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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묵상글 (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 프란치스칸 운동회 날, 값진 진주 하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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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프란치스칸 운동회 날
어제로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마치며 미사와 나눔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하루의 나눔뿐 아니라 행진 전체를 아우르는 나눔을 했는데
나눔 중에 한 분이 당신의 봉사 중독에 관해 얘기했고
저는 저의 포르치운쿨라 행진 중독에 관해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제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포르치운쿨라 행진은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앞둔 행진뿐 아니라
월 피정을 걷는 피정으로 하는 것이나 일상에서 가능하면 걷는 것까지
저의 모든 삶에 배어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포르치운쿨라 행진의 진정한 의미는 걷는 것 그 자체가 아니지요.
그것은 원천을 찾아가는 것이요 본래의 우리 삶을 찾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원천을 찾아가는 것은 프란치스코에게 돌아가는 것이요,
프란치스코가 처음 받은 그 은사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원천에서 벗어나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의 원천에서 벗어나 있다면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심하고 아버지께 돌아가듯,
우리의 사부인 프란치스코에게 돌아가야 하고,
그래서 포르치운쿨라 축일과 행진의 의미는 회심과 회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천에서 벗어나지 않고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도 행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방의 차원입니다.
이빨을 뽑기 위해 의사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뽑지 않기 위해 의사에게 가듯
프란치스코가 처음 받은 은사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 은사를 지금 우리 안에서 되살리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올림픽 성화를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불붙이듯
프란치스칸 은사의 불을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다시 불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 차원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차원이고 그래서 운동이어야 합니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프란치스코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에 저의 수련자들도 참여했습니다.
그중 한 형제가 걷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자연히 뒤처지게 되었는데 제가 그 형제를 앞세우고 갔습니다.
그때 다른 행진자들이 추월하여 가고
그래서 그 형제가 다시 뒤처지게 되었을 때
우리 행진의 의미를 제가 다시 상기시켰습니다.
우리에게는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같이 가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 빨리 가는 것보다 느려도 같이 가는 것을 선택한 우리이고,
그것은 이 길이 같이 가야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지요.
사실 가깝고 쉬운 길은 혼자 가는 것이 편하고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고 힘든 길은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내고
엄두를 내 출발했더라도 중도에 그만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고,
웬만큼 독종이 아니면 혼자 갈 수 없는 길이고 자주 길도 잃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가야 하고 그래서 프란치스칸 운동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이 축일이 프란치스칸 운동회 날이 되기를 비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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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값진 진주 하나”
13장에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일곱 개 중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일반 군중에게 하신 앞의 네 개의 비유와는 달리,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로 <마태오복음>에만 전해집니다.
이 비유들은 “대체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의 ‘일터인 밭’에 묻혀있고, ‘진주를 찾는 행위’ 안에 깃들어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사들여야 할’만큼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임을 깨우쳐줍니다.
오늘은 이 두 비유의 서로 다른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보물의 비유”는 품꾼 혹은 소작인이 남의 밭에 나가 일을 하던 중에, 묻혀있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일하다가 갑작스럽게 횡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을 파내게 되면 당시의 법에 따라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보물을 파내거나 몰래 가지고 돌아가지 않고, 다시 묻어두고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곧 법과 도덕을 넘어서는 이 품꾼의 태도는 보물의 가치가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보물을 얻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러라”는 강력한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마르 10,21)고 강력한 희생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한편, “진주 상인의 비유”는 우연히 밭을 갈다가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주를 가진 장사꾼이 마치 진리를 찾아 나선 수도승처럼, 더 값진 진주를 찾아 나섰다가 애써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하나”(ενα)란 ‘여럿 중의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 곧 ‘하나뿐인 유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곧 최상의 것으로서, 그것 ‘하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요, 다른 모든 것을 합해도 그 보다 낳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값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다른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도 이 값진 진주 하나를 차지하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마치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가 10,42)인 것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결국, 이 두 비유에서 지칭하는 “밭의 보물”과 “값진 진주 하나”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앞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우리는 이 “보물”, 이 “값진 진주”를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서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당신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보물, 하나뿐인 진주’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보물’이신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소중한 진주로 여기시고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진,
모든 것을 합해도 그것 보다 낳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것,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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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 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13,46).
그리고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내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이하의 부자 청년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젊은이는 결국 주님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녀 엘리사벳씨튼은 고백합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남은 피난처이십니다.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들을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영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카9,62) 내 삶의 자리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2사무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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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현미경으로 물을 보면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사실 현미경을 통해서 물을 보면 그 안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시각은 그것들을 보면서 물을 마시도록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지는 질병 중에는 지나치게 청결하기에 생기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듯이 우리의 몸은 유익한 것도, 무해한 것도, 유해한 것도 어느 정도는 함께 거주 하도록 진화 했다고 생각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순례 중에 짐 가방은 꼭 필요합니다. 버스에 짐을 넣고 내리는 것을 도와 드리다가 그만 왼쪽 손목에 무리가 갔습니다. 열정도 좋지만 요령이 필요한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별 것 아니겠지 생각하며 지냈는데 손목이 점점 아파왔습니다. 왼손의 고마움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병마개를 열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왼손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컴퓨터의 자판을 입력하는 데도 왼손의 도움은 컸습니다.
우리의 귀도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귀도 피곤한지 잘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손목이 아파서 일찍 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전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렸습니다. 벽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거실에 있는 냉장고의 소음도 들었습니다. 이왕 이리 된 것 잠을 뒤척이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차피 곧 새벽은 올 것이고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에 몰두 했습니다. 그러니 두 가지 것이 마음에서 떠났습니다. 손목이 아픈 것에 대한 짜증이 사라졌습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도, 냉장고의 소음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악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이야기하였고,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자리에 계시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물건과 아버지의 자리는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는 마치 ‘성소(聖所)’와 같았습니다.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어쩌면 이해 못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모세가 너울을 쓴 것도 어찌 보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은퇴하신 원로 신부님과의 대화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 같습니다. 들어야 할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습니다. 신문의 지면을 보고서 노부부가 가슴에 전대를 차고 오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큰 금액을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대를 차고 오시는 분은 별로 없지만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눔’에 함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소개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을 보고 많은 분들이 정성을 보내 주십니다. 분기별로 소개를 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능기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악가들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건축가들이 홀로 사는 어르신들의 집을 새로 수리해 주기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이 나환자 마을을 방문해서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성무에서는 은퇴하였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시는 신부님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 중에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외로운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왼손목이 아파 잠 못 이룬 밤에 저도 생각의 ‘재능기부’를 잠시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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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둔 보물과 같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밭은 보물을 숨겨 두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씨앗을 뿌리고 소출을 거두는 곳입니다. 또한 밭에 숨겨놓은 보물은 좀처럼 쉽게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밭은 이미 많은 작물과 동시에 풀들이 들어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밭과 같다면 그 밭에는 이미 뿌려놓은 씨앗과 열매들, 그리고 원하지 않는 잡초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길러낸 열매들에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라는 밭의 열매들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그 소출을 우리 노력의 결실이고 앞으로의 우리 미래를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밭에 보물이 있다고 합니다. 열매가 아닌 보물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보물을 우리가 숨겨 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보물을 숨겨 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 보물의 이름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결실, 즉 열매를 바라보며, 그곳에서 즐거움을 얻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 삶에 다른 보물을 숨겨 두셨습니다. 우리가 얻고 즐거워하는 열매는 금방 사라질 것들이지만 주님께서 숨겨 둔 하늘나라라는 보물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삶의 밭에 숨겨 둔 하늘나라를 찾아보십시오. 분명 주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를 찾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늘나라를 찾은 많은 성인을 통해 우리는 그 가치를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하며 어떤 것으로도 대체 할 수 없는 것인지 말입니다.
성실함을 무기로….
이곳 갑곶순교성지는 삼면이 숲이고 산입니다.
그래서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새들이 노니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가끔은 신기한 야생동물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름에는 삼면이 숲이고 산인 것이
조금 버겁게 느껴집니다.
며칠 전 풀을 베어냈는데,
돌아보면 다시 그 자리에 또 다른 풀이 자라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실함을 무기로 또 베어내고 또 베어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 한구석도 여름철 풀이 자라는 것처럼
원하지 않는 나쁜 습관이나 버릇이
베어내고 또 베어내도
다시 자라날지 모릅니다.
성실함을 무기로 다시 베어내세요. 그러다 보면 겨울이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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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너 변했어.”
상대방이 인상 쓰며 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을 듣는 대상인 본인은 어떻습니까? 자기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났으니 생물학적 변화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내 마음이, 내 성격이 변했다고 말하는데, 도저히 인정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사랑 호르몬이라고도 부르는 도파민의 분비는 남성의 경우에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를 향해 “변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호르몬 분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정확하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 역시 계속해서 호르몬이 변합니다.
외적 변화뿐 아니라 내적 변화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잘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주님께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주님의 평화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해방에 맞춥니다. 이런 분명한 기준에서 잘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짧지만 강력한 내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와 같다고 하시지요. 소비를 촉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명품과 같은 귀하고 비싼 물건에 욕심을 내어도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사실 비윤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종이 주인의 밭에서 일하다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물을 주인에게 갖다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던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인에게도 또 경찰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절대 윤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와 같으므로, 이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전혀 관심이 없었어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습니까? 그 가치를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며, 반드시 가야 할 곳입니다. 남의 이목을 신경 쓰고, 체면을 따질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변화입니다. 하늘 나라를 최고로 여기는 마음의 변화가 가장 필요할 때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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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어온 이들이 보통 사람과 달랐던 점은 지성이나 힘 또는 높은 경지의 사상도 아니며 오직 보다 원대한 야망, 그 하나뿐이었다.(오리아나 팔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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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선물, 참보물
-“찾으라, 발견하라, 반기라”-
얼마전 어느 자매의 안부 인사를 받고 고마움에 보라색 마가렛꽃 사진과 함께 즉시 보내드린 답신입니다.
“참 너무 덥네요. 안부 인사 감사합니다.
주님의 참보물인 자매님!
마가렛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어 어제 형수님의 방문후 보낸 감사의 카톡 메시지입니다. 제가 수도원 입회전 10여년의 교편생활중 형님댁에 머물 때 온갖 도움을 주신 분이며 수도원 입회후 종신서원, 사제서품은 물론 지금까지 수도여정에 많은 도움을 주신 참 고마운 분입니다.
“형수님께!
오늘 방문해 주시니 힘과 격려가 됩니다. 우리 집안의 살아 있는 참보물이시니 주님의 은총중에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즐겨 바치며 많은 분들과 나눈 다음의 행복기도입니다. ‘선물’을 ‘보물’로 바꾸니 그대로 통해 기분이 좋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보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유일한 최고의 참보물은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인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참으로 눈이 열릴 때 참선물이자 참보물 그리스도의 발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무수한 참선물이자 참보물인 형제자매들임을 깨닫습니다. 요즈음 새롭게 깨달은 참 반갑고도 고마운 깨달음입니다.
이런 참선물, 참보물 형제자매들과 도반이 되어 주님 안에서 영적우정을 나누니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형제자매들뿐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써서 나눴던 짧고 긴 울림을 줬던 무수한 시(詩)들 역시 주님을 반사하는 선물이자 보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하루하루 설렘으로 시작하는 보물찾기 행복한 인생 여정인지요!
우리가 찾는 참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만나는 살아 계신 참보물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발견하여 친교가 깊어질 때 주님을 닮아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평화와 행복’의 사람으로 변모되가니 얼마나 큰 축복 인생인지요!
“SH행복연구소”
기발한 명함을 받고 감탄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소장 자매의 설명을 들으니 그 샘솟는 열정이 참 사랑스러웠습니다. S(spirituality;영성)&H(healing;치유) 행복연구소, 얼마나 멋진 명칭인지요! 바로 이 연구소의 진짜 소장은 우리의 참보물이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참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날 때, 영성과 치유, 행복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줍니다. 우리의 참행복이 달린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참 고마운 비유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과연 여기 참보물, 참진주에 해당될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외에 누가 있겠는지요! 가짜 보물들이 가짝 진주들이 범람하는 세상에, 가짜 보물을, 가짜 진주를 참보물, 참진주로 착각한 인생이라면 그 얼마나 허망하고 쓸쓸하겠는지요! 그 참보물의 식별 기준은 무엇이겠는지요? 참으로 참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발견한 분이라면 샘솟는 참희망에 참기쁨, 참평화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니 참 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발견하십시오, 반기십시오, 바로 지난 주일 교황님의 강론 요지이기도 합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찾고 발견하고 반겨야 할 참보물, 참진주인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바로 수도자의 정의입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사람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참행복, 참보물인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지금 여기 공동체가, 내 마음이 바로 주님 보물이 묻힌 보물밭입니다. 우연한 발견인 듯 하지만 은총의 발견이요 평상시 끊임없이 찾았기에 보물의 발견입니다. 결코 값싼 보물의 발견도, 진주의 발견도 없습니다.
“찾아라(seek,) 발견하라(find), 반기라(welcome)”
온힘을 다해 참보물인, 참진주인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의 발견이요 반기는 삶입니다. 오늘 시나이 산에서 참보물인 주님을 만나 모세가 우리에게는 주님 찾는 삶의 빛나는 모범이 됩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과 행복으로 눈이 부셔 보기 힘들 정도로 모세의 얼굴은 빛났기에 백성들은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다 합니다.
참보물인 주님을 만나 십계명의 참선물을 받은 모세입니다.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중 참보물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등 온갖 필요한 선물을 받습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 마지막 대목이 은혜롭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자기 얼굴을 다시 너울로 가리곤 하였다.’
저는 어제 재미있고 심오한 글을 읽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너울로 가렸듯이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은 공동체의 너울로 당신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신비스런 진리입니다. 이제 부활하시어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참보물인 파스카의 주님은 공동체의 너울을 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순간적인 은총의 깨달음으로 눈이 열릴 때, 공동체의 너울이 순간 벗겨지면서 발견되는 파스카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참보물인 형제자매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들 하나하나가 참보물인 주님의 얼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공동체의 너울이 벗겨지면서 형제들 하나하나가 참보물 주님의 얼굴임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의 성체와 하나되어 날로 참보물인 주님을 닮아가는 형제자매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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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가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가지기보다 베푸는 사람을
따뜻하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다스리기보다 섬기는 사람을
애틋하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가르기보다 잇는 사람을
아름답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누르기보다 떠받치는 사람을
정성스레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밀치기보다 보듬는 사람을
부드럽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부수기보다 이루는 사람을
발랄하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죽이기보다 살리는 사람을
간절하게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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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포르시운쿨라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서 한 말의 시작은
'기뻐하여라'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당시에 사용된 인사말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많은 표현 가운데에서
천사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 말에 긍정적인 답이 나오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네, 기뻐하겠습니다.'라는 말보다는
무엇이 기쁜지, 무엇을 기뻐해야 하는지
질문이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이라는 감정을
어떤 이유와 연결하곤 합니다.
노력한 것이 좋은 결실을 맺었으니
기뻐해야 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잘 진행되었으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이 당연한 듯 보이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노력한 것이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에 조건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건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그 조건을 채우기가 쉽지 않은 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채우기 어려운 것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기쁨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어떤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기쁨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더 나아가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면
마리아는 처녀로 임신하게 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텐데도
그것을 알면서도
천사는 마리아에게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기쁨도 이렇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냥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굳이 여기에 기쁨의 이유를 말한다면
우리도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라는 것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은총과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이유를 찾기 보다는
'네, 기뻐하겠습니다.
네 기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받는 사람답게
사랑 안에서
기쁨 안에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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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이 비유의 명백한 뜻과 영적 의미
밭으로 오는 사람, 다시 말해, 성경으로 오는 사람이나 또는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께로 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든 성경 안에서든, 감추어진 보물인 지혜를 찾습니다. 밭을 사기 위해 돌아가고, 성경을 뒤적이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보물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물을 발견하면, 성경의 비밀스러운 뜻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모든 이의 눈에 띄면 위험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숨깁니다.
그는 그것을 감추고 자리를 뜹니다. 이제 그는 처음에 유대인들에게 맡겨진(로l마 3,2 참조) 하느님의 계시를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밭, 곧 성경을 살까 하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 배운 사람이 산 밭, 곧 하느님의 나라는 또 다른 바유에 따르면, 처음 그것을 받은 이들에게서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는 포도밭(마태 21,43 참조)과 같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믿음 안에서 그 밭을 산 사람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것들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악의 원천이었습니다.
감추어진 보물이 있는 밭이 그리스도라면, 여러분도 똑같이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말하지면 다른 식으로, 자신의 재산을 팔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재산을 팔고 버린 대신 조력자 하느님으로부터 고귀
한 다짐을 받은 그들은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그에 합당한 비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49. 번번이 눈에서 사라지는 예수
예수님은 정말 어떤 분일까?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졌지만 그분의 생생한 모습을 밝히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고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평가했다. 예수님을 이리저리 해석해 봐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밝힐 수가 없다. 어떤 것이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인지 어떤 것이 그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 공동체의 해석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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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제5주간 영적 성찰 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서 전체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성찰 주간>
생태 실천 성찰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봉사의 시간을 할애합니까?
봉사란 자신의 죄를 파괴시키고 심령(mind)을 정화시키는 영적훈련이다. 참된 봉사란 봉사한다는 생각조차도 잊어버리고 하는 봉사이다. 또한 일에 대한 결과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그 이후의 어떤 것이라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리는 봉사가 참된 봉사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종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라고 칭한다. 종과 도구는 그냥 주인이 원하는 것을 기쁘게 한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에도 ‘저는 해야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주인에게 고백한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겸손한 종을 들어 높여 주시는 분이시다. 성모 마리아는 수태고지에서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함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내 놓는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마리아는 임신한 몸으로 산후의 고통을 겪게 될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 시중을 들게 된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났을 때 마리아는 기뻐 마니피캇을 노래했다. “하느님은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가난한 이를 들어 높이셨다…….”
여러분들이 하는 청소라든지 형제자매들을 섬기는 일이라든지 또한 공부를 하는 것도 다 봉사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는데…….’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자세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했노라고, 일의 결과가 성공적이든, 실패한 것이든, 오직 하느님의 영광이었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바로 참된 봉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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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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