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의 반성문
내년에는 아마 나무들의 키가 크게 자라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태풍이 심했다. 바람도 세고 비도 많아서 평소 멀쩡하던 나무들이 넘어지고 뿌리째 뽑혔다. 자정과 조정능력에 이상을 발견한 나무들은 급히 성장 방향을 수정, 내년에는 나무의 키를 키우기보다는 뿌리와 둥치를 튼튼히 하는 쪽에 전력하기로 했다. 나무가 태어난 이래 올해처럼 심한 비바람을 겪어본 경험치도 없고, 지구환경 변화에 대한 미래 예측치도 없어 미처 충분한 방비를 하지 못했다.
나무들은 또 자신들의 경거망동에 대한 반성도 했다. 뿌리내린 곳의 토질과 햇빛과 수량에 따라,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에 따라, 그래서 때와 장소와 시간이 성장의 함수관계가 되어 스스로를 보호하고 통제하는 최적의 결정을 내렸어야만 했다. 우주만물의 원리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자만과 오만에 빠져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과신했다.
사람들의 유혹이 문제였다. 나무를 빨리 키워서 정원수로 내다팔거나 돈이 되는 수확물을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많이 생산하려는 인간들의 교묘한 계산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결과였다. 영양가 높은 거름이나 비료를 시시때때 뿌려 주는 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식탐을 부렸다. 연못가 배부른 거위들이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져 스스로 생존을 위한 의지와 능력을 잃어가듯, 나무들도 그 어두운 땅속 넓고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쳐 수분과 영양분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더 이상 하지않았다. 몸통은 여리고 뿌리는 얕은데도 키만 멀대같이 커진 나무들이 결국은 조그만 비바람에도 제 몸 하나 가누질 못해 휘청대기 일쑤고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제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자기만을 위해 인간들이 주변의 잡목들을 베어내고 제초제를 뿌려 잡초들이 자라지 못하게 해주어 그야말로 유아독존이었다. 좁은 공간을 서로 차지하려 다투어야 할 필요도 없었고, 땅속 뿌리들끼리 그물망처럼 서로 얽히고 섞여 부대끼며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 있어 편하고 풍족해서 좋았으나 경쟁이 없어지자 긴장감도 사라지고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온실 속에서 자란 면역력 없는 화초처럼,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견디고 부딪치며 살찌운 건강한 생명력을 차츰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생존의식이 없으니 빈틈없이 땅을 차지하려 애쓰지도 않고, 조금이라도 깊이 뿌리내려 땅을 움켜쥐려고 하지도 않았다. 멀리서 날아온 풀이나 나무들의 씨앗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오염된 땅에서는 더 이상 자리 잡지를 못하고 금방 시들어버렸다. 혼자서만 뿌리박은 흙은 가벼운 가랑비에도 벌건 속살을 드러내며 골이 깊게 파일 만큼 연약해서 산사태 때 그야말로 속수무책, 그리 쉽게 땅이 허물어져 내려도 혼자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환경에 대한 스스로의 적응원리를 망각하고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길들여진 부작용이었다.
자연은 자유로워야 한다. 사람들의 감각에 눈요기로 만들어진 전지나 분재된 나무들은 그냥 보기 좋은 조형물일 뿐이지 진정한 자연이 아니다. 여름이면 뜨거운 태양 아래 한 줌 소나기에 목말라 보기도 하고, 겨울이면 매서운 눈보라에 가지가 꺾여나가는 아픔을 견뎌내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무심한 하늘을 향해 목놓아 울어도 보고, 어둠의 땅을 파헤치며 가슴이 찢어져보기도 해야 한다. 태양과 바람과 빗방울과 별들의 영혼과 함께할 때 비로소 원형질의 자연이다.
자연 속의 나무는 자신의 역량과 한계를 스스로 판단하여 잎도 열고 가지도 키워낸다. 꽃이라고 모두 열매로 맺지도 않는다. 열매의 수량과 크기마저도 중간에 제한하거나 과감히 도태시킨다. 힘들게 여물어 낸 씨앗은 최대한 멀리, 더 넓게 퍼뜨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바위 틈새나 여울목에도, 아무리 척박하고 열악한 땅에도 혼불 같은 그 씨가 날아들어 새롭게 움을 틔우고 뿌리가 내리도록 경이로운 생명력과 생존력을 발휘한다. 자연의 지혜와 방법은 원래 그렇게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것이다.
저 앞산의 풍치를 농담濃淡도 없는 짙푸른 색 한 가지로 도배해 놓은 것은 결국 사람들이었다. 봄철 초록에도 빛깔의 채도와 명암이 있어 푸르름이 가지각색이고, 가을철 단풍에도 노랗고 거무스름하고 붉디붉은 것이 있어 온 산을 화려하게 채색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서로 어울려 함께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뼘 땅과 한 줌 햇빛을 놓고 내가 살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저마다 자기다운 모습과 의미를 지키면서도 함께 생존할 수 있는 균형과 조화의 이치를 나무들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경제수종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이 온 산을 한 종류 나무로만 심어놓고 서로들끼리 더 빨리, 더 크게 자라도록 경쟁과 반목을 부추기며 전쟁터로 만들어 놓았다.
올해도 산마다 간벌이 한창이다. 군락을 이룬 소나무들을 솎아주었을 때와 그냥 두었을 때와는 같은 기간 동안 나무들의 둥치와 키의 성장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간벌이 당연한 경제논리이다. 곧은 놈, 키 큰 놈, 잘생긴 놈은 훌륭한 목재감으로 살아남고 굽은 놈, 키 작은 놈, 못생긴 놈은 쓸모 없는 땔감으로 일찌감치 그 운명의 선택이 갈라질 수밖에 없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도 옛말이다. 나무 속은 썩고 병들어도 겉으로 멀쩡하고 보기 좋으면 그만이다. 바위를 끌어안느라 허리가 굽은 나무, 하늘을 열어주느라 남보다 덜 자란 나무, 산새들에게 집을 내주느라 울퉁불퉁 상처난 나무들이 선의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안타깝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던 그 옛적, 잘난 놈 못난 놈 서로 기준도 없고 비교됨도 없이 세상을 함께하던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무척 그립다.
나무는 정상이다. 사람이 있어 문제가 되고, 그 배경에는 항시 탐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