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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새해에도 복되고 건강한 한해 되시옵길.. /梅谷堂 김 경숙 *일시: 12/20, 07시 35분 신갈출발 *날씨: 맑음 *산행지 ; 강원 홍천군/ 횡성군 (10:08) 화방재(450m) 도착 (10;10) 산행시작 (11;14) ▲덕구산(670m) (11;43) △헬기장 (11;45) △산불감시초소1 (11:46) 철책(군사보호구역) (12:20) △산불감시초소2(532m봉) (12;26) 갯고개 (12;48) 안부(일행들 점심식사) (12;52) △U자형 명품소나무봉(584m봉) (12;57) ▲응곡산(603.7m) ,삼각점(청일 315/ 1998 복구)-점심식사 (13;58) △뾰족봉 (14;16) 먹방골 임도 (14;55) ▲만대산(670m) (15;29) 암릉시작점 (15;36) 암릉 끝나는 지점 아름드리 참나무(겨우살이 군락지) (15;40) 직벽암릉오름길 (15;55) ▲741.1m봉, 삼각점(삼각점, 홍천 307/ 1088 재설) (16;06) 간벌지대 (16;53) 소삼마치(510m) (17;30) 어둔리 삼마치터널(중앙고속도로변)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저물고 있다. 해를 맞으며 무탈한 한해를 기원해 보지만 한해의 끝은 늘 기쁨 보다는 아픔의 흔적들로 눈시울을 적신다. 넓고 넓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 들이 삶을 함께 영위하고 있으니 그 삶이 오죽이나 다양할까. 눈만 뜨고 나면 방화사건 에 교통사고, 자살소식, 성범죄, 납치사건 등등 사건과 사고의 빈도, 잔악성은 날로 높아 만 가고.. 정부 물가대책 실효성 여부,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부실문제,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론, 가계부채 대책의 기대 효과와 한계점, 휘발유값 논쟁, 친서민금융정책의 허와 실, G20과 환율전쟁, 한.EU FTA 체결, 한.미 FTA 재협상, 일본 원전 사태와 원전 안전 문제, 일 교 과서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문제, 구제역 사태의 원인과 문제점, 무상급식 논쟁, 유럽의 한류열풍, 스마트TV 시대, ‘세시봉’현상, 아날로그 중년문화의 발견, 빈 껍데기뿐인 다문 화정책, 대중음악 표절논란, 디도스 피해와 방어 전략, 인공생명체의 탄생, 오사마 빈 라 덴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 리비아 사태 군사 개입의 정당성, 미국 신용등급 전망 조정의 의미, 이라크 종전선언, 그리스 구제금융과 유럽의 재정위기 전망 등등 그리고 최근 12월 17일을 기해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최신 이슈로 떠오르고,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로 집중되 는 가운데 2011년의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큰 소득은 없었으나 백두대간을 완주하였고, 온 가족이 건강하게 각자 자 신들의 앞날을 개척해 나감에 최선을 다한 한해로 보람과 기쁨도 컸으며 가족사에도 길이 남을 뜻깊은 해이다.
◈ 산행코스 : 화방고개(450m)--<2.1km>--덕구산(656m)--<2.7km>--갯고개- -<1.1km>--응곡산(603m)--<3.8km>--만대산분기점--<3.0km>- -소삼마치(510m)--<2Km>--어둔리 삼마치터널(중앙고속도로변) ◈ 산행거리 ; 기맥거리 12.7Km(도상거리)+접선거리 2Km=14.7Km (실거리 약 17Km/ 7시간) ◈ 난이도; 난이도▲▲▲△△.
강원도 홍천군 동면 노천리에 소재한 일명 장승재라고도 하는 화방재의 원래 이름은 새-목이[새매기, 조항(鳥項), 조현(鳥峴)]이다. 허뱅이 서북쪽에 있는 고갯마루로 새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주만에 다시 찾은 화방고개엔 눈이 와 산자락을 덮고 있다. 그렇잖아도 추운 날씨에 체감온도를 몇도 낮추는 듯하다. 다행스럽게도 햇 살이 퍼지고 바람이 없는 관계로 생각보다는 순한 기온을 보이면서..
도착시간 10;08, 지난번 어둠속에 화방재를 내렸었기에 표지석 사진이 없어 인증샷부터 한장 날려두고서..
지난번 임도사거리에서 2Km정도를 어둠속에 임도를 타고 내렸었기에 이번구간 다시 그 구간 능선길을 걷기로 하였었다. 이번 구간도 당일 산행구간으로서는 그리 만만한 구 간이 아니어서인지 선두는 벌써 소삼마치를 향하여 능선길을 내달리고 있다. 청명님께서 지난 진지리고개~화방재 능선을 다시 잇고 싶어 하셨으나 혼자여서 그대로 일행들 뒤를 쫓기로 하고서..
시작부터 숨가쁜 급경사와의 잠깐 힘겨루기가 있은 후, 능선에 올라 25분 경과된 시간 소나무 숲길에서..
진행방향에서 서쪽으로는 덕구산(670m)이 솟아있고, 좌측 낙엽송 숲 사이로는 동북방 향에 지난 구간 지나온 대학산이 이번구간 능선을 굽어보고 있다.
화방재에서 굴참나무가 서식하는 첫봉에 올라 낙엽송이 군락을 이룬 숲을 지나면서, 편안해진 등로를 동네 뒷동산 오른 듯한 기분으로 걷고있는데 오른쪽 아래로 444번 지 방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노천리마을 정경을 흘깃 내려다 보기도 하면서 화방재에서 30여분 진행한 후, 노천리와 좌운리를 잇는 작은 고갯길을 지나며 남쪽으로 향하던 기맥은 우측(서쪽)으로 꺾여 오른다.
한풀 꺾였던 고도가 다시 높여지기 시작한다. 지난 구간 때 된 고생을 좀 하였기에 이 만한 오르막쯤 아직은 만만하단 생각을 한다. 이 정도 등로라면 오늘 구간은 문제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오판이었단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일찌감치 하산할 생각에 느긋한 마음으 로 여유로움을 부려본다. 일행들은 이번 구간이 너무 쉬워 마라톤들을 하시는지 벌써부터 눈앞에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고도가 높아지고 있는데도 아직은 능선에 눈이 많지가 않다. 한번만 더 오르면 덕구산 에 오를 것 같았으나 몇번의 오르막을 단계적으로 치루고서야 결국엔 정상에 올라섰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온 걸 보면 아직은 등로가 양호한 편임을 알 수 있겠다. 덕구산 정상에서는 좌틀하여야 한다.
잠시 후 627m봉에 다시 오르게 되고, 이곳에서는 우틀하여 내리는데 장난이 아니다. 속에 는 얼은 땅에 낙엽이 쌓이고 그 위에 눈이 적당량 덮여있어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지기 일쑤 여서 스틱으로 발 디딜 자리를 치우고 내리기도 하면서..
참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능선 아래로 동면 노천리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잠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헬기장(625m)이다.
헬기장을 오르며..
헬기장을 오르며 억새풀숲에 쌓여있는 눈이 깨끗하여 한웅쿰 쥐고 올라 입에 대어보긴 하였는데 차마 입속에 넣지는 못하였다. 옛생각에 젖어 타는 입술을 적셔만 주었을 뿐, 옛날처럼 눈이며 고드름을 마음놓고 먹어도 될 수 있는 자연환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을 잠시 해본다.
꽤나 넓은 공터로 이루어진 625m봉인 헬기장을 지나며..(11;43)
헬기장에서 100m정도 진행하면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한겨울 비박하며 진행하시는 분들이시라면 이런 곳에서 하룻밤 묵어간다 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 이다. 멀리 오대산에서 구룡령으로 진행하는 대간줄기가 조망되는 곳이다.(11;45)
이어서 나타나는 철책이 제1 야전수송교육부대의 그것이다. 안으로는 임도가 나있는데 막혀 있어 철책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 눈이 쌓여 있어도 뭉치는 눈이 아니고 얼어있어 보슬보슬한 것이 그리 미끄럽지 않아 그대로 진행하여도 별 어려움이 없어 좋다. 한적한 길에 눈밟는 소리 청아하게 들려 좋다.
촬영을 금하라는 문귀가 철책에 부착되어 있으나 슬그머니 안을 기웃거려 보았는데, 군 벙 커가 임도 옆으로 보인다.
철책과 안녕을 고하면서 등로는 다시 부드러워져 잠깐씩 속력을 내보기도 하지만 그리 오 래가지는 못한다. 오래간만에 보이는 사스레나무의 껍질을 벗겨보기도 하면서 내리막길을 내려서..
오른쪽으로 산골마을 치고는 꽤 가구수가 있어보이는 큰 마을 좌운리 구석골을 조망하며 519m봉에 올랐다 내려서는 길은 좌틀하여 내려야 하는데, 내리막이 급경사여서 여간 조심 스럽지가 않다. 북쪽 노천리마을 건너 공작산이 조망된다.
군철책과 이별하고 30여분 진행하여 또 다른 산불감시초소(532m봉)에 도착하여.. (12;20)
누군가 나무토막을 깎아 천연사다리를 노송에 기대놓았기에 잠시 올라 보았다. 사람이 상주하는 듯 온기가 느껴져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어지는 곳이다.
532m봉이란 코팅지가 부착되어 있다.
더운 여름철이라면 나무그늘에 여유로운 쉼을 갖고 싶은 곳, 532m봉을 내려오며..
532m봉에서 마루금은 오른쪽으로 꺾여 마을로 내려서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능선을 따라 내리자면 그대로 마을로 내려서게 되고, 내려서는 중간에 좌측 고개로 떨어지는 길 흔적이 보인다. 산불감시초소에서 3-4분 거리이다.
개고개 [개치(蓋峙), 개현(蓋峴), 애고개]라고 하는 이곳은 자운 북쪽에서 노천리의 약바터로 가는 고개이다. 고개가 가파라서 넘는데 애를 먹인다는 이 작은 고개는, 고려 고종 때 추밀원부사 허구와 그의 아들 중찬홍이 개(蓋)를 받고 다녔다 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여기에서 '蓋'란 덮다, 뚜껑, 숭상하다, 합하다 등의 의미가 있으며 일산(日傘), 양산(陽傘). 수레에 세운 우산, 의장으로 쓰는 일산 등의 뜻을 품고 있는 물건을 뜻하는 듯 하다.
정리하여 보면 그 당시 몹시 험준하게 생각되었던 이 급경사의 고갯길을, 고종때 추밀 원부사 허구와 그의 아들 중찬홍이 무더위나 비를 피하기 위해 양산이나 우산을 받치고 이 고개를 넘어가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이곳을 지나며 MGD 생각으로는 고개같지 않은 고개이나 그래도 양쪽 마을을 연결해 주던 분명 고개였던 '개고개'에서, 개의 의미가 일부 명사 앞에 붙어 ‘보잘것 없는’의 뜻 을 더하는 말로 얼른 떠올렸었다. 보잘것 없는 고개가 아닌 '蓋'란 명사와 합하여 나름 대로의 유래가 있고 의미있는 고개의 이름을 지닌 지명이다.
갯고개 혹은 개고개라 표기한 사람들도 있고,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정확한 어원을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옳은 표현이다라고 규정지을 수 없겠으나, 우리말 표기법에서 사이 'ㅅ' 처리법에 미루어 '갯고개'라 표기함이 옳을 것 같다. 사이 'ㅅ'은 우리글 적기에서 참으로 처리 곤란한 문제중 하나이다. 그 처리에 관하 여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도대체 사이 'ㅅ'이란 무엇인지? 어떨 때 써야 하는지를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해야겠다. '개'와 '고개'란 낱말이 있다. 물론 이들은 각각 '개'와 '고개'와 같이 예사소리(평음) 로 발음 된다. 그런데 두 낱말이 합쳐서 새로운 낱말 즉 합성어를 이룰 때 뒷쪽 요소의 첫소리가 된소리(경음)로 바뀌는 일이 있다. 개꼬개 또한 마찬가지여서 '고'가 '꼬'로 발음이 된다. 이러한 발음상의 사실을 표기에 반응하여 'ㅅ'을 적는데 이것을 사이 'ㅅ' 이라 한다. 뒷쪽 요소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바뀐다고 해서 무조건 사이 'ㅅ'을 적는 것은 아니다. 앞쪽 요소가 닿소리로 끝나는, 다시 말해 앞 음절에 받침 소리가 있는 경우에는 'ㅅ'을 적지 않고, 홀소리로 끝난 경우 다시 말하여 앞 음절에 받침 소리가 없는 경우에만 'ㅅ' 을 앞 요소의 끝 받침으로 적는 것이다. 이런 표기법으로 미루어 이 고개의 이름은 '갯 고개'라 표기함이 옳을 듯 하다. 산친구산악회에서 부착한 '갯고개' 코팅지가 한층 돋보이는 고갯마루를 지나..
응곡산을 향해 오르는 길에 나무가 꺾이어 장애물이 된 곳을 지난 후..
능선에 올라서니 일행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응곡산 정상에나 가야 만나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만남에 반가운 마음 배가 되었던 순간이다. 식사가 거의 끝나가기에 합류하지 못하고 한발짝 먼저 올라 응곡산 정상에서 간단한 점심을 하기로 하고서..
응곡산 오르기 전 584m봉을 향해가는 능선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이다. 좌측으로는 태의산 (375m) 능선 아래로 좌운리 마을이, 우측(북쪽)으로는 속초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12;52, 584m봉에 올라.. U자형의 명품소나무가 서있는 곳이다. 자랄 때 한번 허리가 꺾여 밑으로 향하다 다시 위를 향해 자라난 듯 보이는, 우여곡절 끝에 아름다운 선을 내놓고 있는 기특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조선소나무로 보인다.
절 닮아 아픔도 어떤 고난과 역경도 둥글둥글 둥글려가며 살라 훈시를 하는 듯..ㅎㅎ
응곡산은 584m봉에서 5분 거리이다. 584m봉에서 좌틀하여 조금은 편안한 능선길을 걷다 다시 한번 급하게 경사를 치고 오르면 응곡산 정상이다. 오름길에 '山' 자가 새겨 진 시멘트 말뚝이 나오는데, 말뚝 머리에는 방위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삼각점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군사시설물인가?
응곡산(應谷山 603.7m) 정상에서 잠시 일행님들과..(13;05)
이 구간에서는 전 구간에서처럼 거리표지판이 보이지 않는다. 응곡산 정상에는 삼각점 (청일 315/ 1988 복구)이 있고, 지금 이곳까지의 거리는 7.3km 정도 된다. 여기까지 3시간 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아직은 꽤 빠른 속도로 진행을 하여 온 셈이다. 이런 속도라면 소 삼마치까지 이른 시간에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ㅎㅎ..
응곡산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나무꾼 목동들이 이산에 나무를 하러 오다가 골짜기에서 소리를 지르면 이 산에서도 같은 소리로 응한다 하여 응곡산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산세가 상여같은 형세를 하고 있다 하여 일명 行喪峰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산봉우리를 메아리봉이라 부르는 것은 어떨지?
응곡산 정상에서 김밥과 과일 두유로 간단한 점심식사를 끝내고..
570m봉 올랐다가 내리는 길이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다. 응곡산 정상까지는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하였더니 내리막길을 내리며 이번구간 쉽다는 생각 접기로 한다. 이 내리막길엔 어린 굴참나무가 서식하고 있어 의지할만한 든든한 나무기둥이 없기에 여간 힘이 들고 고역스러운게 아니다. 낙엽반 눈반 섞여 미끄러지기 일쑤인데다 경사면 엔 허물어지는 흙이 얼었다 햇살에 녹아내리면서 어린나무 가지조차 길에서 멀리 있기에 한발 한발 내려놓는 발걸음이 진땀을 내게 하였던 순간이다. 머리까지 지끈지끈 하여 오 던 경사면이다. CY께서는 어느덧에 사라져버리시고 경사도가 완만해지기 시작하는 곳엔 묘 1기가 있는 데,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묘지를 지나면서는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지고..
능선은 동남방향으로 꺾이는 듯 하다가 576m봉으로 다시 오르고..(13;46)
576m봉에서 좌측(동남쪽방향)의 조망을 배경으로..
수없이 오르고 내리는 길에 차츰 지쳐가기 시작, 아름드리 소나무에 잠시 기대어 기라도 받아볼까 쉼을 청해보는데..
이번구간 고도가 그리 높지 않아 만만하게 생각하였더니, 지쳐가는 터에 뾰족하게 솟아 오른 봉우리가 기진맥진하게 한다. 비껴가고 싶었지만 우회로는 없다. 숨가쁜 행진, 뾰족 봉을 지나며..(13;58)
오른쪽엔 만대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보이고..
이어지는 만대봉 능선.. 보기에도 암릉이 좀 있을 법한..
능선은 다소 기복이 완화된 듯하나 오르내림은 계속 이어진다.
편안한 능선길에서 만난 기형의 나무이다. 굵은 나무 하나가 어린 나무 2그루를 휘감고 자라는 모습이다.
난 나무들 이런 모습들 좋아한다. 지나는 길에 잠간씩이나마 기대볼 수 있으니..
오른쪽으로 살짝보였던 임도와 연결되는 먹방골 임도가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오르는 모습이 좌측으로 목격된다. 먹방골이 가까워진 듯 하니 힘을 내어보기로 한다.
응곡산에서 급경사길을 힘들게 내려 묘1기를 지나고, 또 다시 오르막길을 아주 힘들 여서 오른 후 작은 기복이 몇번 있고나면 드디어 먹방골 임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차 츰 진행속도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먹방골로 내리는 길에 북쪽으로 조망되는 공작산이다.
궁적산이라고도 부르는 공작산 마을 권역은 중심에 덕구산을 두고 공작산 아래로 수많은 고을을 두고 있는데, 옛날에 임금님도 살고 싶어하였다는 유래와 함께 맑은 물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이처럼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계곡과 기암괴석, 전래하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전통적인 농촌마을로서 그 유래 또한 갖가지 설화와 구전하는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다.
공작산 아래 동네인 궁지기(궁지기골)와 지왕동, 왕터등 왕과 관련된 지명들이 노 천리에는 아직도 남아있는데, 마의 태자가 인제 갑둔리에 자리잡기 전 노천리의 지왕 동을 거쳐 왕터에 머물다 갔다는 자료가 남아있기도 하다. 한편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마의태자)이 횡성을 거쳐 이곳 지왕동, 왕터에 머문 후 인제로 갔다는 이야기 도 전해진다.
한편 공작산 마을은 두개의 수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공작산과 물골 마을 에서 발원하고, 덕우마을의 물과 합쳐서 이루는 덕치천 수계는 흘러서 북한강 물줄기 를 이루고 있다, 또 하나는 노천2리의 가래골에서 발원하여 금계천을 형성하여 횡성 천을 이루고, 이 물줄기가 흘러서 남한강의 수계를 이루는 기이한 곳으로 어찌보면 한 마을에 두개의 수계를 형성하는 발원지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청정의 맑은 물에 사는 어종 또한 확연히 구분되는 학술적 가치를 보유한 자연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공작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한강기맥 주릉선(2009. 8월)-1
공작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한강기맥 주릉선(2009. 8월)-2
공작산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기맥 주릉선(2009.8월)-1
공작산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기맥 주릉선(2009.8월)-2
급경사 절개지를 내려 임도에 도착한 시간 14;16이다.
임도는 한강기맥을 끊고 홍천군 속초리 먹방마을과 횡성군 동면 좌운리 회수대 마을을 잇고 있다.
만대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들머리엔 자연휴식년제 안내간판이 서있는데, 이미 10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만대산 휴식년제의 역사현장으로나 남아있을 안내간판이다. 현재와는 관련이 없는 안내판이 서있다.
먹방골 임도에서 마루금에 올라 조망되는 만대산 능선..
먹방골 임도에서 5분 걸려서 첫번째 봉우리에 오르고..(14;23)
4분후 또 하나의 봉우리를 지나며..(14;27)
20분 후, 먹방골임도에서 30분 걸려서 만대산 정상에 올라..(14;46)
힘들었던 종주자들의 기억이 표지기 숫자가 대신하고 있다. 자신이 다녀갔다는 흔적도 남기고 싶었겠지만, 누군가 또다른 후답자를 위하여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다른 어느 집단에서 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정상의 모습이다. 멀리 오음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 작한다.
오른쪽 아래로 계문리마을과 후동리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정상에서 분기되는 690m봉 뒤로 묵방산이 이어져 보이고, 그 아래로 계문저수지도 조망된다.
먹방골에서 오음산까지는 끝임없이 오르내림이 이어져가며 종주자들의 진을 다 뻬어 놓는 구간이라 할 수 있을만큼 힘든 구간이다. 먹방골에서 30여분의 가파른 오름길을 극복하고 나면 묵방산 갈림봉이기도한 만대산 정상에 오르게 된다. 만대산(萬垈山, 670m)은 옛날 이 마을 설립시에 이산 중턱에 만사람의 집터가 있다하 여 불리우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만대봉정상에서 좌틀하여 20여분간은 비교적 편안한 능선길을 가게 된다. 고도가 높아 져 있는만큼 눈의 깊이가 더하다. 만대산을 배경으로..
묵방산 능선 아래로 계문저수지가 가까이 보인다.
오래간만에 정상을 치지 않고 우회하는 길도 있어 모처럼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을 하기도 하면서..
무명봉을 우회하여 잠시 편한길을 걷는다 하였더니 다시 길게 올라쳐서,
몇번 더 오르내림이 이어져 간다.
뒤돌아보는 능선 저 뒤로 묵방산갈림길인 만대산이 보이고 그 이후로 작은 봉우리 몇개 가 오르내리며 따라 붙는다.
만대산 정상에서 1시간 15분 진행하여 바위 사이에 강인한 삶을 펼치고 있는 암릉길을 올라..(15;29)
암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소나무가 뿌리내린 바위지대를 넘어오자 또다른 큰바위가 등로을 막아서고 있다. 좌측 으로 우회로가 있어 굳이 이곳에서는 바위를 넘지 않아도 된다.
좌측은 벼랑길이어서 조심스럽게 암릉을 우회하여..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곳에도 암반이 섞여있어 거친 길을 내려야 한다.
아슬아슬한 바위내림길을 내려오다 모처럼만에 편해 보이는 바위 위에 잠시 쉼을 청해 보았다. 몇시간만에 엉덩이를 땅에 붙여보는지? 일어서고 싶지 않으나 자리를 다시 박차 고 일어나..
암릉지대는 계속 이어지고 속력은 자꾸 줄어든다.
바위지대를 이어오다 겨우살이 군락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오래된 참나무가 편한 가지를 뻗고 있기에..
이 구간이 겨우살이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높은 가지 위에 몇포 기 밖에 띄질 않는다. 양쪽으로 임도가 나있기에 겨우살이 채취하기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줄은 알지만 워낙 발걸음 느린 MGD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ㅎㅎ 741.1m봉 능선으로 앞서가는 일행들의 모습이 햇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열지어 가는 모습이 보이면서 모처럼만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0월부터 12월 사이에 겨우살이 씨앗을 새가 물어다 나무 위에 번식을 시킨다는 이야길 들었다. 겨우살이 발아하는 모습..
잠시 편안한 길을 걷게 되는가 했더니 곧바로 새로운 장벽이 막아선다. 우회로가 있는 듯 보이나 바위를 올려다보니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치고 올라보기로 한다.(15;40)
발디딜 자리가 없어 끝판에 잠시 용을 좀 써보긴 하였지만, 생각보다는 쉽게 암벽에 올라서서..
바위지대 난이도▲▲▲▲△.. 이어지는 칼바위가 날을 세우다!
이어지는 칼바위 능선을 지나며..
바위 위에 올라서자 시야가 트이면서 지나온 봉우리들이 조망된다, 큰바위(직벽오름) 암릉 위에서 바라본 춘천지맥 능선이다.(2009.8월)
잠시 편안하게 내린다 하였더니 또 다시 암릉을 오르게 되고..
바위지대를 지나면서 높은 참나무에 겨우살이가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쉬운 마음 을 돌려야 했는데, 우측으로는 멀리 공작산도 조망이 된다. 바위지대를 따라 힘들게 진행 하다 보면 넓은 공터로 이루어진 741.1m봉에 도착한다.
삼각점, 홍천 307/ 1088 재설..
어렵게 올라선 741.1m봉에서..(15;56)
741.1m봉에서 바라본 오음산.. 오음산 아래로는 중앙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고 자동차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설마 저 고속도로까지 가겠는가 하지만, 그 길까지 내려가야 오늘 산행은 끝이날 일이다. 아직도 갈길은 멀어만 보인다.ㅠㅠ..
741.1m봉에서 5-6분 진행하여 만나게 되는 급경사 내리막길이 장난이 아니다. 옆에 있는 잡목들에 겨우겨우 매달려서 내리다가, 얼어있는 낙엽길에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서 체중을 감당 못하고 나뭇가지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엎어진 채 한참을 미끄러져 내 려야만 했는데, 멈추려해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한참을 미끄러져 내리다 겨우 발 밑 에 있는 나무에 걸려서 멈추게 되었다. 한쪽 다리는 완전히 낙엽과 눈속에 묻혀버리고..
푹푹 빠져서 한발짝 내리려고 손을 떼면 쭈루루 미끄러져 나뭇가지를 붙잡지 않으면 멈출 수가 없고, 잡을 것이 없는 곳에는 스틱에다 하도 힘을 주었더니 김장 때 무우 채 썬 것 보다 더 팔에 무리가 가져 이튿날 뻐끈하였던 내 팔과 어깨..ㅎㅎ 10여분간 미끄러운 내리막길과 씨름 끝에 내려선 곳, 간벌지대이다. 좌측으로는 간벌 하기 위하여 포크레인이 오르내렸는지 산자락마다 빙빙 돌아오르는 길이 나있다.
묵방산갈림길인 만대산삼거리에서 소삼마치까지의 1.7km는 거의 내리막길이다. 741.1m봉에서 어렵게 급경사길을 내려서 간벌지를 지나고, 잠시 다리가 휴식기에 들었다가 다시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지나며 고도를 낮춰오다 마지막에 또다시 바위지대를 넘어가야 하는가 했는데, 마지막 큰 바위지대는 넘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소삼마치까지는 절벽으로 이어지는 듯하고, 좌측으로 우회로가 나있다. 바위지대을 우회하여 아래로 내려오면 지금은 왕래가 없어 폐허가 된 임도가 있는 소삼마치에 내려서게 된다. 바위를 우회하여 내려오는 급경사길에서 미끄 러지지 않으려 안갖힘을 썼더니 무릎이 얼마나 저리고 아프던지, 고꾸러질 듯 겨우 내려서서.. 잠시 정신을 차리기까지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소삼마치(小三馬峙)는 약 230여년 전 어떤 장사꾼이 말 세필을 가지고 이곳을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삼마치는 월운에서 횡성군 공근면 어둔리로 가는 고개로 홍천 읍 큰삼마치 동쪽에 위치하여 작은 삼마치라 부른다.
삼각점봉(741.1m봉)을 뒤로 하고, 오른쪽으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안부를 가로질러 올라서면서 또다시 바위지대가 이어진다. 울창한 참나무 숲을 지나면서 중앙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소음이 점점 커져오고, 그렇게 바위지대를 지나다보면 절벽 위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아래가 소삼마치이다. 절벽을 좌측으로 돌아 급경사지대를 내리면 억새와 칡넝쿨, 특히 복분자 가시넝쿨이 눈에 띄게 많은 임도에 닿게 되는데 이곳이 소삼마치 (小三馬峙)이다.
만대산에서부터 소삼마치까지 1.7Km를 내려오는 고도표이다.
1.7km를 내려오는데 1시간 55분이 걸렸다. 산행 시작하고 초반에 비하여 너무 긴 시간 이 소요되었다. 계속 이어지는 암릉에 오르고 내림이 잦아 생각보다는 체력소모량도 많 았던 구간이며, 마지막 741.1m봉 내리막길과 소삼마치로 내리는 급경사에서 토질은 마 사토처럼 끈기가 없어 밟으면 으스러지듯 흘러내려 아주 고역을 치루었던 장소이기에 오랜 시간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소삼마치에서 기맥길은 표석 뒤로 가파르게 이어져 오른다. 이어 557m봉에 오르게 되고, 660m봉 오름길이 가파르게 길게 이어지기에 다음 구간에서의 한바탕 곤욕을 치 룰 일이 예상되면서,
그 후에 오르게 되는 오음산(五音山)은 다섯장수가 나면 재앙을 입는다는 말이 전해 지면서 마을 사람들이 장수가 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산등성이에 구리를 녹여붓고 쇠창을 꽂았다고 한다. 그러자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오르면서 다섯 가지의 울음소리가 사흘 밤낮을 두고 났다고 한다. 그후 주인없는 백마 세마리가 고개를 넘어 어디론지 사라졌다 하여 산은 오음산(五音山), 그 아래 고개는 삼마치(三馬峙) 라는 전설을 간직 하고 있다. 오음산의 유래를 떠올리며 오래전부터 궁금하였던 오음산에 다시 가보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구간 산행을 기대해야겠다.
지난 구간에 비하면 난이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쉬울 것이란 기대감으로 산행에 임했기 때문이었을까, 지난번 보다는 거리도 짧고 급경사 내리막길이 빈번하지도 않 았는데 체력은 고갈되고,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린 편이다. MGD 걸음으로 소삼마 치까지 7시간 소요되었다. 소삼마치에서 중앙고속도로까지 내려서는 길도 쉬운 길은 아니어서 1시간 남짓 걸려야 했다. 통행인이 잦지 않은 소삼마치 임도에는 칡넝쿨이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눈에 많이 띄지 않던 복분자 넝쿨이 여기저기 번식을 하고 있 어 CY님께서 앞서가시면서 연방 가위질을 해주셨지만, 가끔씩 찔려오는 가시넝쿨 에 아픔을 호소하기도 하면서,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어둔리 삼마치터널 앞 중앙고속도로변에 무사히 닿을 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이번에도 한암님의 마중을 받으면서 산악회 차까지 도착 하게 되었다. 위로의 말과 함께 따뜻한 마중길 나와주셔서 감사드리면서, 함께 하여주신 일행님들 께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사진;가을바람님/응곡산 정상에서..)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모두 뜻깊은 저녁 맞이하고 계시겠지요? 좋은 밤 되 시고 주말과 함께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라면서, 다가오는 임 진년 새해도 복되고 건강한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차안에서 깝숑님과 이야기 하였던 '령' '현' '치'에 대한 이야기를 추신으로 언급하 고 넘어 가야겠네요. 약속은 약속이니까..ㅎㅎ 고개를 이르는 명칭에는 '령'과 '재' 말고도 '현', '치' 등이 있다. 1. 령(嶺) : 교통량이 많은 높은 고개의 양측 산기슭에 취락이 발달하여 교통, 생산, 방어의 세가지 기능을 하였다. 2. 현(峴) : 도(道)나 군(君)등 행정구역의 경계지대 또는 험난한 곳에 있다. 이런 곳은 긴관지(緊關地)로서의 중요성과 원우(院宇)나 봉화 등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3. 재 : 원래 위(上)의 뜻으로 지형을 나타낼 때는 산꼭대기나 등성마루의 뜻으로 사용되던 것이 고개의 뜻으로 변한 것으로, 순우리말로서 한재(韓峴), 갈재(葛峙), 새재(鳥嶺) 등에서처럼 한자어의 고개 지명에 두루 쓰인다. 고개를 나타내는 지명은 한자어로 령(嶺), 현(峴), 치(峙) 천(遷) 등이 있고 우리말 은 재, 고개 등이 있는데, 이들 용어의 뚜렷한 사용 기준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각 용어들이 혼재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많다. 이유는 지명의 부침이 강했던 이유 와 역사의 격변이 잦았던 이유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들 중 '재'는 한자로 岾라는 우리나라 고유한자(중국이나 일본엔 없는)로 표기 되 기도 한다. 또한 고개는 한자로 古介로 표기 되기도 하는데, 이북 특히 함경도나 평안 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이 지방의 사투리로서 후대에 표준말로 정착이 된 듯하 다. 천(遷)은 산에 있는 길중에서도 아주 좁은 길로서, 특히 벼랑 부근에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건너기에는 다소 험한 고갯길에 해당하는 것 같다.(예 : 문경시의 관갑천) 과거 우리의 고개 지명에서 현지 주민에 의해 사용되던 우리말 지명은 대부분 재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측되는데, 그 예로는 태백시의 싸리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개명이 한자 지명으로 바뀌면서 령(嶺), 현(峴), 치(峙)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엄밀한 기준에 의해 고개를 구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고개의 지형적 규모나 형세, 특성 등에 의해 각각을 령, 현, 치로 구분하는 것은 당시의 지형학 수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며, 만약 산이나 고개,하천 등을 엄밀한 기준에 의해 구분했다면 우리의 전통 지형학 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 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동양, 그리고 우리나라에 자연지형을 범주화할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이 없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동양 학문의 한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 만약 특정 기준에 입각하여 이를 분류하려는 학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전국 지형의 부단한 답사와 조사가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일이고, 설령 이 작업이 가능하다 하더 라도 후대에 강한 역사적 부침을 겪었던 지명이 온전하게 남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추측되면서, 다만 그래도 고개에 대한 대략적인 기준이라도 마련해 보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추측은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이다. '령'은 규모나 통행량의 면에서 큰 지역을 나타내며, 지역간 통행의 중요한 통로를 형성하고 일찍부터 군사 요지로 주목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백 두대간 상의 큰 고개는 '령(嶺)'이라는 지명이 우세하기 때문이다(예 : 대관령, 조령, 죽령, 추풍령). '현'은 '령'보다는 한 단계 아래의 고개를 나타내는데, 규모나 유통량에서 령보다는 낮은 급이며 지방 중소 산지의 고갯길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측이 된다. '치'는 고개가 통과하는 산지가 다소 험준한 느낌을 주는 곳이며, 이는 꼭 산지가 높 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즈막한 산이면서도 우뚝 솟은 듯한 산을 경유하는 경우 '치'의 지명이 붙여질 가능성이 있다(예 : 지리산의 정령치, 소백산의 마당치, 미내치, 그리고 삼마치, 소삼마치 등등..). 재와 고개는 우리말 지명으로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재와 고개 중 재가 시기적 으로 다소 앞서 사용된 듯하고, 고개는 그 이후에 표준어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추측이 된다. 깝숑님 궁금증이 좀 풀리셨나요? 열심히 공부하여 대략 이렇게 정리하여 보았습네다. 우리가 차안에서 짐작으로 이야기했던 그 생각이 맞을 것 같아요. 이해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시길 바라면서, 멋진 마무리 하는 연말 되시옵길..^^ (1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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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눈 덮인 겨울산이 포근해보입니다. 행복한 성탄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