자기 의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렇게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게 된 이유도 '자랑치 못하게 함'이다(엡 2:8,9).
우리는 자기 자랑이라는 엔진을 내버리고, 새로운 엔진을 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칭찬을 사모하고,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의 엔진을 장착하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그분의 심성을 우리에게 접목시킬 것이다.
주님,
저를 자기 자랑, 자만에서 건져주십시오.
사람들의 칭찬을 사모하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