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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묵상글 ( 연중 제9주간 금요일. - 우리의 행복한 말로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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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의 행복한 말로는?
오늘 저는 토빗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오늘 토빗기와 다른 결론 곧 Happy Ending이 아니라
Sad Ending으로 끝내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 토빗기를 좋아할까?
또 이런 성찰도 해봤습니다.
토빗기의 이런 얘기와 이런 결말은 그리스도교적인가?
먼저 슬픈 얘기로 끝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악인들의 말로가 불쌍하고 불행한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하지만,
착한 사람의 말로는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지상정은 그리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선 선인과 마찬가지로 악인에게도 빛을 주신다고
주님께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또 그리스도의 얘기는 토빗과 달리 Sad Ending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야말로 토빗보다 더 큰 사랑을 하셨고,
인간을 위해 온갖 좋은 일을 하셨건만,
제자들의 배반까지 당하시며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른 제자들이 박해도 받겠지만,
현세에서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긴 하셨지요.
그러니 이것이 완전히 비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럴지라도 그리스도교의 종말은 이 세상에서 Happy Ending이 아니라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Happy Ending이지요.
어제는 제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분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90을 넘기셨고 치매도 점점 심해지셔서 더 늦기 전에 만나려고
지인들과 함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한 것인데
그분이 기억은 헝클어지셨어도 도리나 예의나 관점은 또렷하셨습니다.
그런데 얘기 중에 왜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죽어서 천당 가는 문제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천당 가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당신도 천당 갈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천당 가고픈 마음이 없으시냐고,
천당 가고 싶으시면 지금부터 그렇게 기도하고 청하면 된다고 하니
가고 싶으신지에 대한 답은 않고 자격이 없다고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이것이 겸손의 말씀인지 포기의 말씀인지 몰라 순간 당황하였고,
겸손의 말씀이 아니라 천당 포기의 말씀이라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그런 신앙인과 신앙생활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진정 Sad Ending보다 Happy Ending이 좋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행복한 말로가 무엇인지 생각해야겠습니다.
토빗처럼 되는 것 곧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끝나는 것인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인지
오늘 토빗기를 통해 깊이 생각게 되는 오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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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십니다.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한 이들로서, 율법을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을 갖추고, 종교,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었고,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다윗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민족 자긍심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로마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신의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2사무 7,12;이사 9,2-7;11,1;12,23;15,22 등)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곧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새로운 다윗왕조, 새 예루살렘의 지상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인식 자아인식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곧 당신 자신을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로 밝히십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이는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당신의 메시아적 신성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곧 당신께서 혈육으로는 다윗 가문에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다윗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인격은 다윗에 종속되지 않으며, 메시아로서의 구원사업도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여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갈라 4,4) 놓이셨고,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로마 1,3).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면서 마리아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면서도 마리아의 창조주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되 위엄으로는 마리아의 “주님”이시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되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세상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말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마르 12,27).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참된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주님!
다윗을 만드셨듯이, 저를 만드소서.
다윗을 통로로 오셨듯이, 저를 통로로 삼으소서.
다윗에게서와 같이,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다윗의 주님이시듯,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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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것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문을 열어 놓아야 더 풍요로워집니다. 특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유식한 무지를 속히 버려야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으며 하느님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다윗 가문의 출신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마르12,36). 하고 말하였는데 첫 번의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내 주님께’의 ‘내’는 다윗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주님’은 예수님시대의 율법학자뿐 아니라 유다교의 각 종파에서는 모두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으로 이해하였습니다(2사무7,12-16. 22,51; 호세3,5; 예레30,9)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다윗의 메시아인 예수님께 당신의 오른쪽에 앉게 하여 모든 권능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하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는 메시아는 ‘위대한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자손’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핏줄과 족보에 따른 메시아, 다윗의 왕정 이념에 따른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뛰어넘어선 권위 있는 메시아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갈망하던 잘 먹고 잘사는 평화로운 세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는 마침내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추종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학자들이 망신당해서? 아니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시고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끌려서? 아니면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갖게 되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바람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원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 내가 만든 하느님 상을 살펴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나보다 먼저 태어났느냐 나중에 태어났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깨달음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참된 깨달음 안에는 나이의 앞뒤가 없습니다. 인생은 살아온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로 기억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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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2월에 LA에 왔을 때 신부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유학 중에 공부하면서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무척 바쁘셨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미국성당에서 주일과 평일 미사를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작년 12월부터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LA 교구에서는 신부님께 한인성당의 사목을 정식으로 제안하였고, 신부님은 미국성당을 나와서 한인성당의 사제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학교 공부도 다 마쳤고, 이제 한인성당의 사목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을 두 번 만났지만 말씀과 행동이 참 겸손하였습니다. 오랜 수도생활 속에서 얻어진 영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겸손과 영성으로 신부님께서 뿌리는 말씀의 씨앗이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교우들도 하느님 품으로 가신 전임 신부님께서 영성이 깊은 사제를 선물로 보내 주셨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진리의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3년 전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2020년 8월은 코로나 팬데믹이 정점에 이를 때였습니다. 신문홍보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부르클린 한인성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한국에 가셨는데 11월까지만 미사를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미사를 도와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가신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다시 본당으로 복귀할 수 없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제게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부르클린 한인성당 미사를 도와주도록 제안을 하였고, 저와 서울대교구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을 정식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일미사만 도와드렸는데 지금은 사목회도 함께하고, 야유회도 같이 갑니다. 장례미사와 연도도 같이합니다. 팬데믹이 풀리면서 신문홍보를 갈 때면 주일미사를 손님신부님께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신부님처럼 겸손하거나 영성이 깊지 않아서 많이 부족하지만 3년 동안 교우들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본당신부와 손님신부는 분명 다릅니다. 본당신부는 책임과 권한이 있습니다. 본당신부는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합니다. 본당의 재정을 충실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경청해야 합니다. 함께 사는 수도자와 동료사제들과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본당신부가 권한만 내세우고 책임에 소홀하다면 나쁜 소작인이 될 것입니다. 손님신부는 권한은 없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지금 본당신부가 없는 공동체에게 깊은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본당신부와 손님신부는 직책에는 차이가 있지만 하느님께서 맡겨 주시는 사명은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모든 사제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다투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툼의 원인과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제 귀에 들렸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너 몇 살이냐?’ 그러자 조금 젊은 분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벼슬입니까?’ 어른을 잘 섬기고,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시비를 가리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가끔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구교우 집안이라는 말, 세례를 받은 연도가 빠르다는 말, 교육을 받은 기수가 빠르다는 말, 성직자 집안 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옳고 그름을 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다윗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다니엘을 선택하셔서 수산나의 무죄함을 밝혀 주셨습니다.
진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배움의 깊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직책을 가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느 곳에 있어도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교만함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당신부와 손님신부라는 직책이 본질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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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춘기인 자녀 때문에 힘들다는 부모가 많습니다. 그렇게 착했던 아이가 갑자기 반항적으로 변하고 툭하면 짜증만 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달라진 아이의 모습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사춘기는 청소년들이 아동기를 벗어나면서 큰 변화를 겪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갑작스러운 호르몬 변화로 합리적 판단과 대인관계능력, 실행 능력을 담당하는 전전두피질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만 날뛰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도 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감성적으로 만취 상태.’
편도체의 안정화가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특히 부모의 폭력성이 그대로 전이되는 시기이기에, 따뜻한 말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신앙생활도 좋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문제는 이 시기에 부모와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신앙생활에도 부정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비슷한 또래들과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때로는 탈선해서 삐뚤어 나가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전문가들은 사춘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참과 거짓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적성에 맞는 일들인지 질문하여 스스로를 잘 알아가야 한다.
둘째, 본인이 생활해왔던 일상의 패턴을 잃지 말고 유지해야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자신이 잘하는 것과 관심 있는 것들을 이끌고 나갈 자신이 있는지를 생각한다.
셋째, 지금 하기 싫고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추후 중요한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새로운 경험이나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모두 겪은 사춘기인데도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만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전지전능하신 주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특히 세속적으로 판단하면 할수록 주님은 더 알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도 주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념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서 율법학자들이 강조하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해 새롭고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해주십니다. 다윗의 자손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이유는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왕, 지상에서 위풍을 떨칠 세속적인 왕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왕이 메시아가 아님을 밝히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세속의 임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주님을 알아가고 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들을 잘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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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먹어라. 먹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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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찬미가 답이다
-찬미 예찬-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여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좋습니다.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를 나서니 반가운 비가 내립니다. 여전히 봄비라 부르고 싶습니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소리가 흡사 찬미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찬미란 말만 들어도 좋습니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믿음, 찬미의 기적, 찬미의 축복, 찬미의 기쁨, 찬미의 치유, 찬미의 노동, 찬미의 성화(聖化) 등 끝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 찬미가 답이요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찬미가 답이다-찬미 예찬-”으로 정했습니다. 예전 “찬미하라”라는 강론 내용도 생각납니다.
“내 슬픔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아픔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병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어둠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불안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내 절망이요 주님을 찬미하라.”
불운을 행운으로 바꾸는, 파스카의 신비를 실현시켜주는 찬미의 은총입니다. 이렇게 모든 부정적 감정을 찬미로 하느님께 들어 올릴 때 찬미의 기적, 찬미의 치유, 찬미의 성화이니 이 또한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엊그제부터 배밭 배봉지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자매님들이 흰봉투로 배열매를 쌀 때 마다 하늘에 흰별들이 떠오르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별을 다는 성모님 어머니들”이란 글도 써봤습니다. 몇 년전에도 나눴던 깨달음입니다.
“하늘에 가득 달린 흰별들 같다
배밭나무들 하늘마다
하나, 둘, 셋...떠오르기 시작한 무수한 흰별들
성모님 어머니들 사다리 오르내리며
묵묵히, 인내로이
배열매마다 흰봉투를 쌀 때 마다 떠오르는 하늘의 흰별들
하늘에 별을 다는 어머니들
성모님 어머니들 마음 하늘 안에
하나, 둘, 셋....무수히 떠오르는 흰별들
희망의 별, 기쁨의 별, 찬미의 별, 감사의 별, 사랑의 별 형형색색이겠다.”-2023.6.8
이런 노동이라면 찬미의 노동, 노동의 찬미라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살림살이를 위해 온힘을 다해 사는 어머니들을 보면 또 하나의 성모님같다는 확신이 듭니다. 오늘 제1독서 토빗기 내용도 감동적이요 아름답습니다. 토빗의 시종일관 한결같은 “찬미의 믿음”이 참 위대해 보입니다. 토빗이 시력을 되찾으니 말그대로 찬미의 믿음, 찬미의 기적입니다. 토빗이 그 아들 토비야의 목을 껴안고 울면서 바치는 찬미의 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예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내 눈에 빛인 네가!’라는 말마디도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 하나하나도 하느님의 빛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찬미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쁨에 넘친 토비야도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 토빗으로부터 하느님 찬미를 보고 배운 아들 토비야임이 분명합니다. 시아버지 토빗의 며느리 사라를 향한 축복의 말도 참 좋습니다. 토빗의 너그럽고 관대한 시아버지다운 마음은 바로 하느님 찬미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길 빈다. 너의 아버지께서 복을 받으시고 내 아들 토비야도 복을 받고, 그리고 얘야, 너도 복을 받기를 빈다.”
찬미의 축복, 축복의 사람, 토빗입니다. 오늘 복음에 인용되는 다윗 역시 성령의 사람이자 찬미의 사람입니다. 다윗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에 인용되는 시편110장은 다윗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바치는 고백입니다.
“주님(하느님)께서 내 주님(예수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초대교회 신자들이 시편110장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발견한 태초부터 선재(先在)하시는 다윗의 주님, 예수님께 대한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이들 덕분에 예수님이 다윗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성독(聖讀)의 달인(達人)들”인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성령의 사람들, 찬미의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찬미가 답입니다. 사랑의 찬미, 찬미의 믿음, 찬미의 기적, 찬미의 기쁨, 찬미의 축복등 “찬미 예찬”하기로하면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항구히, 충실히 “찬미의 여정”을 살아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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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하느님의 일꾼입니까? 아니며 하느님의 도구일까요? 물론 둘 다 맞는 말입니다만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하느님의 도구가 맞을 것입니다. 내가 망치를 잡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망치인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큰 차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망치는 언제나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몽당연필입니다.’라고 그리고 연필로 글을 쓰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봉사 생활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기도 생활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둘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둘을 꼭 해야 합니다. 그런데 둘 중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둘 중의 하나만 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 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도 기도입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시던 분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나면 더는 성당에서 볼 수 없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미사도 거른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봉사할 때는 열심히 하는데 막상 그 자리를 그만두면 성당과 멀어지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 봉사가 그리스도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 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봉사가 그리스도에게 봉헌된 봉사가 아니라 내 업적에 봉헌된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협잡꾼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점점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악의 세력은 그들을 넘어트리려고 유혹하기도 하고 나태하게도 하고 교회에 싫증을 느끼게도 하고 또 신앙생활에 실망하게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유혹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혹에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친구의 세 부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음식처럼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친구
약처럼 가끔 필요한 친구
질병처럼 항상 피해야 하는 친구
나는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친구의 모습인가요?
나는 주님을 나의 어떤 모습의 친구로 여기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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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9. 연중 제9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2023.06.09 16:17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용된 시편은 110편으로
그 시편은 다윗이 작성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메시아는 세상을 위한 구원자로서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성부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으로서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이 말하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미카서 5장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 통치자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라고 해석합니다.
유다는 다윗의 도성으로
메시아가 유다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사실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메시아는 주님이시기에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셨지만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인간이 되실 때
다윗 이후에 세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즉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가 다윗보다 뒤쳐진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시간 상 늦게 모습을 드러낸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한 말과
비슷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로
메시아보다 다윗이 위대함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위대함이나
메시아가 별 볼 일 없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메시아로 생각되는 예수가 별 볼 일 없는 존재임을
표현하고 싶은 말로 들립니다.
메시아를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표현하시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심을,
그래서 율법학자들의 생각이 옳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예수님에 대한 질투로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몰려드는 것에 대해
그들이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질투는 우리의 눈을 가려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각자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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