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8
3월3일[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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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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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H15qMA12l4 (박성호 다미아노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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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을 중요히 여기십니다!>
살레시오회에 입회 후 자주 듣게 된 돈보스코의 말씀,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라는 말씀이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통~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 뛰어든 후,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교사에게 있어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참 스승이 되는가? 아니면 그저 급여를 받으니 의무감에 교단에 서는 월급쟁이가 되는가는, 바로 이 마음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교사는 정말이지 아이들을 향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에 관한 관심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별 기쁨도 보람도 없이, 그저 마지못해 교단에 서니 하루하루가 지겹습니다.
어떤 청소년 시설 책임자는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이 전혀 엉뚱한 마음, 사심(私心)이었습니다. 그에게 아이들은 자기 홍보의 대상이요, 공금 횡령과 착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강조하신 그 마음은, 다름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이 홀로 설수 있도록 도와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픈 마음입니다. 결국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참 스승은 청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극진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식 같고, 친구 같고, 연인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산상설교 중에 예수님 역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에 따라, 외적, 실제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계명을 준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로, 시나이산에서 주어진 율법 그 위에 새로운 해석을 추가하십니다. 외적, 실제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 해도 마음으로, 내적으로 하는 살인 조차 안 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마음으로 이웃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해치고 죽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따르면, 우리는 수십 번도 더 재판에 넘겨지고, 지금쯤 전과 십 범쯤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계명을 더 적극적이고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실행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웃을 향한 분노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가득 한채, 제단으로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호통을 치십니다. 그런 예배는 마음, 영혼, 진정성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럴듯한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 외적인 것보다는 마음을 더 중요시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뭘 하든 마음이 담겨있어야겠습니다.
매일의 인간 관계 안에서도, 매일의 전례적 삶 안에서도 마음과 영혼이 담길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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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fOJODL5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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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참는 연습을 하면 화 나는 횟수가 줄어들까?>
한 번 화를 내서 주위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열 번 잘 해 줘도 한 번 화를 낸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모든 인간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러니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와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자녀와 연을 끊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물론이요, 손주들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화를 한 번도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세상의 가르침은 숫자를 세어라, 화가 나는 이유를 종이에 적어라 하는 식으로 연습을 하면 화가 누그러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아닙니다. 화는 사실 밖으로 내지 않고 참더라도 화를 낸 것처럼 몸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화 자체가 생겨나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알아야 합니다. 화는 ‘마음’에서 올라옵니다. 그러니 마음을 고치면 됩니다. 마음을 고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화가 안 나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누구에게 받는 것일까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받습니다. 아이들은 당연이 부모입니다. 특별히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을 자녀에게 주는 존재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맷 데이먼)은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윌은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던 중, 어머니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함께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그 후 윌은 사실상 무가족 상태에서 자랐으며, 어릴 적 상처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를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청난 분노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기 또래의 다른 이들이 사랑 받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과는 너무 대조되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수학을 잘 하지만 그는 그 능력으로 모든 이들을 조롱합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윌을 도와주는 사람은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암스)라는 심리학 교수입니다. 그는 모든 이를 조롱하는 그를 진정으로 치유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책하지 말라고 그를 안아줍니다. 이 영화에서 윌의 아버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윌이 숀을 아버지로 받아들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숀의 마음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숀의 말대로 화가 나서 떠나보낸 여인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영화의 제목이 “좋은 의지 사냥”인 것은 매우 특별합니다. 주인공 이름이 윌인 것도 있겠지만, 삶을 위한 좋은 의지는 내가 찾는다는 뜻입니다. 윌은 그 마음을 숀에게서 찾았습니다. 숀을 사랑하게 되자 그의 마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장착하니 화가 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화가 나는 이유는 태어날 때의 생존만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바꿔줄 대상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됩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기요사키는 가난한 생물학적 아버지보다는 친구의 아버지인 부자 아빠를 진정한 자신의 아버지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그의 삶의 방식을 배웁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친구 아버지의 모습을 지닌 사업가가 됩니다. 누군가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외적으로 부모를 닮은 것은 너무 쉽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매를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희에게 매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결혼하여 자녀를 때릴 수 있을까요? 이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나 부모를 증명하며 부모를 계시하며 삽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떨까요? 화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와 등을 지고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사는데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을 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야 하실 때도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마음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란치아노에서 성체가 사람의 심장 조직으로 변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UN에서도 인정한 기적입니다. 왜 심장일까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 그분의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만 따르려 했습니다. 그런 의로움으로는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화 자체가 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 안에는 부모의 마음이 담깁니다. 그러니 성체를 영하는 우리는 화를 도무지 낼 수 없는 하느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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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나뭇잎이 가을에 노랗게, 빨갛게 물이 들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단풍’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가을도 ‘단풍’이 물들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면 나무는 이제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파란 감도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어갑니다. 빨간 홍시는 맛이 별미입니다. 빨간 감이 떨어지면 감나무도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나무는 단풍이 든다고 하고, 감은 익어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늙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늙음’을 아쉬워하고, 멈추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도 이제 ‘환갑’이 되었으니 예전의 기준으로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신체의 기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늙음을 익어감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면 이제 주님께 의탁하며 익어감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원하였듯이 사람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진시황제가 원하였던 ‘불로초’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노화를 방지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혈액’을 젊은 사람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물 실험의 결과 젊은 ‘피’를 수혈했던 동물이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젊은 피’를 공급한다는 의미는 신인 선수를 투입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도 ‘젊은 피’를 공급하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드라큘라의 전설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사람의 대장에 있는 미생물을 나이든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생물은 소화흡수가 잘 되도록 돕고, 원활한 배설이 되도록 돕기에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유전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포는 재생되지만 그 재생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유전자의 변환으로 재생의 숫자를 늘리면 건강한 몸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습니다.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품격보다 자본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좋은 미생물을 주입한다고 해도, 유전자를 변환시킨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길이도 분명 중요합니다. 남들이 사는 만큼의 수명을 누리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원하는 만큼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강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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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참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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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먼저>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여기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신심 행위와 신앙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은, ‘이웃 사랑’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고, 뜻은 “이웃 사랑 실천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황은, ‘내가 형제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상황입니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누구의 잘못이 더 크든지 간에, 형제가 나 때문에 상처를 입었고, 즉 ‘내가 형제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내가 먼저 나서야 하는 상황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쪽이 오해한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가서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나거든’이라는 말 때문에, 생각이 안 나면, 즉 완전히 잊어버렸거나 모르고 있으면 그냥 지나쳐도 되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잊어버렸거나 모르고 있어도 형제에게 생긴 상처는 없어지지 않고, 내가 마음 편하게 지낼수록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책임도 없어지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죄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나에게 ‘이웃 사랑 실천이 부족한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그런 적 없다. 생각이 안 난다.”라는 말만 하면서 피하지 말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성찰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상처 준 일은 오래 기억하면서, 내가 형제에게 상처 준 일은 금방 잊어버리거나 그런 줄도 모르고 살 때가 많습니다. 또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마다,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만 하고, 내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왜 항상 나를 ‘선하고 옳은 쪽’에만 두는가? 살다 보면 ‘옳지 않은 쪽’에 서 있을 때도 많지 않은가? 왜 항상 ‘용서하는 처지’에서만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할 일이 정말로 하나도 없는가?>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라는 말씀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은 거짓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먼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이기도 하고, “형제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먼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두 사랑을 동시에 이루는 방법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또 형제에게 먼저 가는 일에 대해서, “왜 내가 먼저 가야 하는가? 그쪽에서 먼저 와야지.”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언제나 항상, “사랑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고소당한 사람’도 ‘모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소한 자’는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그 사람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수호천사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법정에서 검사 역할을 하는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입니다. “얼른 타협하여라.”라는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회개와 보속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회개를 할 기회 자체가 없습니다. 여기서 ‘감옥’은 연옥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하는 곳입니다. 사는 동안 보속이 부족했던 사람들이 보속하는 곳인데, 회개가 부족했다면 그만큼 보속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도 연옥은 보속을 다 마치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갚는다는 말은, 보속을 완전히 마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대충 적당히’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옥으로 가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곳, 희망이 하나도 없는 곳, 보속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형제와 화해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자기 혼자서 사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은 모두 지옥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곳은 하느님이 안 계시는 곳이고, 하느님이 안 계시는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도 없이, 또 사랑도 없이 사는 상태 자체가 지옥입니다. 자기 혼자서 마음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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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신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로 유다교 안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 학자는 율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해석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율법은 성전에서 바치는 제사와 함께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보다 더 폭넓습니다. 실제로 생명을 빼앗는 행위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그들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도 처벌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도 중요하지만, 원망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외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계명이 가리키는 것들도 따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가진 원망이나 미움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하느님 말씀의 속뜻도 깨달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 외적인 것에 치중하였다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까지 따르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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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아는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근무하는 성당으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차로 모셔다드리는데, 수녀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더군요.
1년 전에 제가 수녀님께 이야기한 첫 세례 때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이야기를 성당 예비자들에게 했더니 그 가운데 한 자매가 나중에 당신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수녀님, 정말 하느님께서 세례 때의 첫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가 봐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의 집에 차가 필요해서 ‘하느님, 차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들어주세요.’ 하고 기도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며칠 전에 차가 하나 생겼습니다.
시숙네가 새 차를 사면서 쓰던 차를 저희에게 그냥 주었거든요. 그런데 수녀님 이럴 줄 알았으면 새 차를 하나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할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중고차가 아닌 새 차가 하나 생겼을 텐데 말이예요.”
사순절을 보내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 사순절이 음식을 적게 먹고, 술을 줄이며, TV를 적게 보며 절제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순절을 보내는 다른 방법은 더 많이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사순절 동안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할 수만 있다면, 사순절 동안 음식이나 술이나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을 줄이는 것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더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사순절을 더 온전하게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한 것이고, 술을 적게 하는 것은 집에 일찍 들어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고, TV 보는 시간을 줄이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혹은 사순절을 잘 지내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혹은 끊어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 역시 여전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율법에 메여 있는 것이고, 여전히 악을 미워하라는 율법에 메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너머 형제들에게 성을 내는 것조차 바보라고 부르는 것조차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혹은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가에 관한 것을 넘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더 기쁘게 할 수 있는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더 큰 어떤 것을 청하는 것이 인간적인 마음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바치는 사순의 희생과 보속 역시 하지 말아야할 어떤 규칙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느님 당신과 다른 이의 기쁨이 되는 것인지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자신의 더 큰 기쁨을 위해 오늘을 봉헌합니다. “주님, 당신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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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은 하느님께 충실한 것을 말하고, 히브리 말로 ‘충실함’은 ‘믿음’과 같은 말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 곧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로운 길인지 설명해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글자 그대로만 지키는 이들이 아니라,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하며 더욱 온전히 지키는 이들입니다.
사실, 형제들에게 성을 내고 바보라고 욕하는 이들, 형제들에게 원망과 원한을 사는 이들, 그래서 형제들에게 잘못하여 고소를 당하는 이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이들입니다. 형제가 고통을 느끼게 하고, 어려움을 겪게 하는, 형제의 마음을 죽이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이들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는 한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제물은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봉독한 에제키엘 예언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더라도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는 길을 되돌려 하느님께 충실히 살아간다면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오늘 말씀들을 봉독하면서 행여 형제에게 원한을 산 이들, 고소당한 이들이 있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함으로써 구원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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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있는 사람을 있게>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있는 사람을 있게>
미우나 고우나
곁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 스스로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있게 하시니
있는 것이지요
비록 내 눈에
사람같이 안 보여도
어찌 없는 듯
대할 수 있을까요
비록 내 마음에
사람 같지 않아도
어찌 마음에서
없앨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있게 하시어
있는 사람이니
그 사람의 있음을
내가 고이 지켜줘야지요
나는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의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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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뿌리를 다스려라>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 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6,6)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용서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해도 마음 한 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귀가 둘이고, 눈이 둘인데 입은 하나일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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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심리학자 줄리안 홀트 룬스태드가 동료 학자들과 다음과 같은 조사 연구를 했습니다. 암, 심혈관 질환, 신부전 같은 만성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의 비율과 이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종합 분석한 것입니다. 그 결과 힘이 되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있으면 사망 위험성이 50%까지 감소한다는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담배를 끊어서 얻는 효과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체질량지수(BMI)를 건강하게 유지할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효과였습니다.
이렇게 이웃은 나를 지켜주는 지원 체계였습니다. 건강과 행복, 삶의 만족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이웃으로 이루어진 양질의 사회적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세상 안에서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 도움 등의 유용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뇌의 신경화학 물질이 면역계의 효율적인 기능을 촉진하기 때문에 건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건강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운동하고, 또 몸에 좋다는 각종 영양제를 복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영양제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이 단순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금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열심함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열심한 생활로 그 모습을 통해서도 다른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열심,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령하시지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욕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는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하늘 나라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인 나의 이웃이 이 세상 안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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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 사랑만이 예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제자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얘기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하느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사는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에게 가서 화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은 회개하고 형제와는 화해하는 것, 이것이 자기가 살뿐 아니라 공생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비유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러 가는 사람 얘깁니다. 그런데 형제가 자기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제 생각에 이 생각이 난 것만 해도 이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원망스러운 사람은 생각나도 원망하는 사람은 생각지 못하니 말입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형제가 자기를 원망할 짓을 한 사람이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면서 형제가 생각이 난 사람이며, 이런 상태에서 하느님께 나아가 제물을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결코 그 예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형제에게 몹쓸 짓을 하고 바치는 예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동생 것을 뺏어서 부모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자기만 잘 보이고 자기만 살겠다고 바치는 뇌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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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를 찾아뵈러 가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하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기도는 충실히 하면서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얘기가 담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지만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높이 쌓다가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 계시어 거기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사람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을 만나려면 단절된 관계를 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화해하라고 하신다고 화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스스로 화해하려고 해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지내자고 찾아가 악수를 했는데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和解, 이 한자어의 뜻을 잘 보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和하려면 먼저 解를 해야 합니다. 화해란 다 풀어버리고 잘 지내는 것인데 그와 잘 지내기에 앞서ㅈ내 안의 풀 것을 다 풀어야 합니다. 무엇을 풀어야 합니까?
미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복수의 감정. 질투의 감정. 서운한 감정.한 마디로 내 안의 모든 惡感情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감정을 갖게 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에게 나의 감정 해소를 책임지우지 말고 나의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할 때 나에게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더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분노의 화살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그런 말에 서운했던 나의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말에 상처받았던 나의 허약함을 진정 강인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계략에 넘어갔던 나의 허술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전에는 그로 인해 내가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로 인해 넓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져 더 이상 그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진정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 하느님 사랑으로 충분하여 그와 상관없이 진정 행복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삶에서 그를 배제하고 오직 기도만 하며 하느님과만 잘 지내려던 나에서 이제 그와도 잘 지내고 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와 함께 예물을 봉헌하러 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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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의로움”은 무엇인가?>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 에제키엘의 가르침-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130,3-4)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중 “참행복”, “세상의 소금과 빛”에 이어 당신과 율법 관계에 대해 밝히기 시작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순시기를 맞이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신한 가르침이 됩니다. 다음 서두 말씀으로 시작되는 6개 대당명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결코’입니다. 평범해선 안되고 뭔가 특별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주님은 구체적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결국은 한결같이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저는 이에 앞서 현대의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최근 인터뷰중 인상적인 내용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자적인 진보적 교황님이기에 내적으로 반대파들에게 겪는 고통도 참으로 크겠다 싶었습니다.
1.“바티칸 공의회는 단지 교회쇄신의 표지만은 아니다. 그것은 쇄신의 문제일뿐 아니라, 교회를 더욱더 살리게 하라는 부르심이다. 공의회는 쇄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새롭게 한다. 교회는 언제나 앞으로 향해 가고 있는 어머니이시다. 공의회는 더 큰 성숙에로, 더욱 시대의 표징과 일치되도록 교회의 문을 연 것이다.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가장 전통적이며서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문헌이다. 전통적이며 언제나 현대적이다. 전통은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금요강론 사회교리 공부시 독일의 세계적 신학자 칼 라너의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교회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입니다. 그런데 그 노파는 나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도 자기 어머니를 때리지는 않습니다.”
정말 연민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노모와 같은 어머니 교회라는 것입니다. 제 얼굴 사진을 보면 예전과 달리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교회 어머니의 자글자글한 얼굴에 위로를 받습니다.
2.교황님의 전쟁에 대한 견해입니다. 강대국 들의 전쟁의 이면에는 얼마나 사악한 악이 도사리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는 현대의 예언자 교황님입니다.
“내 양친은 ‘전쟁은 미친짓이다” 자주 말씀하시곤 하셨다.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안마, 시리아(무려 13년 동안이다!), 예멘 등, 거기서 아이들은 교육도 빵도 없고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 나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아이들을 부모와 함께 많이 만났다. 나는 거기서 웃는 아이들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왜 이들은 웃지 않는가? 이들을 무엇을 보았는가? 그것은 공포스러운, 정말 공포스러운 장면일 것이다.
세계는 사실상 전쟁상태에 있다. 이에 관하여 비난받아져야 할 것이 거대한 무기공장들이다. 부자 나라가 약해질 때, 그것은 수행해야할 전쟁을 필요로 한다는 말들이 있으니 다시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기들이 이를 마련해 준다.”
3.“전례를 거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또 교회는 성전안에 숨지 않는다. 성전안에 정착하는 것은 올바른 예배방식이 아니다. 미사거행은 결과를 갖는다. 빵을 떼어 주는 것, 이것은 사회적 의무를, 다른이들을 돌봐야함을 뜻한다. 기도와 실천은 함께 간다. 하느님 경배와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한 섬김은 함께 간다. 우리는 각 형제자매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이다.”
4.“경제는 사회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시장경제에 하나 덧붙여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회적’ 시장 경제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적’이라는 말마디를 명심해야한다. 지금 경제 위기는 정말 심각하여 전율할 정도다. 세계 대다수 사람들이 충분히 먹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다. 부(富)는 거대한 사업을 하는, 때로 착취하는 소수의 손안에 있다. 경제는 언제나 사회적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바로 현대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88세 노교황님의 예언자적 말씀이요, 이를 실천함이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의로움임일 것입니다. 교회헌장은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이 염원한다”로 시작합니다. 바로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대당명제 첫째 화내지 말라 하십니다.
살인에 앞서 간접적 살인과도 같은 형제에게 성내는 일이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 비방하는 일체의 무시하는 말마디를 엄금하라 하십니다. 정말 대죄는 이런 형제들에 대한 무시나 멸시이니 애당초 마음의 순결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정말 대죄는 둘이니 절망과 무시입니다. 자기에 절망하면 자살에 이르고 타인을 무시하면 타살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 예물을 바치기전 형제와 우선 화해해야 하며, 고소한 자와도 재판정에 가기전 타협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비상한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즉시 관계를 원상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즉각적인 회개의 실천이야말로 사랑의 지혜요, 진짜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1독서 예언자 에제키엘의 가르침이 참 신선합니다. 예수님께서 결정권자로서 말씀하셨다면, 에제키엘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주님의 대리자로 말씀하십니다. 결론하여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선물입니다. 지난 일에 아파하거나 후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다 헛일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나를 보십니다.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구원은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참으로 비상한 회개를 요구합니다. 과거의 죄악을 단칼에 단(斷)!, 끊어 버리는 단호하고도 비상한 회개의 선택을 결단하는 이들이 참으로 의로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이사야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해 가는 날로 세속화에 안주함으로 부패 분열되어가는 현대교회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 에제키엘, 프란치스코 교황, 모두가 온갖 고난중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했던 분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우리 모두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시편130,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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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5,20)
<하늘 나라인 천국!>
오늘 복음(마태5,20-26)은 '용서와 화해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구체적인 삶으로 따라가는 이들의 목적은 '이제와 영원히 하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반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그 자체,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문자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
우리 안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용서와 화해하는 일'일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신적 영역', 곧 결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실 때,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내가 죽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내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말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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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UvSdpd8IE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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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 26)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십자가 속에
살다가
십자가로 끝나는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약한 부분과
아픈 부분을
절실히
깨닫게 합니다.
감추어
둘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깨닫는 관계가
진정한 관계입니다.
불편한 관계는
바람직한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격성숙은
십자가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상처와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관계는
불편한
관계를 포함한
모든 삶의
상처를
포함합니다.
상처는 어긋나 있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치유의 원동력이
됩니다.
치유를 받은
사람은
갚아야 할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녕 아는
사람입니다.
최선의 길은
회개이며
회개는
십자가와 함께
걸어가는
화해와 용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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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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