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학기 6주차 과제
“누군가의 회고록 (1)”
정 우 조
저는 어릴 적부터 외모가 수려했고 키가 컸습니다. 10대 중반에 이미 주변 어른들의 신장을 훌쩍 뛰어넘었고, 옆 마을에까지 제 소문이 퍼질 정도였지요. 아벡과 에벤에셀 지역에서 일어난 블레셋과의 첫 번째 국지전에서 저의 큰 키는 꽤 유용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베냐민 진영의 기수로 뽑혔고, 저는 오른손이 그려진 그 깃발을 열심히 흔들며 전장을 종횡무진 내달렸답니다. 철이라는 무시무시한 금속으로 만든 병기들로 무장한 블레셋 군대였지만 제가 흔들어젖히는 거대한 깃발 앞에 움찔하는 그들의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이들 역시 장대한 기골들이었음에도 저의 용맹은 어딘가 특출난 면모가 있었던 것 같아요. 비록 그 전투는 이스라엘 연맹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제 무용은 인정받아 연맹군 대장 홉니의 무기 드는 자로 임명되는 명예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이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연맹군 총사령관 홉니와 그의 동생 비느하스는 야웨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에 대동하는 초강수를 뒀고, 이는 엄청난 환호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홉니의 최측근이었던 저는 그 결정이 제사장 형제의 용단이 아니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장로들에게서 나온 정치적 합의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요.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두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블레셋 군대의 내륙 침공을 저지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전장에 갖고 나올 생각을 하다니! 저는 어이가 없었지만 당시 일개 호위병에 불과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제게 매우 잘해줬던 홉니 제사장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빌었습니다.
홉니가 그의 잘린 오른팔을 집어든 채, 모든 것을 포기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 기억납니다. 절 향해 “빨리 도망가 이 멍청아!”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의 가슴팍을 꿰뚫고 튀어나온 칼날도 생생하게 떠오르고요. 그 검은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 있던 홉니의 흉갑을 단번에 뚫었는데도 끝이나 날 부분이 전혀 상하지 않고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철제검과 단창들이 블레셋의 강함을 보여주는 증거였지요.
고개를 돌리던 저는 저와 비슷한 연배의 어린 거인 - 죄송합니다. 네피림이라는 말 외에 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 장수의 우악한 왼손에 들린 비느하스의 머리를 목격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햐얘졌고, 저는 심장이 터지도록 내달렸습니다. 불과 그 전날까지 저와 웃고 떠들던 전우들의 끔찍한 단말마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돌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새 홉니의 청동검조차 잃어버린 상태로, 온 몸에 먼지와 피를 뒤집어쓰고 저는 ‘실로’에 도착했습니다. 훗날 가족들은 제가 그 비참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이라 말해줬지만, 글쎄요, 차라리 저도 그 날 홉니 옆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요.
정신줄을 놓고 내달렸기에 저는 그만 성문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전투의 경과 보고를 기다리던 지파 연맹의 막료들, 무엇보다 대제사장 엘리가 그 성문에 앉아 절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압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저는 시장 어귀에 모여있는 군중들을 보자마자 울부짖으며 모두가 죽었다고 외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 말만큼은 해선 안 되는데, 언약궤를 블레셋 군에게 빼앗겼다는 말까지 해버렸지요. 곧 그 성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울며 불며 제 팔을 붙잡고 자기 아들의 생사를 알려달라던 과일장사 아주머니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하얗게 질린 제 뺨을 때리며 어서 정신차리고 성문으로 가 보고하라는 말을 해준 시장 경비대장이 고마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발 있는 말보다 더 빠르다던가요? 제가 당도하기도 전에 이미 소식은 성문에 모여있던 각 지파의 장로들, 그리고 대제사장 엘리의 귀에 들어가버렸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소중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전사 소식에도 근심하며 고개를 흔들 뿐 묵묵히 듣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내용에 이르자 그 큰 얼굴이 새파래졌다고 합니다. 그는 곧 실신했고, 불행하게도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비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리던 사사이자, 당대 최고의 종교권력자였던 사람이 한순간에 절명해버린 것이지요.
자신의 두 아들이 전쟁통에 붙들려 죽임을 당했다는 그 끔찍한 소식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사실상 자신은 믿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던 야웨 하나님의 언약궤를 탈취당했다는 이야기에는 왜 소스라치게 놀라며 끝내 실신하고 만 걸까요? 훗날 저는 진지하게 이 질문을 누군가에게 건넨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명료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래, 사울. 대제사장 엘리는 사실 야웨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언약궤가 전쟁터에 등장하면 반드시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네만, 오히려 엘리만큼은 더 큰 패전이 되고 말 것을 확신하는 눈치였어. 당시 엘리의 관심사는 홉니도 비느하스도 아닌, 오로지 언약궤의 행방이었지. 그는 그것이 혹여 블레셋의 손에 넘어갈까 끔찍히도 두려워하며 떨었어. 왜 그랬겠나?”
“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나 백성들과 달리, 야웨의 권능을 믿지 않았네. 하지만 언약궤만큼은 절대로 빼앗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왜냐고? 엘리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누리던 모든 부귀영화가 바로 그 언약궤의 존재로부터 왔기 때문이야. 그는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았지. 그의 몸이 비대해진 까닭은 야웨께 돌아가야 할 모든 영광을 그가 강탈해버렸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야웨 하나님의 언약궤가 사라진다면 그는 더이상 아무 영광도 누리며 살 수 없어. 대제사장의 존재 자체가 불필요해지니까. 언약궤야말로 엘리와 그의 가문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요술주머니였던 게야.”
“기억하게 사울. 이 더러운 이스라엘 사회에서 권력이란 그런 거라네. 야웨의 이름만이 그것을 가져다주지. 하지만 야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강대한 힘을 내려놓을 수 있네. 반대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그 힘에 매혹되고, 더 이상 야웨가 아니라 야웨가 가져다주는 부귀영화를 나의 신으로 삼게 된다네. 나도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 그래서 자네가 아니라 내 두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 아니었나.”
언젠가는 그와의 대화를 그리워할지도 모르지요. 그땐 정말 저희 둘 사이가 돈독했거든요. 어쨌든 그의 답변은 이 끔찍한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그리고 엘리는 왜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제게 제공해줬습니다. 아무튼 엘리의 죽음은 이스라엘 사회에 거대한 변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베냐민 지파 사람들 역시도, 한동안 큰 혼란을 겪어야 했으니까요. 그 혼란을 끝낸 사람은 제가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입니다. 저의 은인이자 스승, 그리고 저의 철천지 원수인 사무엘. 앞선 대화를 저와 나눴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