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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수요일. -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이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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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이치
오늘 복음은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하시면서도 제자들을 그 미워하는 세상에 보내시며
세상에서 빼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악에서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을 왜 세상에 보내실까요?
더욱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에 왜 보내실까요?
그것은 미움받으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속하지도 않고 미워하는 세상에 왜 보내십니까?
그러니 제자들은 미움받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해선 안 되고,
미움받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설마 미움받이가 되라고만 보내시겠습니까?
미움을 받더라도 뭘 하라고 보내시고,
미움을 받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뭘 하라고 보내시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이 뭐겠습니까?
우리는 즉시 압니다.
우선 세상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역설입니다.
세상은 당신을 미워하고 제자들도 미워해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그래서 더더욱 제자들을 그 가운데로 파견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당신을 미워하고 제자들을 미워해도 세상은
포기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라는 말씀이고,
미워해도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니 믿음 받아도 사랑을 주라는 것이고,
사랑 중에서도 최고의 사랑인 복음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세상과 주님 제자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미워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랑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치 못해도 제자들은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말씀이라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과 달리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깨닫고 받아들인 사람들이며,
그래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고,
미움받아도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미움을 받아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받아야 하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고,
줄 수 없는 사람도 없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진 사람이고,
안 받아도 되는 사람은 이미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합니까? 주님의 제자입니까?
받아야만 되는 사람입니까? 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받아도 헉헉대는 사람입니까? 줄 수 있어 행복한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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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한 이들임을 재확인하면서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고, 그들이 하나 되고 거룩해지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6절),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26절)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느님보다 그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실체에 관한 모든 것, 곧 그분의 존재와 본성, 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사랑, 그분의 능력과 보호와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가장 처음 언급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에서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곧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4,26).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도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하신 분께 기도를 바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요한 17,11.12), 곧l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공적 소명을 끝내시면서, 그 소명을 이어가게 될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일치에 ‘하나’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나 됨’은 그리스도란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초대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사도 4,32).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말씀’, 곧 ‘진리’를 주셨고, 성령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이 더욱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주님!
깨끗하기보다 진실 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기보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단지 함께 있기보다,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되 행동하게 하소서.
또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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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말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천국을 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말하는 것같이 쉬운지 아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신부님은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시는데 하늘을 보니 제가 땅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땅에 있으니 땅의 처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공감은 하지만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거나 동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하늘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면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한1,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지금 당장 힘에 겹더라도 반드시 빛의 진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3,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진리인(요한14,6)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2,15).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2,3-4).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진리를 거슬러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믿는 이들이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내가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탓합니다. 믿는 이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못마땅한 것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살지 못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뽑아주시어 거룩하게 해 주셨으니 그에 걸맞은 거룩함을 살아야 합니다. 혹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맡겨드려 다시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꿀단지 뚜껑을 열어두면 자연스럽게 벌들이 모여들 듯이 나의 모습에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충만하여 빛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악에서 지켜 주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로 요약 됩니다. 그 기도가 내 안에서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뉴욕 코넬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가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한 이야기가 있다. 개구리가 지내는데 적정온도는 12도인데 한 마리를 45도가 되는 뜨거운 물에 넣었더니 그 개구리는 순간적으로 뛰어올라 도망을 갔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찬물이 들어 있는 시험관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였더니 30도가 넘어도 큰 저항 없이 놀다가 결국에는 뜨거운 물 속에서 죽고 말았다. 습관은 내가 만들고 결국에는 습관에 끌려다니고 죽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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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버스기사가 순례자들에게 자주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빨리빨리”였습니다. 한국 순례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빨리빨리’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인들에게 내재되었던 감성은 ‘절망과 좌절’이었습니다. ‘Korea Time’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 말은 한국인은 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있었습니다. 암표가 성행했고, 새치기도 일상이었습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다보면 질서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외국에 나가도 한국인들은 금세 표시가 날 정도였습니다. 고성방가와 무질서가 외국인들의 눈에 보였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문화적으로 취약했고,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교실이 부족해서 2부 수업은 물론 3부 수업까지 했습니다.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삶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연탄가스 중독도 심심치 않게 전해 졌습니다.
어느 날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구호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어 설 수 있다는 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아침이면 새마을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고, 우리의 경제는 매년 성장하였습니다. 더 이상 외국 담배, 외국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속 성장의 이면에 공존의 그늘이 있었지만 한국은 더 이상 게으른 사람이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더 이상 좌절과 절망을 품은 사람이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중교통은 쾌적하고, 깨끗하고, 편안합니다. 외국의 버스기사도 ‘빨리빨리’라는 한국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시대를 선도하기도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앙은 근본적으로 받은 것을 나누는 겁니다. 저는 성격이 급하고, 일을 시작하면 바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 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저의 뜻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제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저와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정확하게 보고 있으며, 제게 부족한 것들을 많이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 서로의 이익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부도 서로만을 바라보면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자라온 환경, 성격, 취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는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정의 행복, 자녀의 교육, 앞날에 대한 희망입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때로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각 단체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문제들을 풀어갈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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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젊은 형제님의 불만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거의 허드렛일이라는 것입니다. ‘겨우 이런 일을 하려고 비싼 학비를 내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가?’라는 회의가 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토대로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데, 허드렛일만 하니 자기 능력을 보일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일본 교토에 ‘일본 전산’이라는 초소형 정밀모터 제조업체가 있습니다. 연간 매출이 3,000억 엔(한화 3조 원 정도) 이상으로 아주 탄탄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이가 매년 지원합니다. 소위 스펙이 좋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지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회사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1년 동안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고 합니다. 이 회사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소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소처럼 아주 간단한 것도 못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철학입니다. 결국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그만큼 필요한 사람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사회 안에서의 지위가 성당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길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존감을 세우는 것은 주님보다 더 윗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주님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명령대로 행동하는 ‘종’처럼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11)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되어야만 진리로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 됨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겸손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만이 하나의 가능성을 만듭니다. 자기만을 따르라고 하고, 자기 원하는 것만 하는 곳에서 서로 ‘하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안에서, 또 교회 안에서도 허드렛일이란 없습니다. 제자의 발을 닦아주시면서까지 주님께서 왜 종처럼 행동하셨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처럼 겸손의 마음으로 자기를 낮춰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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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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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의 여정
-“주님,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얼마전 구입한 세권의 한국 위인 평전을 틈틈이 소중히 읽고 있습니다. 시기별로 평전 이름에 붙은 명칭이 마음에 듭니다. 이황 “퇴계평전-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 이이 “율곡평전-나라를 걱정한 철인-”, 정약용 “다산평전-백성을 사랑한 지성-”, 이중 한국 5천년사 최고의 학자를 꼽기로 하면 당연히 다산 정약용일 것입니다.
세분들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로 해도 손색이 없는 참으로 진리를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했던 분들입니다. 후손의 저희에게 안타까운 점은 한자로 된 이분들의 깊고 아름다운 글들을 직접 읽으며 배울수 없다는 점이겠습니다. 어제 가톨릭 다이제스트 6월호 안표지의 잠언성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입니다.
“질문을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답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대로 사랑이신 하느님만을 찾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딱 드러맞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늘 하느님을 끊임없이 물으며 살 때 언젠가 하느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는 것이며 사실 우리 삶이 이미 그러할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나고 있으며, 이런 ‘만남의 기쁨’이 살게 하는 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도 어제에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고별기도로 당대의 당신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를 향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로 심금을 울리는 아름답고 진정성 가득한 기도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동시에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는지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대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모범이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어제처럼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별기도중 감동적인 일부 대목을 나눕니다. 흡사 주님의 기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기도입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말고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누룩, 세상의 빛같은 수도원이자 우리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사 비는 주님이십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뿐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들을 사랑하고 공부하고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말씀과 하나됨으로 날로 성화되어 거룩해질 때 악에 대한 최고의 처방일 것입니다. 악(惡) 대한 최적의 처방은 착할 선(善)이 아니라 거룩할 성(聖)이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함의 불길속에서 불태워지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화의 여정에 필수적 수행이 사랑, 기도, 말씀 공부와 실천임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새삼 사랑과 기도를 곁들인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성독의 선택, 성독의 훈련, 성독의 습관화입니다. 비단 신구약 성서뿐 아니라 성서의 성독의 수행은 시편성무일도와 미사공동전례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면서 관상의 삶도 실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오로는 둘이자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없는 바오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제에 계속이어지는 바오로의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 대한 작별인사는 구구절절 감동이요 살아 있는 교훈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주님의 기도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신자들을 사랑했는지 역시 경천애인의 모범인 바오로입니다.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별인사 일부를 인용합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잘 보살피십시오...내가 삼년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이제 나는 하느님과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처럼, 완전히 진리의 말씀과 하나된, 즉 예수님과 하나된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신을 완전히 비워 주님으로 가득 채운 무욕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바오로입니다. 복음 말씀대로 진리로 거룩해진 바오로요 ‘성화의 여정’의 모범적인 분입니다. 마지막 대목이 감동적입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이들 원로들과 혼연일체(渾然一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말그대로 사랑의 눈물, 기도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며칠전 난생 울컥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행사때 마다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그 전문을 나눕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광주의 비극을 주님 안에 어떻게 승화(昇華)하여 체화(體化)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이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고별기도와 바오로의 고별인사가 참 감동적이요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진 삶, 성화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19,2)
날로 주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 그대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과 통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거룩해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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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건강하길 바라십니까? 아니면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십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또 여러분의 자녀가 좋은 집에 좋은 직장에 다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물어본 돈이나 건강은 행복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제에 이어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복음에서 우리가 어떻게 되길 바라신다고 하십니까? 세 가지로 나오는데 그 첫째는 ‘이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악에서 지켜주십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진리로 거룩해지도록.’ 해달라고 청하십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세 가지 소원은 한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들과 함께 계셔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우리와 하느님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죽음까지도 하느님에게는 하나의 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즐거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어둠의 세력은 그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태양이 있는 동안에는 어둠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가 행복하길, 그리고 그 행복이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의 기도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불한증막
불한증막에 갔습니다.
낮은 온도, 중간 온도
높은 온도, 사악한 온도
이렇게 나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잘못 갔습니다.
입장료도 다 냈는데 잘못 갔습니다.
사악한 온도만 있었습니다.
슬쩍 다른 사람들을 보고
거적을 뒤집어쓰고 들어갔습니다.
하나, 둘, 셋,
나왔습니다.
발바닥이 뜨거워서….
방석 두 개와 거적을 쓰고 다시 들어갔습니다.
하나, 둘, 셋,
다시 나왔습니다.
콧구멍이 뜨거워서….
지옥 체험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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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오직 하느님께 빕니다
오직 하느님께 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요
하느님께 대한 희망고백이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고백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기에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품어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고백이기에
정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돌보아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고백이기에
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가 살려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오직 하느님께 비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을 믿고
하느님의 사람을 바라고
하느님의 사람을 사랑하기에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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