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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사
후기 로마 시대(450~527)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5세기의 4분의 3은 혼란의 시기였다. 그 기간동안 서로마에서는 열 명의 통치자가 황제 자리에 올랐고 마지막으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476년에 폐위되었다. 그는 서로마 최후의 황제였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남은 로마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동로마에서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뒤를 이어 아스파르 장군의 부관이었던 퇴역 장교 마르키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풀케리아는 그 승계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였으나 새로이 순결 서약을 하고 명목상의 아내로만 남았다.
마르키아누스는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풀케리아의 정적인 환관 크리사푸스를 처형했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2세 때부터 시작된 훈족 왕 아틸라에게 조공을 바치던 관행을 중단시켰다. 그리하여 국민들에게 과중하게 물려온 세금을 줄일 수 있었고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듬해인 451년 10월 마르키아누스는 제4차 공의회를 개최했는데 장소는 칼케돈의 성 에우페미아 교회였다. 성녀 에우페미아는 콘스탄티노플 최초의 성인으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기를 거부하다가 303년 키네기온에서 순교했다. 공의회에서는 예수가 신성과 인성 두 가지를 모두 지녔다는 주장을 정통 교리로 채택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칼케돈 신조’이다. 이 교리에 반대하는 이들은 단성론자들로 예수는 오로지 신성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풀케리아는 453년 7월에 세상을 떠나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그녀의 죽음으로 그녀의 할아버지 테오도시우스 대제로 시작된 왕조는 막을 내렸다. 풀케리아는 그리스정교회에서 성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7월 11일과 9월 10일이 그녀의 축일이다. 마르키아누스는 풀케리아보다 4년을 더 산 뒤 457년 1월 27일 예순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7년 동안 제국을 다스렸는데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3세기 지난 후 그 시절을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평화롭고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졌던 황금기로 평가했다.
마르키아누스에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은 아스파르 장군의 부관으로 있던 다키아족 출신 장교 레오였다. 457년 2월 7일 헤브도몬에서 아나톨리쿠스 총대주교가 레오의 머리에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기는 처음으로 이후 이것은 관행으로 굳어졌다.
레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도 첫 6~7년간은 아스파르 장군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그 기간 동안 게르만 족과 기타 외국 용병들이 계속해서 황실 군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레오는 아스파르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시 타라시코디사의 통치 아래 있던 토로스 산맥(터키 남쪽 지중해 연안을 동서로 뻗은 산맥)의 이사우리아족 병사들을 뽑았다. 그는 이사우리아족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황실 군대의 새 분견대 ‘엑스쿠비토레스’를 조직하고 이름을 제노로 바꾼 타라시코디사에게 지휘를 맡겼다. 466년경 제노는 레오와 베리나의 맏딸 아리아드네 공주와 결혼했다. 레오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결혼으로 제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결혼 5년 후 제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사우리아족 병사들이 일으킨 폭동을 진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 아르다부리우스를 죽여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하게 되었다.
레오 황제는 474년 1월 30일 74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여 성사도교회에 묻혔다. 그는 종종 레오 대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위대해서가 아니라 손자이며 후계자였던 ‘리틀 레오’로 알려진 레오 2세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제노와 아리아드네의 아들 레오 2세는 일곱 살의 나이로 할아버지 레오 1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리틀 레오’는 등극 며칠 만에 원로원의 권고에 따라 아버지 제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레오는 히포드롬에서 제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는데 대관식이 헤브도몬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긴 처음이었다. 레오는 아홉 달 후 갑자기 세상을 떴고 라틴 역사 자료에 의하면 아버지 제노가 죽였다는 추측도 있었다.
제노는 단독 황제가 되자 바로 반달족 가이세리크 왕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그 효력은 6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순조로운 시작에도 불구하고 제노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적들에 둘러싸인 고립된 존재임을 깨달았다. 장모인 베리나 여제가 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짜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 10년 동안 베리나는 세 차례나 쿠데타를 시도했고 결국 이사우리아의 요새로 도피했다가 그곳에서 484년에 숨을 거뒀다.
제노는 491년 4월 9일 간질 발작으로 세상을 하직했으며 며칠 후 성사도 교회에 안장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제노는 산 채로 매장되었으며 사흘 동안 “나 좀 살려주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두들 그를 증오했기에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달리기가 매우 빨랐다는 점 외엔 그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았으며 한 문헌에는 그가 “악이란 악은 모두 지녔다.”고 나와 있고 다른 문헌에는 그가 천하의 겁쟁이여서 전쟁 그림조차 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레오 그람마티쿠스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텁수룩한 머리에 추한 모습이 마치 염소 발에 털북숭이 다리, 검은 피부, 난쟁이만한 키를 지녔다는 그리스의 신 판(목동의 신)을 보는 것 같았다.”
제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인물은 궁정 의전관을 지낸 60살의 아나스타시우스였다. 그는 황후 아리아드네의 추천을 받았는데 그 놀라운 선택에 대해 황후는 그가 “모든 미덕을 갖추었으며 인간으로서 더할 수 없이 완벽했다.”고 정당화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4월 11일 황제로 등극했고 6주 후 아리아드네와 결혼했다.
아나스타시우스 즉위 2년 후 불가르족(불가리아 민족)이 침입했는데 불가르족은 트라키아에서 황실 군대를 물리쳤고 뒤이은 10년 동안 두 번이나 더 쳐들어왔다. 불가르족의 침공으로 트라키아는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황폐해졌고 콘스탄티노플로의 식량 공급이 끊긴 것은 물론 수도 시설까지 파괴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침략자들이 콘스탄티노플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트라키아에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장성(長城)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60킬로미터 벗어난 지점에 위치했으며 마르마라 해부터 흑해까지 70킬로미터 정도를 뻗어 나갔다. 이 장성은 병력이 제대로 배치되어 있는 동안은 여러 차례 침략자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하는 것을 막아내어 효과적인 바깥 방어벽 역할을 해냈다.
아나스타시우스가 발칸 전선의 안전을 확보하자마자 동쪽에서 전쟁이 터졌다. 페르시아군이 오랜 평화를 깨고 502년 8월에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이다. 황실 군대는 결국 그 침략을 저지했고 505년 아나스타시우스는 페르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그 협정은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평화 유지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여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폭동이 빈번히 일어났다. 501년 이교 축제일인 브리타이를 맞아 히포드롬에서 춤과 노래의 향연이 펼쳐지던 중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청색당과 녹색당 사이에 싸움이 붙어 몇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사망자 중에는 황제의 사생아 아들도 있었다. 분노한 아나스타시우스는 브리타이 축제를 영원히 금했고 이에 대해 연대기 작가들은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아름다운 춤을 박탈했다.”고 한탄했다.
12년 후 고트족 장군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5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해 왔다. 2년 동안 소규모 접전들과 협상이 이어졌고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동안 도시의 방어를 강화하고 황실 함대를 재정비했다. 한편 비탈리아누스도 자신의 함대를 준비하여 515년 가을 보스포루스로 함대를 보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황실 해군의 지휘를 동로마 근위대장 마리누스에게 맡겼고 보스포루스와 골든혼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연대기 작가 존 말랄라스에 의하면 이 승리는 석유 원료 혼합물인 액체화약을 이용하여 반란군의 배들을 화염에 휩싸이게 만든 결과였으며 후에 비잔틴 군이 아랍이나 기타 침략군들에 대항할 때 가공할 만한 효력을 발한 지독한 ‘그리스의 불’의 첫 사용으로 추정된다
아리아드네는 515년에 사망하여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녀보다 3년을 더 살고 518년 7월 8일 비잔틴 황제들 중에서 가장 많은 나이인 88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존 말랄라스는 아나스타시우스가 무시무시한 뇌우 중 경기를 일으켜 죽었다고 기록했지만 그 이후의 자료들에 따르면 황제가 벼락을 맞았으며 단성론을 믿어서 하느님의 진노를 산 결과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두 가지 눈동자를 가진 자’란 뜻의 디오코로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두 눈동자의 색깔이 달랐다. 존 말랄라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생김새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거구에 머리카락이 짧고 태도가 정중했으며 얼굴이 둥글었다. 머리카락과 턱수염은 백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눈동자는 연푸른색이었고 왼쪽 눈동자는 검은색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는 턱수염을 자주 깎았다.”
아나스타시우스는 후사가 없고 조카인 프로부스, 폼페이우스, 히파티우스만 있었다. 그러나 군은 그들을 거부하고 당시 66살이었던 유스티누스 장군을 황제로 추대했다. 유스티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칸디다티라고 알려진 황실 근위대의 젊은 장교였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의 기민함의 공이 컸다. 원래 유스티니아누스가 먼저 후보자로 선출되었지만 그는 유스티누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유스티누스는 마케도니아의 지금의 스코페 근처에서 일리리아 지방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 그곳에서 돼지를 키웠다. 그는 레오 1세와 아나스타시우스 황제 시대에 이사우리아전과 페르시아전에 참전했으며 비록 문맹자였지만 근위대 사령관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내 루파키나는 원래 포로였는데 그가 첩을 삼기 위해 샀다가 나중에 결혼하게 된 것이며 여제 자리에 오른 뒤 이름을 에우페미아로 바꿨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의 언니의 아들로 그녀와 유스티누스가 양자로 삼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나이가 차자 황실 근위대에 입대했고 유스티누스가 등극하자마자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막후 실력자가 되었고 525년에 카이사르의 칭호를 받으면서 공식 후계자가 되고 2년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스티누스 황제의 재위 기간에는 종교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대체로 평화로웠다. 이 시기쯤엔 로마 제국의 성격이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움에 수도를 정했을 당시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서로마는 야만족들에게 짓밟히고 남은 영토는 주로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지역이었으며 주민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고 수도에서는 그리스어가 주요 언어였다. 6세기 중반까지 궁정에서는 라틴어가 공식 언어로 쓰이기 했지만 로마 제국은 점점 그리스적이고 기독교적인 성격을 더해갔고 아테네와 로마의 전통으로부터 단절되어 갔다. 역사가들은 6세기 전반을 로마 제국 역사의 분수령으로 보고 그 이후를 로마보다는 비잔틴 제국으로 칭하고 있다. 그로부터 9세기가 지난 비잔틴 제국의 황혼기에 총대주교 겐나디우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리스 언어를 사용하지만 내가 그리인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리스인들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신앙에서 정체성을 찾고 싶으며 내가 누군지 묻는다면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테살리아에 살았지만 나는 자신을 테살리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비잔티움에 살기에 비잔티움인이라고 부른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527~565)
유스티누스 황제는 527년 초 중병에 걸리자 유스티니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27년 4월 4일 대궁전 안의 교회에서 3년 전에 결혼한 아내 테오도라와 함께 부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그리고 유스티누스가 같은 해 8월 1일에 세상을 뜨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 테오도라는 여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에 대한 자료는 주로 카이사레아 출신의 피로코피우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527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젊은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참모로 임명되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페르시아전, 아프리카전, 이탈리아전에서 벨리사리우스를 수행했으며 542년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고 그로부터 20년 후 콘스탄티노플 총독으로 뽑혔다.
그러나 프로코피우스는 한편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에 대한 악의에 차고 야비하고 군데군데 도저히 믿기 어려운 공격을 담은 <숨겨진 역사(아네크도타)>라는 책을 은밀히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로마 제국의 모든 잘못된 점을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의 탓으로 돌렸으며 다른 두 책에서 남발한 황제에 대한 찬양과 모순되는 내용이 많았다. 프로코피우스는 <숨겨진 역사>에서 벨리사리우스와 그의 악명 높은 아내 안토니나에 대해서도 썼다. <숨겨진 역사>에 따르면 테오도라와 안토니나는 둘 다 천한 태생이었다. 테오도라는 히포드롬의 곰 사육사의 딸이었고 안토니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마부였다. 그리고 두 여자는 고급매춘부로 결혼 전까지 타락한 삶을 살았다. 테오도라는 결혼 후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안토니나는 죽을 때까지 방탕하게 살았다.
제국의 동부 전선은 유스티누스 황제 재위 기간 내내 조용했지만 그가 죽던 해에 페르시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위와 함께 이 싸움에 대한 책임을 물려받았으며 이후 긴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동부와 서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들에 신경 써야 했다. 1차 페르시아 전쟁(527~532)에서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530년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듬해 참패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고 말았다. 그가 아직 콘스탄티노플에 머무르고 있던 532년 초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 위기는 532년 1월 10일 히포드롬에서의 폭동으로 시작되었다. 사흘 후 폭동의 불길은 더욱 거세져서 청색당과 녹색당 관중들이 히포드롬을 나서 대궁전으로 향했다. 그들은 승리를 뜻하는 “니카!”를 외쳤으며 이 구호는 폭동의 이름이 되었다. 1월 18일 일요일 폭도들은 히파티우스(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를 히포드롬의 특별관람석 카티스마로 데려가 황금 목걸이를 걸어주고 황제로 추대했다.
한편 궁전의 유스티니아누스와 신하들은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일단 프로폰티스(소아시아의 북서부)의 헤라클레아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힘을 규합하여 도시를 되찾을 것을 권유했지만 테오도라가 감동적인 연설로 이곳에 남아 옥좌를 지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야만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폭도들을 히포드롬에 몰아넣었는데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그곳에서 3만 명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히파티우스와 그의 동생 폼페이우스는 처형당해 바다에 시체가 던져졌으며 폭도들의 시신은 히포드롬의 공동묘지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니카 폭동으로 첫 번째 언덕의 궁전 지구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으며 하기아 소피아와 하기아 이레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동 진압 40일 후인 532년 2월 23일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테오도시우스 교회의 폐허 위에 새로 하기아 소피아를 세우기 시작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황제는 비용 문제는 개의치 않고 전 세계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축조 작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수석 건축가는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로 당대 최고의 수리물리학자였으며 아테네에서 플라톤 학파의 수장을 지낸 저명한 수학자인 밀레투스(소아시아 서안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 출신의 이시도루스가 그를 도왔다. 교회는 6년 만에 완공되었고 537년 12월 26일 메나스 총대주교가 교회를 다시 성 ‘지혜(소피아)’에 바쳤다. 테오도라도 유스티니아누스와 함께 교회 설립에 참여했으며 본당과 회랑들의 기둥들에 그녀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532년에서 537년까지 유스티니아누스는 니카 폭동으로 파괴된 구교회 자리에 하기아 이레네(성 평화)에 바칠 새 교회도 지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하기아 이레네는 하기아 소피아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가 함께 불타 없어졌으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더 크게 새로 지어 하기아 소피아를 제외하면 비잔티움의 어느 교회와 견주어도 규모에 있어서 뒤지지 않았다.”
프로코피우스는 542년에 시작되어 먼저 이집트를 강타하고 이듬해 콘스탄티노플에까지 퍼진 끔찍한 선(腺) 페스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현대의 한 역사가는 이 질병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30만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50만 명 정도였다.
프로코피우스는 2차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계속해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재정복에 대해 기술했다. 533년 여름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반달족에게서 아프리카를 재탈환하기 위해 원정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늘 그랬듯이 그의 아내 안토니나가 동행했으며 그녀는 젊은 연인 테오도시우스를 데려갔다.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에서 16킬로미터쯤 벗어난 지점에서 반달족 왕 겔리메르를 무찌르고 533년 9월 15일 카르타고를 손에 넣었다. 이듬해 유스티니아누스의 소환을 받은 그는 겔리메르를 포함한 3,000명의 반달족 포로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그는 히포드롬에서 겔리메르를 비롯한 포로들을 거느리고 행진을 하며 승전 기념식을 가졌다.
2년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동고트족에게 함락된 이탈리아를 되찾기 위해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했고 이번에도 안토니나는 남편을 따라갔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자신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좌절한 그는 548년 봄 안토니나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테오도라에게 사정을 호소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긴 여행은 허사가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에 대해 설명하면서 프로코피우스가 쓴 그대로 인용하면 “이 시기쯤 벨리사리우스의 아내 안토니나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비잔티움으로 떠났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이미 병에 걸려 황후의 자리에 오른 지 21년하고도 석 달만에 세상을 하직한 뒤였다.” 그리하여 안토니나는 상중(喪中)인 도시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그녀를 맞이할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벨리사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도록 손을 썼는데 어차피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남편이 실패의 책임을 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종교적 통합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국 내에 남아있는 이교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만한 조치는 529년에 이교 철학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한 것이었다. 아카데미의 폐쇄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에 고전 문화의 마지막 르네상스가 찾아왔는데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들이 야만인에게 짓밟힌 뒤라 그 장소는 콘스탄티노플이 되었다. 그것은 이교적이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긴 했지만 그리스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었고 사실 콘스탄티노플에서 라틴어는 거의 행정과 법 용어로밖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의 위인으로는 역사가 프로코피우스, 법률가 트리보니아누스, 과학자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 시인 아가티아스 스콜라스티쿠스와 파울루스 실렌티아리우스가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가 죽은 후 딴사람이 되어 측근들로부터 멀어지고 국사를 소홀히 했으며 결정들을 미루고 신학의 심오한 문제들에만 매달렸다. 그의 황제로서의 원대한 꿈은 이미 실현된 상태로 그의 제국은 이제 페르시아 국경에서부터 소아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까지 뻗어 나갔으며 스페인의 남서 해안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서도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다. 프로코피우스는 <건축물들>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광대한 영토의 변경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수백 개의 요새들을 열거하면서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제국의 도시들에 지은 교회들과 건축물들에 들어간 어마어마한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로마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치른 전쟁들의 천문학적인 비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 결과 유스티니아누스 재위 말기에 이르자 제국은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국고가 텅 비어 아나스타시우스 장성(長城)의 보수 작업조차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틈을 노려 자베르간 장군이 이끄는 코트리구르 훈족이 트라키아를 침공하였으며 559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황실 군대가 모두 변방에 배치된 형편이라 유스티니아누스는 애매한 은퇴 상태에 있던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다시 부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주민 중에서 병력을 최대한 모으고 300명의 이탈리아전 참전 용사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게 한 뒤 그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그의 작지만 강한 군대는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야만인들을 물리쳤다. 코트리구르 훈족은 도망쳤고 이후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리를 거둔 뒤에도 벨리사리우스는 쉴 수가 없었고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후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563년 7월 유스티니아누스가 주위의 권고로 무죄 방면할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에서 살아야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보다 겨우 몇 개월 앞서 565년 3월 콘스탄티노플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아내 안토니나는 그보다 몇 년을 더 살았는데 벨리사리우스가 죽자 국가에서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어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벨리사리우스의 비참한 종말을 거짓 전설을 낳았고 그 전설은 후세에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는데 내용인즉 그가 말년을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서 장님 거지로 살았으며 그에게 동전을 던져준 행인들은 그가 과거에 세 대륙에서 승승장구했고 히포드롬에서 개선 행진까지 벌였던 위대한 장군이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는 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상태에서 막을 내리고 있었고 553년에서 557년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강타한 일련의 지진들이 임박한 종말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 지진들로 구조가 약해진 하기아 소피아는 뒤이은 558년 5월 7일 다시 지진이 일어나자 중앙 돔의 동쪽 부분이 붕괴하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즉각 보수 작업에 나서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의 조카 이시도루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복원된 교회는 563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다시 봉헌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에우티키우스 총대주교오 함께 마차를 타고 행렬의 맨 앞에 서서 하기아 소피아로 향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졸증 아니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최후의 날인 565년 11월 14일까지 황제로서의 의무를 수행했다. 이틀 후 그는 자신이 성사도 교회 안에 새로 만든 거대한 묘지로 옮겨져 테오도라와 나란히 반암으로 만든 관에 안장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83살을 일기로 38년이 넘게 제국을 다스린 뒤 서거했는데 그의 통치기는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그러나 연대기 작가 에바그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이 군주는 온 세상을 잡음과 혼란으로 가득 채우고 그렇게 죽었다. 삶이 끝난 후 자신의 비행에 대한 응보를 받아야 하기에 지옥의 재판관에게 심판을 받으로 갔다.” 반면 현대 역사가들은 유스티니아누스를 높이 평가하며 하기아 소피아의 축조와 잃어버린 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그의 야심을 높이 사서 그의 재위기를 비잔틴 역사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565~717)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상을 뜨고 몇 해 안 되어 침략자들에 의해 사방에서 국경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비잔틴 제국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 유스티누스 2세가 황위에 올랐고 황후 소피아는 테오도라의 조카였다. 유스티누스 2세 재위 기간 중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군이, 북쪽에서는 발칸 반도로 이주한 중앙아시아 종족 아바르족이 침략해 왔다. 본래 정서가 불안했던 유스티누스 2세는 침략자들의 맹공격에 신경쇠약에 걸렸고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에페소스 출신의 연대기 작가 요하네스에 따르면 유스티누스는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는 음악가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장난감 수레를 타고 궁전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여 수행원들을 물어뜯으려고 덤비고 궁전 창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해서 창문에 창살을 박아높아야 했다.
578년에 유스티누스 2세가 죽자 티베리우스 2세가 즉위했다. 그는 582년에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제국을 다스리다가 마우리케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는데 마우리케는 카파도키아(소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고원지대)인으로 소아시아에서 황실군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20년의 재위 기간 동안 마우리케는 페르시아군과 아바르군을 저지했다. 한편 라벤나와 카르타고에 총독을 두어 6세기 말까지 제국의 미래는 안전한 듯 했다.
그러나 602년 초가을 백인대장 포카스가 이끄는 도나우 강의 황실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포카스는 황위를 찬탈하고 마우리케와 그의 다섯 아들들을 참수시켰다.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이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포카스는 그들의 머리를 여러 날 동안 헤브도몬에 두게 했다. 그리하여 그곳 시민들이 머리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할 때까지 나와서 구경했다.”
이후 6년간 코스로에스 2세가 거느린 페르시아군이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소아시아, 칼케돈까지 침략해 오면서 지나는 곳마다 살육과 파괴를 일삼았다. 그 즈음 콘스탄티노플은 일련의 폭동과 반란들로 분열을 겪고 있었고 포카스는 그것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아바르족은 발칸 반도에서 침략에 나섰는데 이제 모두들 제국의 몰락이 임박했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국을 구한 이는 카르타고의 총독 헤라클리우스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 헤라클리우스가 이끄는 함대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함대는 610년 10월 3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고 아들 헤라클리우스는 반란을 일으켜 포카스를 황제 자리에서 몰아냈다. 포카스는 참수당하고 그의 시신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들 헤라클리우스는 황제로 등극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긴 재위 기간을 거의 끊임없이 이어진 페르시아군과 아바르군과의 전투로 보냈는데 처음에는 그의 고투에도 불구하고 적군이 계속 전진해 왔다. 페르시아군은 615년에 소아시아를 휩쓸고 다시 칼케돈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이로 인해 헤라클리우스는 성녀 에우페미아의 시신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히포드롬 근처에 세운 순교자 기념 성당에 모셔야 했다. 아바르군도 617년 6월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공습을 감행해 왔으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지 못하고 트라키아에서 잡은 25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데리고 철수했다.
가망 없는 상황에 이르자 헤라클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카르타고에 수도를 세울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포에 휩싸인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를 내세워 헤라클리우스에게 수도를 야만족의 손에 넘기지 않게다는 맹세를 하도록 요구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한두 번의 성공적인 원정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었는데 두 번째 원정에서 접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 원정이 시작되기 전에 아바르 족이 트라키아를 위협하자 그는 군대의 일부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내 수도를 지키게 했다. 626년 아바르족의 왕은 불가르족, 슬라브족, 훈족, 스키타이족, 게피드족을 규합한 어마어마한 연합군을 거느리고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의 페르시아군이 소아시아를 거쳐 칼케돈에 진을 치고 아바르와 콘스탄티노플을 협공할 기회를 노렸다. 아바르군은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성벽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거의 뚫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성모 블라케르니오타사(성모 마리아의 기도하는 모습과 마리아의 가슴에 달린 메달 속에 아기 예수를 그려 넣은 모습)가 홀연히 나타나 야만족들을 쫓아냈다고 그곳을 지키던 그리스 병사들이 증언했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비잔틴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페르시아군과 아바르군은 포위를 풀고 고국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여 “하늘이 지켜주는”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주민들은 성모 교회로 찾아가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 그때 부른 세르기우스 총대주교가 작곡한 찬송가 <아카티스토스>는 지금까지도 그리스정교의 대표적인 성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직후에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골든혼 근처의 육지 성벽의 북쪽 끝에 새 성벽을 세웠다. 헤라클리우스 성벽으로 알려진 이 성벽은 하마터면 아바르군에게 뚫릴 뻔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다음 헤라클리우스는 동쪽 국경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켰고 627년 12월12일 페르시아 왕 호스로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호스로는 바로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들 카바드 2세 셰로에가 왕위를 이었다. 페르시아의 새 왕이 평화협정을 제안하자 헤라클리우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분쟁 지역이 모두 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한편 훨씬 더 무시무시한 신흥 세력이 아라비아에서 부상했는데 622년 선지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도피하면서 이슬람 시대가 열린 것이다. 636년 황제의 동생 테오도루스가 이끄는 비잔틴군이 요르단의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군에 의해 전멸당한 것으로 이슬람의 군사력은 입증되었다. 이 전투로 시리아와 요르단을 손에 넣은 아랍군은 638년 예루살렘을, 2년 후에는 카이사레아를 함락시켰으며 이집트까지 침략했다.
이때쯤 헤라클리우스는 죽어가고 있었고 기를 쓰고 싸워 얻은 것을 모두 잃은 뒤라 사기가 완전히 꺾인 상태였다. 결국 그는 641년 2월 11일 숨을 거두어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연대기 작가 니케포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의 유언에 따라 매장 후 사흘 동안 관 뚜껑을 열어놓았다고 하는데 생매장되었다는 소문이 있는 제노 황제와 같은 처지가 될까 봐 두려워했던 듯하다.
헤라클리우스로 시작된 왕조는 그의 사후 70년 동안 명맥을 이어갔다. 그의 두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와 헤라클로나스가 641년 공동 황제가 되어 몇 개월간 제국을 다스렸다. 그해 5월 24일 콘스탄티누스는 결핵으로 세상을 떴고 9월 말에 헤라클로나스는 원로원에 의해 폐위되어 어머니 마르티나와 함께 유배되었다. 원로원은 그가 다시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그의 코를 베고 마르티나의 혀를 잘랐는데 비잔틴 제국의 '리노트메티아(신체 절단)'의 첫 사례였다.
헤라클로나스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2세의 아들인 열한 살의 콘스탄티누스가 황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누스 3세의 재위기는 아랍군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는데 641년 처음으로 소아시아를 침공한 아랍군은 함대를 거느리고 동지중해 연안과 섬들을 약탈했다. 아랍군의 침략에 크게 낙담한 콘스탄티누스 3세는 660년 콘스탄티노플을 포기하고 서로마에 수도를 다시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결국 시칠리아로 향했고 663년에 시라쿠사(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남동쪽에 위치한 도시)에 정착하여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2년 후 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려가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수도의 자격을 상실하고 야만족의 손에 넘어갈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것이 콘스탄티누스 3세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그는 668년 7월 15일 시라쿠사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맏아들이 황위를 계승했는데 역시 이름이 콘스탄티누스였고 나이는 16살이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도 재위기의 대부분을 칼리프 무아위야가 이끄는 아랍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보냈다. 아랍군의 첫 침략은 668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가 지휘하는 아랍군이 칼케돈에 이른 것이었다. 이듬해 봄 아랍군은 해협을 거너와 육지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지만 결국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지 못하고 철수했다.
다음 습격은 674년에 시작되었는데 아랍군이 시지쿠스를 점령한 뒤 무아위야의 함대가 그곳을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기지로 삼은 것이다. 비잔틴 군은 가공할 위력을 지닌 '그리스의 불'을 호스로 뿌려 발사하여 아랍 전함들을 화염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아랍은 시지쿠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4년 동안 해마다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지만 무시무시한 '그리스의 불' 때문에 번번히 패배했다. 결국 그들은 678년 여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다섯 번째 공격을 포기하고 지중해로 나갔으며 그곳에서 풍랑을 만나 난파했다. 그러자 무아위야는 콘스탄티누스 4세와 협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30년 평화조약에 합의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고 있지만 의지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단일의지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도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이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680년 11월 7일부터 681년 9월 16일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6차 공의회를 열었다. 그는 공의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회의 결과 단일의지론은 이단 판정을 받고 그 지지자들은 파문당하였다.
공의회 진행 중에 단일의지론을 지지하는 폴리크로니우스라는 수도승이 회의장에 나타나 신앙고백으로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노라고 말했다.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폴리크로니우스가 대중 앞에서 자신의 힘을 증명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방금 숨을 거둔 남자 시체 한 구가 준비되었고 폴리크로니우스는 그 시체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4세가 685년 7월 하순에 숨을 거두자 당시 16살이던 그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위에 올랐다. 2년 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발칸 반도에 슬라비니아라는 나라를 세운 슬라브족을 상대로 한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슬라브족을 소아시아로 이주시켰는데 이것은 선황이 시작한 정책을 더 큰 규모로 이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6년의 재위 기간 동안 5차와 6차 공의회의 법령들을 보충하기 위한 퀴니섹스트(숫자 5를 뜻하는 '퀸'과 6을 뜻하는 '섹스') 공의회를 주관했다. 102개의 카논(법령) 중에서 일부는 이교적인 축제들과 관습들을 금하는 내용이었는데 예를 들면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이 가면을 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을 추던 '브루멜리아' 축전이 거기 속했다. 그러나 이 행사는 그리스 카니발에 포함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카논 21조는 마임과 판토마임, 야생동물과 관련된 쇼를 금했고, 카논 24조는 성직자들의 극장과 히포드롬 출입을 금지했으며, 카논 62조는 여자들이 대중 앞에서 춤을 추는 것과 남자가 여자옷을 입거나 여자가 남자옷을 입는 것, 포도 수확 철에 디오니소스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행위, 청년들이 모닥불을 뛰어넘으며 하지를 축하하는 것을 금했다.
695년이 끝나갈 무렵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폐위되고 군사령관 레온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레온티우스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유스티니아누스를 살려주자고 청했고 그 덕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목숨은 건졌지만 코와 혀를 잘렸다. 이후 '코 잘린 황제'라는 뜻의 리노트메투스로 불리게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달마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 다음엔 크림으로 추방되었으며 그후로 수도승 게오르기오스의 말을 빌자면 “사방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들 중 하나로 들어선 비잔티움에 평화가 자리할 여지는 없었다. 레온티우스는 3년 만에 폐위되고 압시마르 제독이 티베리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황제가 되었다. 레온티우스는 코를 잘린 채 달마토 수도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는 새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704년 크림에서 도망쳐 하자르족의 왕을 찾아갔다. 하자르 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자신의 누이와 결혼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가 된 하자르 왕의 누이는 테오도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결혼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가르족의 왕 테르발을 찾아갔고 테르발은 그가 황위를 찾을 수 있도록 군대를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불가르 동맹군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했고 705년 봄 별로 피를 흘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었다. 티베리우스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쳤다. 유스티니아누스는 10년 전에 잃은 황제 자리를 되찾았다. 잘린 코는 그에게 장애가 되지 않았는데 연대기 작가 아그넬루스에 의하면 ‘순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였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부하들이 티베리우스를 잡아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했고 706년 2월 15일 티베리우스와 레온티우스는 히포드롬에서 유스티니아누스와 대면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포박된 두 폐위 황제들을 앞에 앉혀놓고 발로 그들의 목을 짓밟으며 경주를 지켜보는 달콤한 복수를 맛보았다. 경주가 끝난 뒤 그는 레온티우스와 티베리우스의 목을 베고 시체를 바다에 던졌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재집권은 711년까지 이어졌으나 아르메니아 장군 바르다네스(필립피쿠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그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목숨까지 잃었다. 필립피쿠스는 즉위하자마자 유스티니아누스의 어린 아들 테베리우스를 처형하도록 했는데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양처럼 도살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여섯 대째에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헤라클리우스가 황위에 오른 지 101년 만이었다.
필립피쿠스는 이후 6년 동안 제국을 다스린 단명한 세 황제 중 첫 번째 황제로 아나스타시우스 2세와 테오도시우스 3세가 차례로 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으나 얼마 못 가서 폐위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황제가 되기 전에 징세관 노릇을 하던 인물이었다. 715년 여름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나스타시우스 2세를 축출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던 반란군이 지나가게 되었다. 반란군 지휘자 하나가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가 ‘테오도시우스’라고 대답하자 그것으로 황제 자격이 충분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테오도시우스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반란군은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가 아나스타시우스 2세를 폐위시킨 후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테오도시우스는 겨우 2년을 버틴 후 자신보다 훨씬 더 황제 자격을 갖춘 새 후보자 레오 3세에게 밀려났다. 그는 에페소스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평화롭고 거룩한 여생을 보냈다. 에페소스에 있는 그의 무덤은 곧 성소가 되었으며 그에게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힘이 있었다는 믿음이 퍼져 결국 그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비잔틴 역사가들에게 ‘마지못해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 콘스탄티노플에 암흑시대의 기나긴 밤이 도래하고 있었으니 로마와 아테네에서의 전철을 밟아 이곳에서도 그리스, 로마 고전 문명의 빛이 꺼져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성상 파괴 운동(717~845)
레오 3세가 소아시아 주둔군 지휘관의 세력을 이용하여 황위를 찬탈한 것은 그가 32살 되던 해였다. 그는 717년 3월 25일 군대를 이끌고 황금문을 통과했고 바로 그날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아랍군이 717년에서 718년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했으나 그 공격은 무위로 끝났다. 레오 3세가 군대를 이끌고 육상에서뿐 아니라 해상에서도 ‘그리스의 불’을 이용하여 사라센 함대를 물리쳤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호데게트리아(길의 인도자이신 성모)가 도시를 구했다고 믿었는데 포위 기간 중 성 루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호데케트리아 성화를 든 행렬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따라 행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 3세의 즉위로 비잔틴 역사상 최대의 종교 분쟁인 성상 파괴 운동의 막이 올랐다. 726년 레오 3세가 근위대를 시켜 대궁전 정문에 걸려 있던 거대한 그리스도의 성화를 철거하게 하면서 갈등은 시작되었다. 이 그림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화였으며 레오 3세는 이 성화를 철거하는 것이 제국 내의 모든 성상들을 파괴하는 운동의 첫 시도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상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상을 숭배하는 무리가 작업을 저지하고 나서면서 충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근위대 지휘관이 목숨을 잃었다. 분노한 근위대는 성상 숭배자들의 지도자 테오도시아를 살해했다. 테오도시아는 성녀로 추대되어 성상 숭배자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으며 성상 숭배자들은 그녀에게 교회를 지어 헌납했는데 그 건물은 현재 귈 자미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레오 3세의 행동들은 육군과 해군 모두의 반란을 야기했지만 그는 그런 반란들을 쉽게 진압했다. 레오 3세는 730년 제국 내의 교회와 수도원에 성상을 두는 것을 금하는 칙령을 내려 자신의 성상 파괴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는 741년 6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성상 파괴 운동으로 인해 제국은 내란으로 분열을 겪고 있었다.
레오 3세의 성상 파괴 정책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세례를 받을 때 똥을 싸서 비잔틴 연대기 작가들 사이에서 ‘코프로니무스(똥)’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콘스탄티누스 5세가 즉위하고 6년이 흐른 뒤 콘스탄티노플에 무시무시한 역병이 창궐했는데 연대기 작가 니케포루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노플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주민들은 역병이 성상 파괴 정책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표시라고 여겼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그리스와 에게 해의 섬들에서 데려온 사람들로 도시를 다시 채워야 했다. 그러나 비잔틴 시대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의 수준으로 회복된 적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754년 성상숭배를 금지하는 종교회의를 다시 개최하면서 우상숭배 반대 운동을 재개했다. 그는 더욱 강력하게 성상 파괴 정책을 밀어붙였고 특히 콘스탄티노플 내의 교회들에 대한 압박이 심해서 많은 성직자들이 그리스나 카파도키아의 황야로 도피했다. 공포정치가 시작되어 도피하지 않은 이들은 투옥되었고 고문과 신체 절단을 당한 후에 투옥되는 사례들도 가끔 있었으며 이들 중 다수가 처형당했다. 젊은 성 스테파누스의 <전기>는 그와 432명의 다른 수도승들이 콘스탄티누스 5세 재위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투옥되어 고문당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며 결국 그들 모두 처형당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775년 9월 14일 불가르군과 싸우기 위해 출정했다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 레오가 다음 황제가 되어 부친의 성상 파괴 정책을 계속 이어갔다. 레오의 아내 이레네는 아테네인으로 독실한 성상 숭배자였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사실을 숨겼다. 레오 4세는 780년 성상 숭배자들에 대한 박해를 재개하여 교회와 수도원의 보물들을 몰수하고 수많은 수도사들과 수녀들을 투옥하고 고문했다. 바로 그해에 그는 불가르군을 상대로 한 원정에 나섰고 도중에 병에 걸려 780년 9월 8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레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황위를 이었다. 새 황제가 아직 10살이 안 되어 어머니 이레네가 섭정을 맡았다. 이레네는 즉시 성상 복구에 나섰으며 정부와 군대에서 성상 파괴주의자들을 축출하고 성상 숭배자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녀의 그런 정책으로 동쪽 국경에서 두 차례의 반란이 일어나 아랍군이 소아시아를 침범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슬라브족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레네의 성상 복구 노력은 787년 9월 24일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한 달 후 위원회는 성화는 경배는 하되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 아래 성상 복구 법령을 선포했다. 이레네는 또한 레오 3세가 모독하고 더럽힌 성 에우페미아 기념성당도 복구하였으며 성 에우페미아의 열렬한 신도들이 찾아낸 유해의 일부가 그곳에 다시 모셔졌다.
콘스탄티누스 6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나이가 되었어도 이레네는 섭정의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군사 정세가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고 790년 소아시아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섭정 종료를 요구했다. 그해 12월 이레네는 눈물을 머금고 섭정 자리에서 물러나 콘스탄티누스 6세에게 전권을 위임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설득하여 자신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권력을 독점하기로 결심하고 797년 8월 15일 자신의 근위병들을 시켜 아들을 잡아다 대궁전에 감금시킨 뒤 바로 그날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콘스탄티누스 6세와 그의 두 딸을 수도원으로 보냈으며 콘스탄티누스 6세는 그곳에서 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이레네는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녀의 극악무도한 범죄는 비잔틴 세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의 글을 보면 “열이레 동안 태양이 검게 변하여 빛을 비추지 않았으며 바다의 배들은 항로를 잃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황제께서 눈이 멀어 태양도 빛을 거두어 갔다고 말했다. 이렇게 권력은 황제의 어머니 이레네에게 넘어갔다.”
800년에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서로마의 황제 자리에 오른 샤를먀뉴가 제국의 동과 서를 합칠 왕가의 결합이 될 이레네와의 결혼을 청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사절단이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궁전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레네는 폐위되었다. 802년 10월 31일, 전직 재무장관이었던 이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바로 니케포루스 1세다.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니케포루스 1세는 9년이라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아랍, 슬라브, 불가르와의 전쟁으로 보냈다. 마지막 원정에서 그는 아들 스타우라키우스와 함께 불가르족의 왕 크룸과 맞붙게 되었다. 그는 811년 초여름 불가르의 수도 플리스카를 점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해 7월 26일 비잔틴 군대는 아드리아노플 근처에서 함정에 빠졌고 기병 몇 명만 도망쳤을 뿐 불가르군에게 몰살당했다. 니케포루스 역시 목숨을 잃었는데 발렌스 황제 이후 전장에서 유명을 달리한 비잔틴 황제는 그가 처음이었다. 불가르군은 황제의 목을 베어 그 해골 안쪽에 은을 입혀서 맥주잔으로 만들었으며 크룸은 그 잔을 승리의 상징으로 삼아 죽을 때까지 썼다고 한다. 스타우라키우스 역시 심한 부상을 당했지만 구조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었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812년 1월 11일에 눈을 감았으며 그 석 달 전에 매제 미카일 랑가베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
미카일 1세의 재위 기간은 겨우 스무 달이었다. 813년 6월 21일 아드리아노플 근처에서 크룸에게 패배한 그는 아르메니아인 장군 레오와 함께 겨우 도망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하지만 레오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겼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그곳에서 7년 후 생을 마감했다.
813년 7월 22일, 새 황제 레오 5세가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 닷새 전 크룸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했으나 결국 물러나면서 퇴로에 트라키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헤라클리우스 성벽 앞에 레오 성벽이라는 새 방어벽이 세워졌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이 포위 공격을 당할 때마다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던 블라케르나이 지구의 방어가 강화되었다.
성상 파괴주의자였던 레오 5세는 평화를 되찾자마자 성상에 대한 금지를 재개했다. 그는 815년 4월 하기아 소피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787년의 7차 공의회에서 선포된 법령들을 무효화하고 754년의 성상 파괴주의적 종교회의의 법령들은 비준했다. 그의 정책은 성직자들과의 갈등을 야기했고 그 결과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수도원들을 폐쇄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스투디온 수도원으로 이곳의 수도원장 테오도루스는 추방되었는데 그는 성상 파괴주의자 황제의 손에 이미 두 번이나 추방을 당한 적이 있었다.
820년이 저물 무렵 레오 5세의 귀에 오랜 전우인 아모리아인 미카일이 반역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레오는 미카일을 대궁전으로 잡아들인 후 크리스마스이브에 감옥에 가두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 성가대로 변장하고 침입한 미카일의 친구들이 궁전 예배당에서 레오 5세의 목을 벴다. 황제의 암살로 미카일은 궁전 감옥에서 나와 황제가 될 수 있었는데 손에 수갑을 찬 채로 황제 옷을 입고 옥좌에 앉았다. 대장장이가 불려와 그의 수갑을 잘라낸 뒤에야 그는 호위를 받으며 하기아 소피아로 가서 테오도투스 총대주교에 의해 미카일 2세로 등극했다. 같은 날 레오 5세의 시신은 히포드롬에서 대중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그후 그의 아내 테오도시아가 시신을 수습하여 한 섬에 묻었다.
황위에 오른 미카일 2세가 처음으로 한 일 중 하나는 투옥된 수도사들을 모두 풀어주고 추방된 이들을 다시 불러온 것이었는데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추방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스투디온 수도원의 테오도루스였다. 돌아온 테오도루스는 생의 마지막 5년 동안 스투디온 수도원장으로 재직했고 그 시기에 스투디온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동로마의 클뤼니(중세의 교회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베네딕트회의 수도원)’로 불리게 된 명성을 확립했다. 스투디온의 수도사들은 시인, 찬송가 작곡자, 학자, 고문서 필사가, 사본 채식사, 성화 화가로 명성이 높았다. 테오도루스는 수도사들이 자신의 일에 정진하도록 하였으며 맡은 일을 마치면 독서로 교양을 높이기를 바랐다. “일하는 시간인가? 그럼 일에 매달려라. 휴식 시간인가? 그럼 공부하라.” 그가 한 말이다.
미카일 2세는 829년 10월 2일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테오필루스가 즉위했다. 테오필루스는 821년에 공동 황제로 임명된 직후 ‘미인 대회’에서 신부로 점찍은 테오도라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테오도라는 미카일에게 다섯 딸을 차례로 안겨준 후 비로소 첫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낳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어린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840년 1월 19일 테오도라는 마침내 건강한 아들을 얻었는데 후에 미카일 3세가 될 이 아들은 세례를 받은 직후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테오필루스는 재위기의 대부분을 아랍군과의 전쟁으로 보냈으며 아랍군을 상대로 한 첫 원정은 829년과 830년에 있었다. 830년의 원정에서 그는 아랍 영토인 킬리키아(소아시아의 남동쪽, 키프로스의 북쪽 해안)까지 쳐들어가는 쾌거를 이루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후 개선식을 진행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개선식 때 황제의 행렬이 지나는 길에 꽃잎이 뿌려졌고 콘스탄티노플이 “신방처럼 장식되었다.”고 기록했다. 그후 테오필루스는 육지 성벽을 보수하고 마르마라와 골든혼의 해안 성벽도 대대적으로 강화하였으며 그곳의 방어탑들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 그 증거가 되고 있다.
테오필루스는 성상 파괴주의자였으나 선황처럼 적절한 관용을 보였다. 반면 테오도라는 독실한 성상 숭배자로 자신이 모시는 성상들을 남편이 보지 못하게 감춰야 했다.
테오필루스는 842년 1월 20일 이질로 숨을 거뒀는데 그가 39살 되던 해였다. 그는 마지막 성상 파괴주의자 황제로서 후세의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억울하게 매도당했으며 유명한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테오필루스가 공정한 황제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테오필루스가 백성들의 복지에 관심이 많았음을 나타내는 많은 일화들을 전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미카일 3세는 겨우 두 살의 나이였다. 미카일의 어머니 테오도라가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녀의 남동생 바르다스가 도움을 주게 되었다. 독실한 성상 숭배자여썬 테오도라와 바르다스는 성상 복구의 때가 도래했다는 생각으로 845년 3월 초 우상숭배자들을 중심으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754년의 성상 파괴주의적 법령들은 폐지되고 대신 787년의 7차 공의회의 결정들이 채택되었다. 845년 3월 11일 일요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비잔틴 교회와 수도원에 성상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감사 의식이 열렸다. 이 의식은 그리스정교회의 축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야만족들이 사방에서 호시탐탐 제국을 손에 넣을 기회를 노리던 시기에 비잔틴 세계를 분열시켰던 성상 파괴 정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시기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현격히 감소했고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성벽 안쪽에서만 모여 살았다. 그러나 암흑의 시대에도 문화의 빛은 스투디온 같은 수도원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으며 16세기 초반까지도 꺼지지 않아 비잔틴 제국보다 반세기를 더 살아 남았다. 스투디온의 금욕적인 수도사 하나가 비잔틴 제국의 황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데 종교적 행복감에 취해서 쓴 글이 분명하다.
어떤 야만인도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며 어떤 여자도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천년 동안 쓸모없는 사람은 스투디온 수도원에 들어온 적이 없으며 여성은 아무도 수도원 뜰을 밟지 못했다. 나는 궁전과도 같은 방에서 산다. 정원과 올리브 숲과 포도밭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내 앞에는 우아하고 무성한 사이프러스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시장을 가진 거대한 도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들의 어머니요 인간 세상의 왕국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845~1056)
미카일 3세는 어머니 테오도라가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 세월을 보내서 ‘술주정뱅이’란 별명이 붙었다. 테오도라의 섭정은 미카일이 16살이 되던 856년 3월에 막을 내렸으며 미카일은 어머니를 수녀원에 유폐시키고 외삼촌인 바르다스를 국정 책임자이자 군대 총사령관으로 임명,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
미카일 3세가 단독 황제이긴 했지만 이후 10년간 바르다스가 제국을 쥐고 흔들었으며 그는 몇 차례 아랍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불가르군과 슬라브군도 저지했다. 그리고 암흑기에 폐쇄되었던 콘스탄티노플 대학을 다시 열어 비잔틴 문예 부흥을 일으켰다. 이 문예 부흥의 대표적 인물로는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수학자 레오와 슬라브어 성서를 만든 언어학자 키릴(세례명 콘스탄티누스)가 있다. 키릴은 이 성서를 가지고 형 메토디우스, 그리고 858년 총대주교가 된 신학자 포티우스와 함께 슬라브족에 기독교를 전했다.
867년 부활절 일요일에 하기아 소피아에서 성상 숭배자들이 최후의 승리를 기념했는데 이 자리에서 앱스에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 담긴 거대한 모자이크의 제막식이 함께 치러졌다. 이 모자이크는 아직 남아 있으며 헌납 명각도 일부 보존되어 있는데 장단격 2행연구로 “이 성상들은 사기꾼들이 한때 금했던 것을 신앙심 깊은 황제들이 다시 부활시켰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서 신앙심 깊은 황제들이라 함은 미카일 3세와 바실리우스 1세를 일컫는데 바실리우스 1세는 마케도니아인으로 미카일 3세가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바실리우스는 사실 부계로는 아르메니아인의 후손이었다. 연대기 작가 시메온 마기스테르의 기록에 가난한 시골 청년이었던 바실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상경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어느 일요일 어둠이 내릴 무렵 도시 안으로 들어선 그는 묵을 곳이 없어서 황금문 근처의 성 디오메데 수도원 바깥에서 잤다. 이튿날 그는 궁전 마굿간에서 일하게 되었고 힘이 세고 용모가 준수하여 미카일 3세의 눈에 띄었다. 미카일 3세는 그를 시종장으로 임명했고 866년 5월 26일 공동 황제 자리에 앉혔다. 바실리우스는 기회를 노리며 기다리다가 867년 9월 23일 밤 미카일 3세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렇게 바실리우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고 2세기 가까이 비잔틴 제국을 통치할 빛나는 마케도니아 왕조가 열렸다. 미카일 프셀루스는 <연대기>에 이 왕조의 마지막 두 세대의 생활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 왕조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과연 그들처럼 신의 은총을 듬뿍 받은 왕조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살인이라는 범죄 행위를 통해 잉태된 왕조임을 고려하면 기이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왕조의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힘차게 가지를 뻗었으며 가지마다 그 아름다움과 찬란함에 있어 비교할 데가 없는 황제라는 과실을 맺었다.
마케도니아 왕조는 바실리우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레오 6세의 재위기에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레오 6세는 886년에 황제가 되었는데 35살이 되기 전에 세 번이나 상처(喪妻)했고 아들을 얻지 못했다. 정교회에서 네 번째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레오 6세는 ‘새까만 눈’을 가진 조에 카르보노프시나를 정부로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1년쯤 후 조에는 딸을 낳았고 905년 9월 이윽고 그에게 아들을 안겨주었는데 그 아들은 처음엔 병약했지만 나중에 건강해졌다. 니콜라스 총대주교는 장차 콘스탄티누스 7세가 될 이 아이의 세례를 조에가 대궁전을 떠난다는 조건 아래 허락했다. 그러나 세례를 치른 사흘 후 레오 6세는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였으며 황실 예배당에서 은밀히 결혼식을 올렸다.
이 ‘네 번째 결혼’ 사건으로 비잔틴 제국은 장장 18개월 동안 혼란에 휩싸였으며 황제와 새 총대주교 에우테미우스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결국 네 번째 결혼이 교회의 승인을 받으면서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포르피로게니투스(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로 인정되었다. 912년 5월 11일 레오 6세가 세상을 하직하자 겨우 6살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비록 4년 전에 공동 황제로 임명된 몸이었지만 부친의 황위를 물려받진 못했다. 대신 879년부터 공동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레오 6세의 동생 알렉산드로스가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겨우 13개월 동안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켰는데 그 첫 사건은 취중에 불가르 사신들을 맞아 그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내쳐서 불가르의 시메온 황제로 하여금 즉시 전쟁 준비에 들어가게 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술잔치를 일삼고 성찬식을 모방한 이교 행렬을 벌이는 등 불명예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술에 취해 벌이던 폴로 경기에서 말에서 떨어졌고 이틀 후인 913년 6월 4일 삶을 마감했다.
조에의 아들이 콘스탄티누스 7세로 황위에 올랐다. 처음엔 조에가 섭정 노릇을 했으나 919년 3월 25일 로마누스 레카페누스 장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로마누스는 자신의 딸 헬레네와 황제를 약혼시켰고 황제가 14살 생일을 맞기 3주 전인 919년 5월 4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920년 9월 24일 장인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렸고 같은 해 12월 17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로마누스는 마케도니아 왕조 대신 자신의 왕조를 세울 목적으로 세 아들 크리스토페르, 스테파누스, 콘스탄티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었으니 우선 크리스토페르가 932년에 요절했다. 그리고 944년 12월 17일, 두 아들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켰다. 그는 수도원으로 추방되었고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는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945년 9월 27일 다시 반란이 일어나 그들도 궁에서 쫓겨나 아버지가 있는 수도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더 멀리 에게 해의 섬으로 추방되었고 로마누스는 948년 6월 15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7세는 945년에 단독 황제가 되어 959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그의 군대는 아랍군을 상대로 몇 차례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는데 그의 군대를 이끈 두 명장 니케포루스 포카스와 요하네스 치미스케스는 후에 차례로 비잔틴 황제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아들 로마누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로마누스는 황제가 되기 3년 전에 여인숙 주인의 딸이며 미모의 매춘부인 테오파노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며 테오파노에게서 두 아들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를 얻었다.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어린 나이에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로마누스 2세는 재위 초기에 니케포루스 포카스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니케포루스는 크레타의 사라센군과 싸우기 위해 원정을 떠났으며 961년 3월 7일 사라센군의 거점 칸디아(크레타 섬의 헤라클리온)를 점령, 134년간 지속되어온 크레타 섬에서의 아랍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듬해 초 그는 킬리키아 평원을 전광석화처럼 가로지르며 22일 만에 55개의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는 이듬해 봄에 공격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963년 3월 15일 로마누스 2세가 낙마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취소했다.
로마누스 2세가 세상을 하직한 건 그의 아내 테오파노가 딸 안나를 낳고 이틀 만이었다. 테오파노와 그녀의 어린 세 아이들은 졸지에 의지할 곳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테오파노는 니케포루스 포카스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청하는 전갈을 보냈고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그의 군대가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963년 8월 16일 콘스탄티노플에 개선한 그는 하기아 소피아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두 공동 황제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를 양쪽에 거느리고 폴리에욱투스 총대주교에 의해 니케포루스 2세로 탄생했다. 그리고 9월 20일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니케포루스는 965년 사라센군과 싸우기 위해 다시 출정했으며 타르수스를 점령, 그곳을 키프로스 재정복의 기지로 삼았다. 그는 969년에 332년간 아랍군의 수중에 넘어가 있던 안티오크를 재탈환하였으며 그곳에서 ‘사라센군 잡는 귀신'으로 환영받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테오파노는 니케포루스의 친척인 요하네스 치미스케스와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부정한 두 남녀는 니케포루스를 없앨 계략을 짰고 969년 12월 10일 밤 요하네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궁전에서 자고 있는 니케포루스를 암살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은 요하네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테오파노는 요하네스가 자신과 결혼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폴리에욱투스 총대주교가 요하네스의 대관식을 집행하는 조건으로 먼저 그녀를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요하네스는 순순히 테오파노를 섬의 수녀원으로 쫓아냈고 969년 크리스마스에 폴리에욱투스는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요하네스는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테오파노에 의해 수녀원에 갇혀 지내던 로마누스 2세의 누이 테오도라 공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971년 11월 하기아 소피아에서 새 총대주교 바실리우스의 집도 아래 정식으로 거행되었다.
요하네스는 재위기의 마지막 5년을 일련의 눈부신 승리들로 장식했는데 972년 키예프 공국의 스비야토슬라프 대공을 물리친 것이 그 시작이었다. 975년 그는 동방 원정을 떠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을 정복했으며 헤라클리우스 이래 그 지역에 발을 들인 첫 비잔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에 중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976년 1월 11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황위는 로마누스 2세의 장남 바실리우스에게 넘어갔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다. 14살이 된 그의 동생 콘스탄티누스도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비잔틴 황제 중 하나로 찬란히 빛났던 긴 재위기 내내 국사에만 전념했다.
바실리우스 2세의 재위기에 두 번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둘 다 작고한 요하네스 1세 치미스케스의 측근이었던 바르다스 스클레루스가 주도한 것으로 각각 979년과 986년에 일어났고 모두 진압되었다. 두 번째 반란 때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의 도움을 받은 바실리우스 2세는 블라디미르와 누이 안나를 결혼시켰으며 이것으로 비잔틴과 러시아 황실의 첫 결합이 이루어졌다. 블라디미르는 989년 초 8,000명의 바랑기아인(러시아화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 병력을 실은 함대를 보냈고 이 병력은 후에 황제의 근위대가 되었다. 바랑기아인 근위대는 비잔틴 제국 후기까지 이어지다가 잉글랜드 출신의 용병들로 대체되었다.
986년 바실리우스 2세는 그리스를 침공한 사무엘 황제가 이끄는 불가르군을 치기 위해 출정했다. 사무엘은 매복 기습으로 비잔틴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고 바실리우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쳤다. 그리고 다음 25년간을 불가르군과의 전쟁에 바쳤다. 이 긴 싸움의 전환점은 1014년에 도래했으니 비잔틴 군대가 대승을 거두어 비록 사무엘 황제는 놓쳤지만 1만 5,000명 가량의 불가르군을 생포했다. 바실리우스는 이 포로들을 백 명에 한 명씩만 남기고 모두 장님으로 만들었으며 그 한 명씩은 한쪽 눈을 남겨 전우들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눈을 잃은 불가르군 포로들은 긴 행렬을 이루어 고국으로 향했으며 마침내 그들이 사무엘의 막사에 도착하자 그 충격적인 광경을 본 사무엘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가르군은 4년을 더 싸운 뒤에야 굴복했다. 이후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록토누스(불가르인의 학살자)’로 불리게 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는 1021년 북서 아시아로 진군하여 그해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합병하고 제국의 국경을 아락세스 강(오늘날의 볼가 강)까지 넓혔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원정으로 그는 잠시 병을 앓은 뒤 1025년 12월 15일에 숨을 거뒀다.
콘스탄티누스 8세가 형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는데 65살의 나이였다. 그는 반세기 동안 공동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제국의 통치에 있어서는 사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쾌락에만 빠져 산 인물이었다. 미카일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연극, 경마, 검투 시합, 사냥, 야생동물 싸움, 노름 따위를 즐기느라 중요한 정무도 챙기지 않았으며 말년에 후계자를 뽑는 일까지도 게을리하였다.
그는 장녀 에우도키아는 이미 수녀가 되었으므로 건너뛰고 둘째 딸 조에로 하여금 황통을 잇게 했다. 프셀루스는 조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가 둘째딸을 본 건 그녀가 몹시 늙었을 때였는데 위풍당당하고 미모가 빼어나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맞게 된 콘스탄티누스 8세는 마침내 그녀의 배우자로 먼 친척인 61살의 로마누스 아르기루스를 선택했다. 로마누스는 한 여자와 40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해오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 8세는 조에와 결혼하지 않으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고 그를 협박하고 그의 아내를 수녀원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로마누스는 50살의 조에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8세는 그 사흘 후인 1028년 11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사도 교회에 안장되었는데 그곳에 묻힌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 로마누스 3세가 등극했다. 그는 전성기를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용모가 출중했지만 경박했고 위대한 전임자 바실리우스 2세에 비하면 황제의 자질이 부족했다. 그는 바실리우스 2세처럼 용사 황제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1030년 아랍군과 싸우기위해 출정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참패로 끝났다. 비잔틴 군대는 사라센군에 매복 공격을 당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급히 후퇴하여야 했던 것이다.
로마누스 3세는 곧 조에에게 싫증이 나서 정부를 두었다. 분노한 조에도 젊은 애인을 만들었는데 그가 바로 파플라고니아(아나톨리아 북쪽 흑해 연안 지역)인 미카일이다. 사실 조에에게 미카일을 소개한 사람은 환관 노릇을 하던 그의 동생 오르파노트로푸스(‘고아들의 수호자’) 요하네스였다. 로마누스 3세는 곧 병에 걸렸고 1034년 4월 11일 밤 궁전 목욕탕에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영을 하다가 익사했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조에와 미카일이 황제를 죽인 것으로 모두가 확신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튿날 아침 로마누스 3세의 시신이 목욕탕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조에와 미카일은 알렉시스 총대주교의 집도 아래 대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총대주교는 조에의 새 남편을 미카일 4세로 임명하고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고 같은 날 로마누스 3세는 매장되었다.
미카일은 건강이 좋지 못했으며 프셀루스가 기록한 증상들을 보건데 간질과 부종을 앓았던 듯하다. 최고 관직에 있던 그의 동생 오르파노트로푸스 요하네스는 자신의 가문 사람을 황위에 앉히기 위해 조카 미카일을 조에에게 소개시켰다. 이 청년은 미카일 칼라파테스로 알려져 있는데 칼라파테스는 땜장이란 뜻으로 그의 부친의 원래 직업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조에는 그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았고 미카일 4세는 그를 카이사르 서열에 올렸다.
미카일 4세는 1041년 1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직후 오르파노트로푸스 요하네스는 조에에게 미카일 칼라파테스를 후계자로 임명할 것을 청했다. 조에는 기꺼이 그 청을 수락했고 1041년 12월 13일 그녀의 양자는 미카일 5세가 되었다.
새 황제는 처음에는 조에에게 복종적이었으며 공개석상에서 함께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그녀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숙부 콘스탄티누스와 결탁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했다. 형제인 요하네스를 늘 질투하던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요하네스를 추방시키도록 만들었다. 미카일 5세는 단독 황제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조에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042년 4월 18일 조에는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분개하여 대궁전으로 쳐들어가 사랑하는 국모를 복귀시킬 것을 요구했다. 시위는 이튿날까지 계속되었고 3,000명의 시위대가 황제의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나 분기탱천한 시민들은 방어군을 물리치고 대궁전을 점령했다. 미카일 5세와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로 피신했다. 그러나 성난 군중은 그들을 광장으로 끌어내어 눈알을 뽑은 뒤 추방했으며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042년 4월 21일, 조에는 15년 전 콘스탄티누스 8세에 의해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졌던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황위에 올랐다. 당시 조에는 64살, 테오도라는 그보다 한두 살 아래였지만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의 용모와 행동은 전혀 나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언니는 원래 살집이 있는 편이었고 키는 아주 크진 않았다. 당당한 눈썹과 큰 눈이 인상적이었고 미간이 넓었다. 코는 살짝 매부리코였다. 머리카락은 금발이었고 피부가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나이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면 팔과 다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녀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여기 젊은 여인이 하나 있노라고 말하기가 쉬웠다. 그녀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한편 테오도라는 언니보다 키가 크고 날씬했다. 그녀는 두상이 몸과 균형이 맞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녀는 조에보다 달변인 데다 …… 행동도 더 빨랐다. 그녀의 눈빛에는 매서움이 없었으며 쾌활하고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기회만 생기면 말을 하려고 했다.
조에와 테오도라의 공동 통치는 석 달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 기간에 박력있는 남자가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테오도라는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조에는 다시 결혼하고 싶어해서 그녀의 배우자감 물색이 시작되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가 낙점되었는데 그는 7년 전에 추방된 부유한 귀족이었다. 콘스탄티누스와 조에 모두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몸이라 알렉시스 총대주교가 그들의 결혼을 승인하지 않아서 그들은 궁전 예배당에서 식을 올렸다. 마음이 누그러진 알렉시스는 이튿날인 1042년 6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콘스탄티누스 9세의 대관식을 감행했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9세는 용모가 출중했지만 통치자로서는 너무도 무능했다. 프셀루스의 <연대기> 제6권에 보면 그는 인심이 후해서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이면 사회 계급에 관계없이 고위직에 앉히고 특권을 주었다.
황제로 등극한 콘스탄티누스 9세는 박력도 신중함도 보이지 못했다. …… 천한 시정잡배들에게 원로원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황제가 되자마자 한꺼번에 떼거리 인사를 단행, 소수도 아닌 한 무리를 국가 최고 고위직에 발탁했다. 이로 인해 많은 의식들이 치러졌고 도시 전체가 인심 후한 군주를 맞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들떴다.
일부 노동자 계층 사람들은 새 황제의 무절제한 인심을 이용하여 성직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연대기 작가 크리스토페르는 “문지기, 포도밭 일꾼, 가축 상인, 채소 장수, 빵 굽는 사람, 대장장이, 원예사, 구두장이, 행상 할 것 없이 모두 성직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썼다. 그는 이들이 무지하기 짝이 없어서 대부분이 까막눈인 데다 예배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과거에 쓰던 직업 용어들을 쓴다고 푸념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조에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미모의 매춘부 스클레리나를 정부로 두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스클레리나를 조에에게 소개하고 궁전에 살게 했다. 그는 공식석상에 조에와 스클레리나를 함께 동반하는 등 드러내 놓고 스클레리나와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에도 남편이 정부와 함께 사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듯 했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조에는 자신의 처소에서 향수와 고약을 만들며 소일했으며 그녀의 처소는 연금술사의 실험실을 방불케 했고 화롯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 같은 그곳에서 하인들은 죽을 고생을 하며 일했다. 프셀루스의 글에 의하면 “조에는 열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사실 그녀와 테오도라는 천성적으로 별났다. 그들은 신선한 공기와 좋은 집, 초원, 정원을 경멸했다. 그것들이 지닌 매력은 그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반면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히면 …… 그들은 진실로 만족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와 스클레리나의 부정한 관계는 콘스탄티노플 전체에 알려졌고 주민들은 황제의 행동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로 인해 1044년 3월 9일에 폭동까지 일어났으며 폭도들은 조에와 테오도라가 나서서 간곡히 만류한 뒤에야 철수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폭동 가담자들을 엄격히 처벌했는데 한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났다. 그런 일이 있은 직후 스클레리나는 세상을 떠났고 슲픔에 잠긴 황제는 그녀를 교회에 매장했다.
조에는 1050년에 죽었으며 정확한 사망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9세는 조에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지만’ 인질로 잡혀 와 있던 알라니족(흑해 연안 북동쪽의 스텝 지역에서 기원한 이란계 유목민족)의 젊은 공주를 새 정부로 삼아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는 여생을 알라니족 공주와 궁전의 어릿광대와 함께 보냈는데 난쟁이 어릿광대는 밤에 황제와 한 침대에서 잤다.
콘스탄티누스 재위기의 마지막 해에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일 케롤라리우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이들의 갈등은 1054년 7월 16일 토요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오후 예배가 진행되던 중 세 명의 교황 사절 중 하나인 훔베르트 추기경이 중앙 통로를 뚜벅뚜벅 걸어와 제단에 켈룰라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파녀한다는 내용이 담긴 교황의 칙서를 올려놓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켈룰라리우스는 즉시 종교회의를 열어 세 교황 사절을 제명하였으며 이는 그리스정교회와 로마카톨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 분열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때쯤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듬해까지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다 1055년 1월 11일에 고인이 되었고 사랑하는 스클레리나 곁에 묻혔다.
콘스탄티누스 9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에 프셀루스의 표현에 따르면 “테오도라에게 대권이 넘어갔다.” 테오도라는 이미 75살의 나이였고 그녀의 재위는 18개월밖에 못 갔다. 그녀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몸소 국정을 돌보았다. 주위에선 남자 후계자를 지명해야 한다는 만장일치의 합의가 있었지만 그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다 1056년 8월 말경 그녀는 갑자기 극심한 복통을 일으켰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다. 황제의 고문회의에서 후계자로 미카일 브링가스라는 나이 든 문관을 추천했고 테오도라는 그를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날인 1056년 8월 31일 그녀는 세상을 떴고 브링가스가 미카일 6세로 황위를 계승했다.
테오도라는 그녀의 5대조 할아버지 바실리우스 1세를 필두로 189녀간 비잔틴 제국을 다스려온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비잔티움은 비교를 불허하는 최강의 제국의 위상을 되찾았으며 페르시아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도나우 강에서 에게 해 제도까지 국경을 넓혔다. 또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중세의 암흑에서 벗어나 미개상태 직전까지 추락한 세계에서 고전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을 일구어낸 위대한 왕조는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태어나면서부터 황녀’란 뜻)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