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제목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불법사이트를 통해 어린이들 사이에서 무분별하게 확산하고 있다.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비판적 사고 없이 이같은 역사물을 받아들여 잘못된 역사인식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일 불법다운로드 사이트 10여곳에는 ‘패왕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애니메이션 자료가 게재돼 있다. 이 애니메이션의 국내 개봉명은 ‘전국바사라 극장판’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동명 게임원작의 영화이다. 지난해 말 국내 개봉 당시 관람등급은 15세 이상이었다.
현재 이 애니메이션은 불법사이트 등을 통해 나이제한 없이 아무나 내려받을 수 있어 이를 본 초등생이 상당수다. 실제로 이 애니메이션을 알고 있는 서울 마포구 소재 A초등학교 5학년 김진영(11ㆍ가명) 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패왕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니 영웅이나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역사교육이 부실한 상황에서, 임진왜란 때 한반도를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시하는 애니메이션이 어린이에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 소재 A초등학교 교사 김모(30) 씨는 “초교 5학년때부터 역사 교육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비판적 사고를 못하는 상황에서 패왕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애니메이션을 접하면, 보는 그대로 이해하고 믿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소재 B초등학교 교사 이모(53) 씨는 “요즘에는 ‘최고다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순신 하면 드라마의 주인공 ‘아이유’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면서 “특히 지난달 28일이 이순신 장군 탄생 제468주년이었지만 이와 관련 학교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전혀 없었다. 학교에서부터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역사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하자 진짜 시험에도 역사의 비중을 크게둬야함 (아끼히로가 일본인이니 자기네 조상들 좋게 꾸미는건 당연한 일이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란 말이 무슨 말인지 다시 한번 알겠네.... 저딴 놈들이 커서 나라 팔아 먹지.
그래서 뉴라이트가 위험한 것임. 이제 애들이 '김구는 테러범' 이럴듯.
옛날에는 읽을 책이 없어서 이순신 만화책 봤었는데 ㅋㅋㅋㅋ 지금 고딩인 친구들만 해도 1000에 999는 알듯 쪽빡빡이새1끼 존못생김 ㅠㅠㅠ (쪽바리들 백년전만해도 원판이 쪼그맣고 못생김. 지금은 수술이나 외국인들과의 결혼등으로 인해 그나마 나은 편)
개념없이 일본 애니를 수입하고 방영을 하는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 큽니다.
일베에서는 저게 상식 김구는 테러범;;;;; 일베 유해사이트 지정 찬성
유치원 때부터 영어 가르키더니.. 영어 부터 가르키기전에 한글, 우리나라 역사부터나 제대로 가르켜라...
친일파 쪽바리 계집을 대통령을 뽑은 것 보면 바로 답나오지
우린 지금 누굴 욕할 처지가 아닐텐데 독재자 딸년을 지도자를 모시니 이런꼬라지는 좋은 꼬라지냐 ㅋ
일본인 입장에서야 도요토미가 영웅이고 이순신이 원수지 우린 당연히 이순신이 영웅이고 도요토미가 원수고. 이런 기사 좀 웃기지 않냐? love**** (ㅉㅉ 우리나라 애들이 일본인이냐?)
솔직히 도요토미가 나쁜사람이라 할 수 없지 조선 입장에서야 나쁜 사람이지만 일본 입장에선 미천한 신분에서 성장해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으로 영토확장까지 하려던 위대한 명장 중에 하나잖아 결론은 역사상의 인물을 옳고 나쁨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tyso**** (그런데 문제는 그 조선애들한테 발생한 일이쟎냐?)
김대중 정권은 북한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활동하던 공산당 간부와 군 간부 등 국정원 대북공작원의 명단(300명 추정)을 북한당국에 순순히 넘겨줬다는 것이다. 이게 맞다면, 북한정권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선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 정보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9족까지 멸될 정도로 처참하게 처형됐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나? 재판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을게 분명하지만, 재판이란거 자체가 오히려 호사스러운 북한이 아닌가! 동시에 대한민국내에서는 대공수사국 개편이라는 명목아래 국정원내 부이사관급 140명을 포함한 600여명의 대공인력을 숙청하였고 대공경찰 2500명, 군기무사 요원 600여명, 공안검사 40여명을 해임하는 무장해제에 들어갔던 것이다. momo****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냐? 9족이 멸하게?)
빨갱이 물타기 하는거 봐라 진짜 분통터진다. 종북좌빨들 거짓말 지어내는거 alca**** (나는 네 놈이 분통터진다)
김대중의 국정원 학살 국정원 및 대공분야 검사, 경찰, 기무사 요원 등 도합 4000명 가까이 강제 해직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후, 안기부의 굴뚝에서 서류 소각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연기가 몇날몇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음. ------------------------- 남조선에서 자료가 올라와... 1998년 10월, 군에서 장성급 100여 명, 대령급 50명, 사회안전부ㆍ당의 고위급 100여 명이 체포돼 간첩 혐의로 거의 다 사형됐다고 탈북자가 증언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806 -------------------------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미스터리 김신조 침투조 두 명 더 있었고 생포 후 간첩 만들어 북에 보내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761 momo****
일본역사에 있어선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노부나가와 더불어 영웅적인 다이묘였던건 사실이 아닌가?? 솔까 그때가 무슨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400년이 지난 옛 전쟁을 가지고 아직까지 민족적 열패감을 가져 성토하는거 보면 안타깝다... 민족주의에 매몰되다보니 히데요시하면 아주 무능하고 천하의 악당인냥 묘사되어왔는데, 사실은 하급무사집안에서 태어나 열도를 통일한 입지전적의 인물인데,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패왕이란 말이 틀린게 아니지. 임진왜란도 보면 히데요시의 정권확립과 열도의 패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하나의 전략적 수단이지. 유럽역사에도 보면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히려 비상한 전략이라고 보는데. 당시 너무 평화로워서 글이나 읽고 외부사정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무능한 조선의 왕실을 욕해야 하는게 맞지. 오히려 조선의 무능함을 욕하고 반대로 히데요시를 통해 더 배워야 하는거다. 언제까지 피해자 컴플렉스에 매몰될건지??? mj27**** (너깉은 놈은 일본 가서 살아. 곧 가라앉을 땅이지만 일본 좋다는데 어쩌겠냐?)
일본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있다 ybin**** (ㅉㅉ 인류의 뿌리가 아프리카라는데 그 아프리카에서 배 타고 일본으로 왔겠냐? 아님 육지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으로 갔겠냐? 당시엔 배 만들 기술도 없었는데... 그럼 쪽바리들의 뿌리가 어디겠냐?)
다이쥬센세는 북한에서도 존경받는 좋은사람 momo****
일본이 대단한 이유 1. 서양에게 개항하기 전부터 이미 가장 '서구적인 민족' 청과 조선이 사농공상을 경시할 때 일본은 기술과 상업을 중시, 철저한 서구식 개인주의 동양사에서 유일하게 서양사의 봉건주의를 적용시킬 수 있는 나라 2. '한다면 하는' 나라 조선에서 입으로만 북벌론을 외치고 남을 침략하지 않은 역사를 자랑하는 동안 일본은 이미 16세기말 전국톨일 후 포르투갈로부터 총을 수입해 대대적으로 조선 침략 3. 아시아에서 가장 변두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뤄낸 나라 19세기 조선과 청이 쇄국주의를 펼치는 동안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기적적인 산업화를 이뤄내고 오히려 더 나아가 서양열강의 공업력과 비등해진다 정치적으론 봉건적 왕권을 넘어서서 영국식 입헌군주제 도입 제국주의 시절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열강에 포함된 나라(영국, 일본, 미국, 프로이센, 러시아) 4. 강력한 나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와 싸워 이긴 나라 (19세기 러일전쟁, 러시아가 자랑한 극동함대 궤멸) 1차, 2차 세계대전모두 아시아 국가중 유일하게 주체가 되어 참전 30~40년대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공업력을 보유(영국식 모델을 따르려다 프로이센식 발전 모델 채택) 동양인을 무시한 히틀러조차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일본인만은 예외로 함 2차대전 발발전 이미 수척의 항공모함과 세계최강의 함선 건조능력 보유 인구수의 몇십배가 차이나는 중국을 상대로 연전연승 중국국토의 50% 점령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과 맞써 싸운 나라(미국, 영국, 프랑스 등) 5. 잘사는 나라 미국에게 원자폭탄을 2번 맞고 패전했음에도 불구, 한국전쟁을 계기로 기적적으로 재성장 70~80년대 경제대호황 시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중국과 유럽국가들을 앞지르는 gdp 세계 2위 당시 가장 잘나가는 100대 기업중 70%이상이 일본기업, 이미 80년대후반 1인당 gdp 2만불 달성 (한국은 2012년에 2만불) 아시아 유일의 서방 7대 선진국 G7의 회원국 ybin****
* 임진왜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 혹은 전쟁 준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임진왜란 개요
전쟁주체
조선, 명 vs 일본
전쟁시기
1592~1598
전쟁터
한반도
주요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진주성 전투,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임진왜란! ‘조-일 전쟁’, ‘임진전쟁’, 또는 ‘7년 전쟁’이라고 간혹 부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은 대부분 전근대적인 어법을 써서 이 전쟁을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고 부른다. 그 치열함과 참혹함에서 한국전쟁에 필적하고, 일본에게 말도 못할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과 짝을 이루는 역사적 대사건이기에, 감정을 빼고 객관적인 ‘전쟁’의 하나로 이를 취급해 부르기가 왠지 싫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 쪽에서는 임진년의 침공을 ‘분로쿠의 역(文祿の役)’으로, 정유재란까지 합쳐서는 ‘분로쿠-케이조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고 부른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해당하는 일본의 연호를 써서, 이를 자신들이 성취한 ‘큰 사업(役)’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전쟁의 잘잘못과 진영을 떠나 개인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희생을 논외로, 국가적으로 임진왜란은 조선, 그리고 명나라에게는 국세가 기우는 위기를, 일본에게는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문치주의’와 ‘천하포무’
1567년, 이 해에 조선에서는 새롭게선조가 즉위했다. 그의 즉위는 오랜 훈척정치의 폐단을 마감하고, 사대부의, 사대부에 의한 정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대를 열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파행적인 독단에 질려 재야에 묻혀 있던 이황이 조정에 복귀하고, 기대승, 이이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앞 다투어 나타남으로써 바야흐로 조선은 문치주의(文治主義)의 봄을 맞는 듯했다.
바로 그 해,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내세웠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오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교토에 입성해 ‘노부나가 정권’을 수립하고, 가이(현재 야마나시 현)의 풍운아 다케다 신겐, 에치고(현재 니가타 현)의 용우에스기 겐신, 혼간지(本願寺) 불교 세력 등과 치열한 항쟁을 거듭한 끝에 1580년 즈음에는 일본 통일을 거의 성취한다. 그러나 1582년에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아케치를 토벌한 오다의 또 다른 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포무의 꿈을 계승하는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르게 된다.
선조의 필적
전국시대의 전쟁도. 1561년에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격돌하고 있다.
본명이 기노시타 토키치로라고 하며, 오와리의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급사(고모노)로 출발했다. 하지만 차차 공을 세워 29세에는 성주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때부터는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아케치를 토벌하고, 오다의 가신들 중 자신에게 적대하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물리치고, 오다의 동맹자였던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킨 다음 1585년에는 간바쿠(關白), 1586년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직함을 얻으며 일본 일인자의 자리를 굳혀갔다. 이때부터는 일왕에게 하사받은 도요토미라는 성을 써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으며, 1587년에는 마침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를 굴복시킨 다음 '병농분리령'을 내려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1590년에는 간토의 호조 우지마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반대자들을 무릎 꿇리고 일본을 통일, 120년 동안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모모야마 시대’를 열게 된다.
조선에서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이 정여립 사건을 기화로 동인을 무섭게 박해하는기축옥사가 일어나고(1589), 명나라에서는 명신 장거정이 죽은 뒤만력제가 업무에서 손을 떼고 나라가 멋대로 돌아가도록 방치하는 ‘태정(怠政)’이 시작되며(1586),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건주여진을 통일하던(1588) 무렵이었다.
히데요시의 과대망상인가? 치밀한 계산인가?
이리하여 겨우 피와 불과 연기가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의 혼란이 멎고 안정되나 했는데, 히데요시는 곧바로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복하고 동양에 군림한다”는, 포부라기보다는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다. 왜 그랬을까?
일본에서 조선과 중국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숙종때의 ‘북벌’이나이승만시절의 ‘북진통일’처럼 실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말잔치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 대업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외침략 계획도 실제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직 오다를 섬기던 1577년에 처음 조선과 명나라로 출병하겠다고 밝혔고, 집권 후에는 1586년, 일본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에게 명나라를 손에 넣을 것이라고 밝힌다. 이 무렵 대마도주와 그의 측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구상이 언급된다. 그리고 1591년에 어렵게 얻은 아들인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간바쿠 직위를 양자인 히데츠구에게 넘겨주고는 전국의다이묘(大名)들에게 조선 출병을 지시함으로써 이 구상을 현실화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인에게는 천추의 영웅. 한국인에게는 만세의 흉적이다.
히데요시의 공명심 내지 야욕이 임진왜란 발발의 원인이라는 설은 전부터 가장 많이 제기되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며 히데요시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선교사 그레고리 드 세스페데스, 루이스 프로이스 등은 “그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조카 히데츠구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강대한 군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 땅을 정복하는 과업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런 위대한 업적을 세운 최초의 일본 지도자로 자신의 이름을 불멸케 하려는 뜻이었다”고 보았다. 히데요시 본인이 “일찍이 일본을 제패한 사람은 여럿이지만 대륙까지 손에 넣은 사람은 없다”며 자신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명성을 얻고야 말겠다고 부하들에게 여러 차례 언급했고, 조선 출병에 앞서 다이묘들에게 “나는 이 더 없는 명예를 얻기 위해 이미 손에 넣은 명예와 쾌락을 모두 포기했다. 너희가 이 계획에 동참한다면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나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한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대를 명나라의 간바쿠로 삼는다. 이제 명을 정복하면 지금의 천황을 북경으로 옮길 것이다. 일본 천황 자리는 지금의 황태자나 도시히토 친왕에게 주고, 조선 왕으로는 기후의 재상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앉히리라”고 호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정말로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출병에 앞서 조선, 류큐, 필리핀에 두루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임진왜란 당시 침략의 선봉에 선 다이묘들은 정권에 불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서부의 다이묘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히데요시 개인의 야망이 아닌, 보다 넓고 복잡한 차원에서 전쟁 원인을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가령 ‘경제원인론’에 따르면 히데요시 정권은기나이(畿內) 지역의 상인들의 후원에 기대고 있었으며, 그들은 명나라에서 시행 중이던 무역 금지(海禁) 조치를 깨고 포르투갈 상인들 대신 동아시아 무역에서 우위를 차기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출병을 결행했다고 하며, 그것은 일본이 전쟁 도중 명나라와 교섭하며 무역의 재개를 요청한 사실에서 뒷받침된다고 한다.
또 ‘정치원인론’에서는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긴 했어도 여전히 독립지향적인 다이묘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그 힘을 어느 정도 약화시켜야 했던 정권의 입장에 주목한다. 옛날 원나라의 일본 침공은 최근 지배권에 편입된 남송과 고려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선 다이묘들은 정권에 불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고니시 유키나가(독실한 천주교도), 시마즈 요시히사(통일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었다. 조선에는 그 후계자인시마즈 히사야스가 출정했다가 사망했다) 등의 서부 다이묘들이었으며, 히데요시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이었던 다이묘들의 영지를 빼앗아 가신들에게 주기도 했다.
결국 히데요시 개인의 의욕에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합쳐져 임진왜란이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입장도 고려될 수 있다. 앞선 미나모토, 아시카가 가문과 이후의 도쿠가와 가문은 모두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즉 일왕을 대신해 국토를 수호하는 총사령관의 명목으로 막부를 열고 다이묘들을 군령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쇼군이 될 수 없었으며, 궁정의 직책인 간바쿠, 태정대신 등의 직함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실권 차원에서는 대장이나 대신이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오랜 법도와 관행상 쇼군이 아닌 이상 다이묘들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의 위세에 밀려 조선으로 건너가 싸우기는 했지만 일일이 작전 지시는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평양성 전투 후의 총퇴각도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 판단으로 실행했음을 보면 히데요시의 권력 기반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몰라도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언제 모반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에서, 히데요시는 조선-명 정벌 같은 거창한 사업을 벌여 가장 불온한 자들을 제거하는 한편 해외 영지를 나눠줌으로써 가신 집단을 늘리고, 도요토미 가문에 역대 막부를 능가하는 권위를 덧붙이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럼 점에서 만약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더라면 과연 조선 출병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김대중과 자신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유한 박정희!!!
오늘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3주기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 정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독재 정권과 문민정부 등을 거쳐 탄생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 그와 박정희와의 관계를 보면 대한민국 현대 정치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악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박정희와 김대중,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해 우리나라 정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악연의 시작 5.16 군사 쿠데타'
김대중의 정치 시작은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에 출마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 나상근 후보의 중복추천으로 등록무효가 됩니다. 당시에 후보등록을 하려면 추천이 필요한데 김대중이 추천만 받아오면 자유당이 중복추천을 해버려 결국 무효로 선거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960년 제5대 총선에서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게 패했지만, 공민권 박탈로 보궐선거가 치러졌고, 결국 세 번 만에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 5.16 군사쿠데타 호외 조선일보와 박정희
1961년 5월14일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은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5월16일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김대중과 박정희의 악연에서 재밌는 점은 박정희는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아주 쉽게 쟁취했지만, 김대중은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인 국회의원에 되기 위해 무려 7년을 노력하며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를 이겨내고 힘겹게 노력해서 올라왔다는 사실입니다.
정치를 위한 시작의 차이는 이 두 사람의 인연이 악연으로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박정희는 어떻게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나?'
박정희가 김대중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을 손꼽자면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입니다.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권 유지를 독재자가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민정 불참을 선언한 박정희 의장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민정불참을 선언합니다. 당시 눈물을 흘리며 "혁명정부가 기도했던 세대교체 등의 정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자인한다"고 했던 박정희의 말을 순진한 국민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과 말은 다 거짓이었고, 결국 박정희는 민정 불참을 약속한 지 6개월 만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면서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공화당의 박정희는 (4백 70만 2천 6백 42표/총투표수의 42.61%),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 4백 54만 6천 6백 14표/총투표수의 42.19%)를 한국 선거사상 가장 근소한 표차로 겨우 이기고 6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 삼선개헌안 통과를 보도한 신문
원래 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중임제로 정해놨습니다. 6대 대통령으로 재선된 박정희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삼선 개헌을 준비하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을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야당 의원을 피해,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에 국회 3별관에서 무려 1,2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삼선개헌으로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 박정희는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김영삼을 꺾은 김대중과 대결을 펼칩니다.
'종신 총통제 VS 이번이 마지막'
김대중과 박정희의 7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일들이 몇 가지 발생합니다. 당시 재야,학생,언론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격렬히 저항했으며, 학계,법조계,언론계,종교계,문학계 등 각계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여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습니다.이런 움직임과 함께 김대중의 명연설은 청중을 사로잡았고, 그의 유세장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 유세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 정권은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맞선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라는 읍소 작전으로 맞섰습니다. 박정희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구걸 유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1일 2회 유세 연설의 강행군은 전국에서 김대중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김대중의 인기에 겁이 난 박정희는 다른 전략을 구상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의 등장입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국회의장 이효상)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것"(공화당,중앙정보부 요원들)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면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것"(경상도 지역 공무원들에게 퍼진 말) "쌀밥에 뉘가 섞이듯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치고 박 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조선일보) "야당 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 그러면 154만표 이긴다. "(중앙일보)
박정희 쪽에서는 "신라대통령론"과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허위전단을 뿌리기도 했는데, 이런 지역감정 이외에 엄청난 선거 자금이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은 600억원을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700억원을 썼다고 주장했는데, 1971년 대한민국 예산이 5242억원이었으니 박정희가 얼마나 많은 돈을 7대 대통령 선거에 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또한 부정투표 시비도 있었는데, 당시 서울에서만 7천4백여표의 유효표가 무효처리되는 사태도 발생해,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는 돈과 공작 정치가 함께 이루어진 선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북(92만표),경남(58만표)에서 얻은 표로 당선됐습니다. 경북과 경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김대중이 박정희보다 무려 56만표를 얻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지역감정'이라는 괴물을 사용한 박정희의 전략은 맞아 들었지만, 대한민국 정치는 얼마나 후퇴했는지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7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와 김대중의 '박정희 총통제 발언' 선거법 관련 기사
박정희는 김대중의 총통제 발언을 문제 삼아 그를 대통령선거법으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1972년 박정희는 "그동안 진행해오던 국책사업의 안정적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안정적 국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를 앞세워,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합니다.
결국, 김대중의 '박정희 종신 총통제' 발언은 사실이었고,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도 세습 정권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왜 이루어졌나?'
우리는 흔히 김대중과 박정희를 말하면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말합니다. 박정희가 김대중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교통사고를 당한 김대중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을 왕래하였고,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비상계엄령이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미국으로 간 김대중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조직해 해외에서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반대하며 반정부 투쟁을 벌입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와 인터뷰 장면
박정희 정권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대중이 해외에서 망명정부를 세워 박정희 유신체제를 전복시킬까 두려워 그를 일본에서 납치해버립니다.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최소한 "묵시적으로 승인했고" 납치 사건 전모에 "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 국무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우리 대통령 (박정희)께서 당신이 난처하지 않게 배려하실 것이니 앞으로 '김대중 사건'은 완전히 잊어 주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자신의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인물이었고, 자신이 계획한 영구 집권을 국민에게 까발린 고자질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박정희 입장에서는 그가 있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청와대에 있을 수 없기에, 그를 어떻게 하든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1971년 4월18일자 조선일보 대선 유세 관련 기사
1971년 4월18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대선 유세 중에 박정희는 임진왜란 때의 한일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황윤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켜 '몸이 마르고 키가 작으나 눈이 호랑이 눈 같아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말한 대목에서 '지금의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라고 청중을 웃겼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누구입니까? 임진왜란으로 조선인 사망자는 대략 1백만 명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경작지의 66%가 파괴되고, 경복궁은 물론이고 역대 실록 사고등이 모두 불탔습니다.
김대중은 6대 국회의원 중 가장 국회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던 인물이고,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던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본회의장에 출석하지 않던 의원들도 회의장에 들어 올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이런 김대중을 정치권에서 쫓아내기 위해, 여당 후보 20명이 낙선을 해도 좋으니 김대중만은 떨어뜨리라고 지시하고, 대통령이 선거지원 연설을 할 수 없다는 법을 무시한채 직접 목포로 내려가 "3선 개헌은 절대 안한다. 3선 개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3선 개헌한다는 주장은 순전히 정치적인 모략이다." 이라는 뻔한 거짓말을 했습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조선 지도에 대마도는
2013.5.2 목
독도박물관에 모인 ‘대마도는 조선 땅’ 지도들...미국-영국 외에 일본 지도들에까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작된 조선국 지도, 팔도 총도에 보면 독도-울릉도-대마도가 전부 조선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대마도가 한국 영토임을 나타내는 고지도 전시회가 경북 울릉군 독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독도 박물관 이원휘 학예 연구사는 9일 “옛날 지도들, 특히 일본에서 만든 지도들에도 울릉도, 독도 그리고 대마도를 조선령으로 표시해놓은 지도들이 아주 많다”며 “원래 우리 땅이었다는 것이 지도상으로나 역사 기록으로 명백한데 이 땅을 우리가 관리를 제대로 못 해 일본이 점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연구사는 이날 평화방송 라디오에 나와 “60여 년 전 대한민국 정부가 국권을 회복한 뒤에 대마도를 돌려달라고 하자 일본 본토가 난리가 났었다”며 “당시 일왕에게도 보고하고 미국에 대해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등 일본 전체거 발칵 뒤집어진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1592년 ‘팔도 총도’만이 아니라 1865년 미 의회에서 만들어 진 지도 역시 대마도를 조선하고 똑같은 색깔로 표시해놨고 대마도 해협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대한 해협’ ‘스트레이트 오브 코리아’라고 표기했다”고 지적했다. 또 1830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 역시대마도를 조선령으로 표기하는 등 많은 고지도들이 대마도가 한국 영토임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이 연구사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선 대마도 영유권 주장이 너무 감정적이고 무리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 “국수주의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분명히 존재했던 사실들, 팩트들을 침묵하고 있는 것은 지식인들의 자세가 아니고 또 눈치를 너무 살피는 것 또한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