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지역 강화기독교역사탐방 자료
내 영혼에 활기를 주는 신앙 여행(교동섬)
어떻게 하면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육적인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을줄 압니다. 너무 가까운 곳을 가자니 기분이 안살고, 너무 먼곳을 가기엔 시간과 체력이 모자랍니다. 이럴바에는 배타고 가는 해외여행을 계획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냥 놀러가는 여행이 아니라 ‘성지순례’를 간다면 내 영혼에 활기를 주는 여름 안식( 安息, 편하게 숨쉰다)이 될 것입니다.
김포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달려와서 강화 대교를 건너 2Km를 직진하고 보면 눈 앞에 강화읍 삼거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좌편에는 인삼센터가 있는데 그곳은 눈으로 확인만 하시고 계속 직전해서 인화리, 교동 방면으로 18Km를 달려가면 강화-교동연육교가 나옴니다. 우편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다리를 건너면 교동섬이 기다립니다.
고려 시대부터 교동은 중앙 정계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귀양지로 각광을 받아왔습니다. 더구나 아무나 올 수 없었고, 특별한 귀빈들만 오는 곳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희종 임금, 조선시대에는 연산군, 광해군, 임해군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거물들이 교동으로 살러왔습니다.
강화도에 첫 교회가 세워진 때는 1893년입니다. 그로부터 6년 후 교동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1899년 강화 홍의교회에 다니던 권신일은 아내 황브르스길라와 상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 이사하는 것이 우리에게 고난이 될 수 도 있소, 그리고 하루 한끼만 먹게 된다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요”하며 권신일은 교동선교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 했습니다.
1. 천국으로 가는 연륙교, 남산포
강화도에서 권신일 부부를 싣고 온 배는 읍내리 남산포에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내린 자동차의 첫 목적지도 남산포입니다. 지금은 겨우 몇 척의 배들이 선착장을 지키고 있는 한적한 포구이지만 109년 전 읍내리는 교동의 중심부였고 남산포는 교동 사람들을 강화와 인천으로 통하게 하는 큰 포구였습니다. 더구나 조선 중기에는 삼도수군 통제영(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이 있었던 군사기지였습니다. 더 먼 옛날 고려시대에는 중국과 고려를 이어주는 바다 위 징검다리였습니다. 중국 사신들은 이곳 남산포에 내려서 하룻 밤을 자고 난 뒤에 개성으로 들어갔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이곳 남산포 사신당에서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원한 뒤에 중국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수군통제영과 사신당 안내문이 서 있는 그곳에서 권신일은 사랑방을 찾아갔고 황브르스길라는 우물가로 가서 전도했습니다. 그 때부터 남산포는 교동과 천국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교동에 들어 온지 1년 만에 10가정이 예수를 영접하였고 1901년엔 읍내리,인사리,서한리 세 곳에 예배처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100년을 넘긴 현재 교동엔 12개의 교회가 있고, 교동인구 3200명 중 700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 연산군도 마시지 못했던 생명의 물, 예수
권신일이 세운 교회 터를 찾으려면 읍내리 안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동 읍성으로 가서 차를 세웠놓고 약 5분 정도 걸어야 합니다. 원래는 350미터에 이르는 성벽이 있었을 텐데 현재는 성문 하나만 달랑 남아서 쑥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성문을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옛 경찰서 자리가 나옴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교동의 기독교인들이 만세 시위를 부르다가 연행되었던 장소, 지금은 경찰서 건물대신 빨간 기와 지붕을 한 이층 집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조선시대 교동부사 겸 삼도수군절도사가 집무를 보던 터가 있습니다.
교동교회는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넓은 대지 위에 교동교회와 동화학교(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터 바로 아래엔 연산군이 살다가 죽었음을 알려주는 돌비석과 우물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그 우물을 보면서 연산군이 물을 길어먹던 우물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물 중간에서 자라나기 시작해서 높이 자라난 오동나무를 연산군의 넋이라고 호들갑을 떨곤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들에 의하면 100년 전에 교인들이 판 우물이라고 합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써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고,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였던 폭군 연산, 그는 교동에 위리안치(죄인이 사는 집을 가시 울타리로 두르고 외부인과의 연락을 막던 형벌)되어 살다가 3개월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한 평생 미움과 증오로 살았고, 죽을 때도 세상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던 연산군, 그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산군의 적거지(적거는 죄인이란 뜻) 오른편에 주의 몸된 제단을 세웠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의 우물을 파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사라졌고, 세상의 왕은 영원한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늘로서 내려온 예수님은 척박한 교동섬에 생명수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점심은 뭘로 할까요? 교동에는 33개의 식당들이 있습니다.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동원장(032- 933-7862) 와 풍년식당(032- 932-4629)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짜장면, 짬뽕, 돈까스를 드실분들은 동원장, 냉면, 만두전골, 부대찌개 종류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풍년식당을 권하고 싶습니다.
3.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인사교회
다음에는 인사리로 가야 합니다. 고려시대 희종과 조선의 광해군이 귀양살이를 했던 경원전을 잠깐 드렸다가 인사리에 간다해도 차로 가면 약 25분 정도. 인사리 마을에 인사교회는 정말 사연이 많은 교회입니다. 두 번 문을 닫았고 세 번 창립된 교회가 인사교회입니다. 지금 인사교회는 1968년에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1901년 인사리 예배처로 시작되었다가 1922년 1차로 폐쇄되었습니다. 그랬다가 1930년 황봉익을 비롯한 열심있는 교인들의 노력에 의해서 재 창립되었지만 1940년 대에 또 폐쇄되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세 번째로 창립되었습니다.
초창기 인사리 교인들의 믿음은 지독했습니다. 황우만은 예수를 믿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황씨 집안에서 제일 먼저 신앙을 가졌다 해서 초신(初信) 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그의 아버지가 칼을 들고 와서 “예수 믿고 죽을테냐? 안믿고 살테냐”하면서 칼을 목에 들이대며 위협했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황철신은 밤마다 집안 식구들에게 예수 귀신을 쫒아낸다며 복숭아 가지로 매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몸에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고 합니다. 후에는 전도부인이 되어서 주변 섬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아내를 위해서 배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방마리아는 남편에 매를 맞고 친정으로 좇겨났지만 결국엔 남편과 친정 식구들 모두를 구원시켰습니다.
인사리에서는 1930년 폐쇄된 교회를 다시 시작한 황봉익 전도사의 집과 두 번째 교회 터(지금은 함석으로 만든 창고 건물)를 볼 수 있습니다. 황봉익의 집은 1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가려고 배를 타고 일본까지 갔지만, 몸이 약해서 다시 돌아 온 황봉익이 수 년간 개성에서 일하고 벌어온 돈으로 지은 집이거든요. 인사리에서 보이는 곳이 바로 북한의 황해도 연백평야입니다. 인사리에 부흥회 오신 강사님이 주무시려고 누웠다가“ 인사리 교회 부흥회 오신 아무개 목사님 환영합니다” 라고 들려오는 대남방송에 밤잠을 설쳤다는 추억(?)의 장소가 인사리입니다.
4. 남녀가 유별난 교회, 상룡리 예배당
마지막으로 상룡리 옛 예배당 건물을 보고가야 합니다. 1933년 읍내리에 있던 교동교회가 상룡리로 이전을 했습니다. 그 때 교회 건물을 그대로 옮겨와서 그대로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 한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예날엔 초가 지붕이었지만 지금은 칼라 강판으로 된 지붕입니다. 교회 건물은 전통적인 한옥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문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남자가, 다른 한 편은 여자가 들어가는 문입니다. 100년 전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예배당 안에서는 커튼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5. 교동에 살았던 세종대왕
상룡리 예배당 앞에는 크고 파란 물통 하나가 놓여있는 공터가 있습니다. 교동교회 교인이었던 박두성의 집이 있던 자리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찾아 오는 곳입니다. 박두성은 맹인들이 세종대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박두성은 맹인들을 위한 한글점자(훈맹정음)를 만들었고, 맹인들을 위해서 점자로 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만들어 발행하였습니다. 말 년에 그의 건강(시력)을 걱정해 주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 나이 이미 예순 여덟, 산들 얼마나 살겠소.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선물로 이 성경전서만은 꼭 우리 아이들(맹인들) 에게 물려주고 싶소. 맹인들은 반드시 정신적인 지주가 있어야 하오. .........
앞 못보는 맹인들이 내 점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면 내 실명은 문제되지 않소.“
이번 교동의 답사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탐방 코스 : 9:00 강화중앙교회 출발 → 9:30 교동대교 → 인사리 황인섭씨 고택 → 상룡리 예배당과 송암 박두성 생가터 → 읍내리 향교 → 대룡리 (점심) → 삼도수군터와 계류석 → 교동읍성과 황룡우물 → 교동부사터와 일본주재소터 → 연산군 적거지와 동진포 →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