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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의 기초
파르메니데스 '존재' 개념
'헛된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의 하나가
“헛되다”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
실이다. 만물은 유전하고 인생은 헛되다.
성경의 전도서 1장 2절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
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
고 한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는다. 그리고 자
식이 부모 먼저 가는 수가 왕왕 있다. 이때 우리
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한다. 불교(佛敎)
역시 그런 반성 위에 근거한다. 색즉시공(色卽是
空)이라는 말이 있다. 물질계가 모두 헛되다는 것
이다. 이를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왜 이렇게 헛된 것이 우리 인생일까? 이것이 바
로 모든 철학의 단초일 수 있다. 철학의 단초는
쉽다. 누구나 인생적인 혹은 철학적인 의문을 가
진다. 그러나 그 연구는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쉽게 철학을 설명해도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 여
기서 다루는 부분은 쉽지 않다. 이를 이해하지 못
하면 서양 철학의 기초를 내 것으로 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가능은 불가능하다, The imp
ossible is impossible!”
이런 믿음으로 철학의 여행을 떠나보자.
위의 불교적인 혹은 인생론적인 헛됨의 문제를
서양 철학 역시 태초부터 직면하고 이를 탐구해
왔다. 그러나 출발점은 비슷하지만 그 방법이나
도달한 결론은 불교와 극히 다른 것이 서양 철학
이다.
서양 철학은 이런 문제를 변화와 생성의 문제로
규정했다. 즉, 삶이 죽음이 되고 또 죽음에서 삶
이 발생하는 문제를 단순히 변화(change)의 문
제로 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헛된 세상
을 불교와 마찬가지로 가상(假想)이고 환상(幻
想)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머물지 않
고 인간 인식의 방법을 분석하여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아테네 학당'의 파르메니데스-라파엘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의 형성의 근거가 된 것은
그의 선배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존재” 개념
이다. 서양 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존
재 개념이다. 현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Hei
degger)도 존재(存在) 혹은 실존(實存)의 개념
을 가지고 자신의 철학의 탑을 쌓았다.
참고로 존재와 실존은 서로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서양 철학의 기본은 존재론(ontology) 혹은 형
이상학(metaphysics)이다. 그런데 플라톤에 앞
서 서양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명제는 “존재는
존재한다(Being ist)"
혹은 “있음은 있다”이다. 당연한 말인 듯이 보이
는 이 문장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일견 동어반
복(同語反覆)적으로(tautology) 보이는 이 문
장은 실은 변화와 생성을 부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A=A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일
견 당연하게 보이지만 양자는 엄청난 차이를 가
지고 있다. 이를 간과하는 학자들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존재론을 가볍게 보는 수가 있기는 하나, 이들은 양자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세한 논증은 필자의 저서<논리의 탄생>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파르메니데스의 “있음은 있다”에서 도리어 논리학의 동일률(同一律), 즉 A=A 가 파생되었다. 이 설명은 다음에 다룰 것이다.
“있음은 있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무엇
이 있다면 그것은 없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있는 것은 없어질 수가 없고, 따라서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다. 혹은 존재자의 속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달리 말해서 '있음' 혹은 '있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음 혹은 유(有) 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드디어
“있음은 있다”라는 철학 최대, 최고의 간결한 진
리에 도달한 것이다. 단 한 문장으로 그는 서양
철학 혹은 모든 철학의 출발을 그 기반으로부터
뒤엎고, 신선하고 진실된 토대를 닦은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변화와 생성 그리고 소멸 등
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 자연계와 인간계는 모두 변
하고 생성, 발전, 소멸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경험적인 사실을 신박하게 부정한 것이다. 왜냐
하면 변화, 생성, 소멸, 발전 등은 모두 그 논리 구
조상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되고 혹은 있는 것
이 없는 것으로 되는”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아기가 태어났다” 혹은 “나의 어
머니는 죽었다”라는 사실 역시 철학적, 논리적으
로는 모순이라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상당히 경악스러운 주장이다.
철학은 이처럼 때때로 상식과 경험을 완
전히 무시할 수 있다. 그런 철학이 궤변
이라고 철학을 비판하고 욕한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 역시 그 사람의 자유이다.
그럴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참
다운 존재(being)는 감각, 지각되는(perceive)
것이 아니라 사유되는(=생각되어지는) 것이
다.'라고 한다. 즉, 눈에 보이는 것, 경험되어지는
것은 참다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가상(假想)
이고 환상(幻想)이라는 것이 서양 최대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사상이 정립된다. 즉, '감성으로
아는 것은 신뢰할 수 없고 이성으로 파악된 것만
이 진리이다.'라는 사상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라고 했다.
그는 감각되는 것(=보이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설령 그것이 집이나 거리 혹은 부
모나 자식 같은 우리의 중요한 삶의 일부라도 그
렇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런 현실의 존재들이 변
화하고 생성, 소멸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
는 인생 일장춘몽(一場春夢) 혹은 인생무상(人
生無常) 등이 파르메니데스의 사유와 유사하다.
그러나 불교와 파르메니데스 차이점은 양자 모두
"보이는 세상", “감각적인 것”(the sensible)을
철저히 부정하지만 후자는 “사유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t
he intelligible)은 있다”라고 본 점이다. 즉 있
음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과 사유에 의해서 알려
진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다”라는 명제를 남긴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 변화, 소멸되는 세상 즉,
우리의 현실 세계를 부정했다. 왜냐하면 논리적
으로 볼 때, 있음 혹은 유(有)의 본성은 문자 그대
로 “있는 것”이다. 있음은 오직 사유를 통해서 접
근된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생성, 변화, 소멸하
는 세계=이를 철학에서는 현상(現象, phenom
철학자의 길, 종교의 길
그 반면 “참다운 존재는 있다” 혹은 “영원(永遠)
불변적(不變的)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기독
교의 경우는 이는 신(神)과 같은 존재이다. 이 점
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Being) 개념은 성경
창세기 3장 13절의 예화 즉, 모세가 하나님의 이
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하여간 파르메니데스
의 존재 개념은 스스로 혼자 계신 하나님의 존재
와 비슷하다. 단, 차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권능이나 인격 혹은 창조 같은 속성은 없다.
그리고 그 존재 혹은 유일자를 아는 방법은 전자
는 사유를 통해서이고 후자는 믿음이나 성경을
통해서이다. 전자는 철학의 길이고, 후자는 종교
의 길이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전통이 수
립이 되는데 그것은 감각이 아니라 (올바른) 사유
를 통해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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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및 후대 철학의 발전에서 본 파르
메니데스 철학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브런치북 나를 위한 3분 서... 4화
참다운 존재는 불변적이다.
참다운 존재는 감성이 라기보다는 이성과 사
유를 통해서 파악된다.
이 참다운 존재는 나중에 개념, 법칙,정의 (defi
nition)혹은 원리(principle)로 불리어진다.
서양 철학 내지 학문의 2대 본질을 형성한 것이
다. 이 두 가지는 현대까지 적용이 되고, 앞으로
도 유지될 영원한 학문과 과학 그리고 철학의 진
리이다. 그리고 “있음은 있다”,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2대 명제는 그
후 데모크리투스 등의 “다원론”, “원자론”을 만
들고 특히 플라톤의 “정신적-관념적 실재론” 철학을 산출시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한 바 플라톤이 그의 대저 <
국가>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데아 개
념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통해서 정립한
덕분이었다. 또한 그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설
이 무너지는 아이러니칼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를 실행한 자는 바로 플라톤의 수석 제자 '아리스
토텔레스'이다.
결론적으로 모두 헛되게 보이는 세계와 삶에 그
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간결한 존재론의 결론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부
패하고 생성, 소멸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즉 영원한 것 불편적인 것도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
혹은 그 후에 정립되는 법칙(law)개념, 정의(def
inition)개념, 원리(principle)개념 등이 그러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