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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운림산방 珍島 雲林山房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후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이 기거한 곳이다.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구름 숲을 이루었다 하여
운림산방이라 이름을 붙이었다.
이 곳은 1856년에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 허련이
고향인 이 곳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낸 곳이다.
허련의 문집인 소치실록(小痴實錄)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고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신선들이 사는 곳처럼 꾸몄다고 한다.
소치 허련 이후에도 이 곳에서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灐)과
손자인 남롱(南農) 허건(許楗) 등
후손들이 대를 이어 화풍을 이어갔다.
현재 이 곳은 남농 허건에 의해서
1982년부터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남농 허건 작가의 작품
이 곳 일대는 역사문화유산인
남종화의 산실인 운림산방과
자연유산인 진도쌍계사 상록수림
천연기념물(제107호)이 있는 첨찰산(尖察山)이 어우러저
역사와 경관의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소치 허련은 진도음 쌍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詩)서(書)화(畵)가
뛰어난 삼절(三絶)로 칭송된다.
20대에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을 익혔다.
윤두서(尹斗緖) : 1668년- 1715년
윤선도(尹善道)의 증손.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
1839년 현종5년에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에서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서화(書畵) 수업을 받았다.
1846년인 현종12년에는 왕에게 그림을 바치었다.
이 뒤부터 궁중을 드나들며
왕 앞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한편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며 시 서 화의 활동을 지속했다.
허련의 호는 김정희가 지어준 것으로
원나라 4대 화가중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 1260-1354)을 대치(大痴)라 하는데
이에 빗대어 소치(小痴)라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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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문천님ㅁ
고맙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운림산방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사람중에는 수암 정만조 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수암 정만조는
제가 아는 바가 없어
검색해 봤더니 자료가 잡히질 않습니다.
반면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가 떠올라
소개합니다..
정만조 : 1858(철종 9)~1936
자(字)는 대경(大卿), 호(號)는 무정(茂亭), 기우(基雨)의 아들,
위당 (爲堂) 인보(寅普)의 아버지. 강 위(姜 瑋)의 문인.
한양 출신. 1884년 (고종 21) 교섭통상아문 주사(交涉通商衙門主事)가 되고,
1889년 알 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참의(禮曹參議)․승지 (承旨)를 거쳐
1894년 내부 참의(內部參議)가 되고,
궁내부 참의관(宮 內府參議官)을 지냈다.
1896년(건양 1) 무고(誣告)를 받고
진도(珍島)의 금갑도(金甲島)란 섬에 유배되었다가
12 년만에 사면되자
관계에 복귀되어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이 되었다.
진도 본섬은 아니지만
12년간 지냈다면
운림산방 연관을 지울 수도 있겠습니다.
확실한 답변을 못드려
죄송합니다.
덕분에 왜 소치라 했는지를 알게되었고, 김정희와의 관계도 새로 알게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새한도만 유명한줄 알았는데 글씨말고 그림도 잘 그렸군요.
장마와 무더위에
잘지 내시지요?
6월 하순에 갔었는데
관광객들이 많지는 않도
드문드문 찾아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잘 감상합니다.
즐감합니다.
가리스님
반갑습니다.
지루한 장마 속
무더운 더위에
지내시기도
힘들 턴데
답글 주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