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 초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씨왕후가 고국천왕과 산상왕 두 형제와 결혼한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씨왕후가 유언으로 고국천왕을 뵐 면목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을 산상왕 곁에 묻어달라고 한 것이나, 무당이 고국천왕의 말을 빌어 자신의 무덤과 산상왕-우씨왕후의 무덤 사이를 가려달라고 한 것은 형사취수제가 이제는 사회에서 지탄받는 풍속으로 변화되어 감을 말한다고 하겠지요. 아무래도 유학이 전파되면서 집안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게 되고, 유목이 아닌 농경사회로 전환되면서 형사취수제 풍습이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하겠지요.
또한 이런 견해도 있습니다. 고국천왕이 죽게 되면 당연히 우씨왕후는 그의 첫번째 동생인 발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씨왕후가 발기가 아닌 두번째 동생인 연우(산상왕)과 결혼 한 것 자체가 형사취수제 풍습을 깬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타당한지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 사회에서 형사취수제 풍습이 2세기말을 기점으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