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절기 추분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날씨가 쌀쌀하니 일교차가 커져서 옷깃을 여미게 하고 몸을 움츠리니 마음도 바빠지게 된다.
이렇게 몸이 움츠려지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주변의 일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니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 된다.
○ 어느 해 추분무렵에
잘 다듬어진 포장도로를 달려 설악의 고갯마루에 차를 세우니 구름위로 솟은 오대산 비로봉에는 유유자적 낮달이 졸고 구름에 하늘 맞닿은 설악산 대청봉은 맑은 날씨탓인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산허리를 맴도는 안개가 오롯한 존재 두두물물마다 더하는 사유의 깊이에 지나가는 나그네 전설 속에 갇힌듯이 갈바람에 계곡의 원시림은 자연인이 되고픈 머무름의 유혹을 자아낸다.
아름드리 고목에는 천년 이끼들이 선승의 누더기 옷자락이 되었어도 나무를 쪼아되며 구멍 파는 딱따구리 소리는 아련한 추억들을 이끌어내니 머물고픈 자연의 풍경이 경이롭다.
길섶따라 야생화들이 가을 햇살에 해맑은 미소를짓고 단풍잎새 하나 둘 곱게 물들이며 바람에 흩날리니 설악이라서 인가 옷깃을 파고드는 고갯바람은 벌써 만추의 바람결이 느껴진다.
극장에서 감상하는 한편의 명화 보다 햇살 살가운 창가에 앉아 읽는 한권의 독서보다도 맑은 가을차 한잔에 글을 쓰는 기쁨보다도 오늘 하루가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건 비움의 결기에 남루함도 초라함도 가식 하나 없는 자연의 순수한 자아의 본질을 본 것이리라
내 발길은 갈빛 곱게 물드는 설악을 뒤로하고 피톤치드(phytoncide)를 차에 가득싣고 산길을 따라 속초의 영랑호로 줄달음친다.
○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라...
추분무렵이면 북송시대 소옹(邵雍)의 ‘맑은 밤에 읊는다’는 '청야음(淸夜吟)'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제목과 시어에 가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가을의 정경을 잘 그려내고 있어서다.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
달이 하늘 가운데 걸려 있고,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
바람이 물위로 불어 온다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이렇게 청아한 맛
요득소인지(料得少人知)
헤아리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
소옹은 가을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쉬 잠을 이루지 못한다. 고개를 들어 창밖의 하늘을 보니 밝은 달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걸려있다.
때맞춰 미풍이 불어오지만 물위를 스치듯 지나갈 뿐 물을 흔들어놓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맑은 하늘과 잔잔한 물은 세사에 흔들리지 않는 소옹의 여여한 마음이리라
이러한 서정에 소옹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에 뜬 밝은 달과 물위를 지나는 바람을 보며 느낀 정취를 ‘맑을 청’ 한 글자로 나타낸다.
그래서 가을은 아무래도 쉬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많다. 그때 소옹이 말한 ‘청’의 정취를 온몸으로 느껴보면서 밤은 깊어가고 사유 또한 깊어가니 이아니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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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군
오늘은 추분
조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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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3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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