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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묵상글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 받을 자격과 능력.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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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받을 자격과 능력
어제 부자 청년이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떠난 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놀라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저는 이 말씀이 특별히 눈에 들어오며 이어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본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묵상 말입니다.
예를 들어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을 수 있냐고 얘기하는 것은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받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
도움을 받는 것.
사랑을 받는 것.
위로를 받는 것.
이런 것이 다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만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것으로 오해하면 받을 수 없겠지요.
하느님의 구원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우리는
오늘 판관기의 기드온처럼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지요.
오늘 기드온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자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들먹이며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구원을 버림이라고 오해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도 사랑도 도움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인데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첫째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믿건 하느님을 믿건 믿는 자가 받을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사람을 믿지 못하다가 하느님도 믿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믿지 못하고 저 사람도 믿지 못하고 하다 보니
믿지 않는 것이 그의 천성처럼 되어버렸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지,
원치 않거나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이 아닌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은 버리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버리는 사람이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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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혹 나 자신의 몸이나 소유물이나 재능, 지식이나 신념이나 이상, 자기 방식의 사랑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나 하느님 상에 애착하고 있지는 아닌지요? 오늘 우리는 내가 바라는 가정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 되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차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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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려도 버릴 것이 생깁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 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18,29. 마태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올림픽대회 때 상을 위해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한 베드맨턴 경기는 결국 실격을 당하였습니다. 그 근본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만을 생각하면 부정한 방법으로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가치를 생각하면 그 생각을 한 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길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잠언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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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히 ‘KBS 영상 실록’을 보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있어서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영상 실록‘은 매년 있었던 사건과 사고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상 실록을 보면서 제가 태어났던 1963년의 사건과 사고를 보았습니다. 그해 1월은 인천항이 얼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있었습니다. 영상 실록을 보니 1963년은 군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5.16의 주역인 박정희 의장이었습니다.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군인들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고, 군인이었던 박정희 의장은 전역하여 민주공화당의 총재가 되었고, 곧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 후보와 경쟁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1963년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는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1963년에 ‘라면’이 처음으로 출시되었고, ‘장충체육관’이 신축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였고, 제가 태어났습니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KBS 영상 실록‘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났던 해의 영상을 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문득 생각합니다. 하느님나라에 우리들 각자의 삶이 ’영상 실록‘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교회는 오늘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2000년 전에 마리아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다.’라고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아직 처녀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하와의 불순명으로 죄가 생겨났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찾아왔지만 마리아의 순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는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했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함께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되셨으니 성모님에게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라는 호칭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십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돈의 중요성과 저축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가 15, 8-10)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양 한 마리처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다음은 적극적인 재테크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30)는 목표 수익률 100%의 공격적인 재테크입니다. 예화 속의 주인은 종에게 금융기관의 수익률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잘 키워야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잘 키워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맹목적인 저축에 대한 경고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 16-21)는 돈 자체에 탐닉하는 수전노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곳간이 미어터지게 재물을 모아도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인의 목숨을 가져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나눔의 미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눔이 참 행복임을 가르치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 19-31)는 나눔을 모르는 부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닉을 싫어하셨습니다. 부자를 미워하신 게 아니라 나눔을 모르는 부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모은 돈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던 자캐오(루가 19, 1-10)를 축복하셨습니다. 자캐오와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눌 수 있다면 부자도 얼마든지 하느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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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쉬울까요?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쉬울까요? 사실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다.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부자가 부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그리고 그 부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나누고 사랑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큰 유혹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런 부의 유혹은 부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가난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어둠으로 사람을 몰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같은 유혹입니다.
집착! 지금 우리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하느님보다 돈입니까?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일보다 더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는 어디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은 이기적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만을 사랑하길 빕니다. 우리 각자와 함께 사랑을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각자를 하느님은 누구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똑같이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세상 무엇보다 세상 누구보다 더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만 사랑하십시오.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하느님 사랑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려니 놔두자
누가 나를 좋다고 말한다면
그러려니 놔두세요.
누가 나를 싫어한다고 한다면
그러려니 놔두세요.
주변의 여러 가지에 흔들리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아껴주어야 할 사람들….
그쪽으로 방향 잡고 의연하게 걸어가세요.
나머지는 모두
그러려니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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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병자성사를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환자 교우의 상태에 대해 여쭤보니, 병원에서 이제 해야 할 치료가 없다면서 마지막을 잘 준비하라고 했답니다. 낮에 두 군데에서 특강이 있어서 곧바로 가지 못하고, 저녁 늦게 그 집에 방문했습니다. 다행히 형제님께서는 아주 밝으셨고, 또 기운도 넘쳐 보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얼마 안 남았다고 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더군요.
정성껏 병자성사를 드리고 성당에 돌아왔습니다. 그 가족에게는 매달 봉성체가 있으니 꼭 신청하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열흘쯤 지났을까요? 병자성사를 받은 형제님께서 선종하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과 함께, 병자성사를 드리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마지막 대화였음을 깨닫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과연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만남 뒤에도 계속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만남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주님과의 만남에서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이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기보다 세상을 만나야 하고, 주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이기에 오늘 복음을 통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억만장자를 비롯한 갑부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보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해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권력과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님과의 만남을 소홀히 여깁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일에 매여 있으면 주님을 찾거나 청하지 않으며 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에 온 정성을 쏟는 사람은 무엇보다 주님이 먼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백 배로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정성을 쏟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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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맞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도 당신이 맞습니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로저 베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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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구원
-구원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
-“한미일 사실상 ‘군사동맹’....격랑 한복판 선 한반도”-
어제 어느 일간지 1면의 톱기사 제목에 마음이 참 착잡했고 이어 다른 칼럼 내용에 충격과 더불어 공감한 내용 일부를 나눕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퍼디낸드가 폭풍우 속에서 외친 말이다.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여기가 지옥이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불길은 점점 거세져 지구 기온이 계속오르고 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온난화 시대가 끝나고 지구가 들끓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과학은 이미 악마편에 선 것 같다.
지구전체 인구의 2배가 먹을 만큼 식량이 생산되지만, 매일 최소 약1만4천명, 매년 약500백만명이 굶어 죽는 건 식량이나 첨단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해 그 과학이 만든 전쟁무기로 사망한 사람이 4만3천명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무기 수출 세계 8위, 성장률 1위 국가가 됐다.
망각과 둔감은 지옥의 단어다. 잊으라, 용서를 강요하는 자가 악마다. 신곡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희망을 가질수 없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다. 지금 이곳이 지옥이다. 악마는 모두 여기에 있다.”
지옥은 텅비어 있으니 지옥에 있는 악마들이 모두 나와 활개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이미 여기서 시작된 지옥입니다. 이미 그런 징후는 곳곳에 차고 넘칩니다. 반대로 이미 여기서 시작된 천국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희망이 없는 지옥같은 세상에서 희망의 천국을 살아내야 할 우리 믿는 이들이요 그럴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0장1절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어제 26년전 제 자작시 달개비꽃을 어느 좋은 분이 시화詩畫로 만들어 선물로 보내 주었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달개비꽃 시화를 나눴고 위로를 받았다는 감사인사도 받았습니다. 달개비꽃시 전문을 인용합니다. 요즘 아주 낮은 그늘진 곳에서 영롱하게 피었다 잠시후 지는 남보랏빛 작은 야생화 달개비꽃입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놓은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져갈 수 없는 달개비꽃
생명의 보석들!”-1997.8.25
26전 요즘 여름철에 쓴 시입니다. 이때의 시적감성이 그립습니다. 이 시화 선물에 대한 어느 분의 답신입니다.
“요즘 한참이나 힘들었습니다. 신부님이 어떻게 아시고 생명의 보석꽃을 보내셨을까요. 제 마음 아시는 주님처럼 신부님이 참 신기합니다. 남보랏빛 진한 바다 물빛 작은 달개비꽃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참으로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얼마나 위로의 구원을 갈망하는지 모릅니다. 주변을 보면 예외없이 온통 아프고 위로 받아야 할 참 마음이 가난한, 쓸쓸한,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위로에 굶주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시 하나에도 감격하여 고마워합니다.
어제 저녁식사후 세기시 수도원에 잠시 거주중인 젊은 몇분 형제들에게 “겸손의 수련”으로 여기며 잘 지내시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고 만족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위로와 평화, 휴식의 구원을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수도원의 환대는 그대로 주님의 환대를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주님은 의미심장한 답을 주십니다. 부자가 구원받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할 것이란 말씀은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할뿐더러 이렇다면 모두의 구원 역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것 역시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문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눈여겨 보시며 최고의 명답을 주십니다. 결론하여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참으로 하느님의 회개 은총으로 새로워질 때, 모든 삶의 어려움을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의 수련, 겸손의 계기, 비움의 수련, 비움의 계기로 삼을 때, 그리하여 작은, 가난한, 겸손한 영혼으로 살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부자라도 하느님의 회개 은총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나눔에 항구하다면 이런 부자의 구원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가난하다 해도 마음이 탐욕이나 부자에 대한 질투로, 증오로 가득차 있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무일도시 힘차게 불렀던 몇 성구가 떠오릅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뵈오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로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이라 하느님을 추호도 탓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인간의 탐욕으로 자초한 재앙이요 불행의 연옥이요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참으로 주님의 회개 은총으로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에서 날마다 거듭 새롭게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이요 이의 빛나는 모범이,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에서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았던 분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입니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전 성모찬송가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세상살이 끝날 그때 당신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마리아!”
우리의 희망과 기쁨, 위로의 샘이신 동정마리아 성모님이 구원받은 자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났던 주님과 하나되어 살았던 주님의 천사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우리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회개로 깨끗해진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이 보속 말씀 처방전을 받고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의 탄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부님! 보속이 아니라 보석입니다. 생명의 보석 말씀입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동정마리아 성모님에 이어 제1독서 하느님께 불림 받아 주님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 기드온 판관입니다. 기드온을 찾아 온 주님의 말씀에 이어지는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너의 힘을 지니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그대로 위로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제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천사를 뵈었군요!”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주님은 평화’라고 하였다.-
똑같은 위로와 격려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제단의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우리 모두 하늘 나라 천국의 일꾼으로, 위로와 평화의 사도로, 희망과 기쁨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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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버림과 따름>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따름을
위한
버림입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는
버림입니다
갖고픈 것마저
꿈꾸지 않는
버림입니다
버린다는 마음조차
머금지 않는
버림입니다
따름만
남을
버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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