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흐리던 하늘이 기어이 한 바가지의 물을 쏟아냈다. 일요일, 학교에 가는 날이 아니라 할 일이 없어 불꺼진 방에서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앉아있던 나는 창살에 부딫힌 물방울 하나가 눈으로 들어오자 정신을 차렸다.
탁-
급하게 창문부터 닫았다. 입고 있는 옷은 물론이고 창문 주위의 방이 온통 물바다였다. 찝찝했지만 무슨 변덕인지 그대로 있고 싶었다.
번쩍-
흐린 하늘에 섬광이 스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콰광!
6초. 1800km쯤 떨어져있나보다. 어릴때 비가 오는 날은 오빠와 앉아서 초를 세던 것대로 초를 센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피식, 하는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오기로 억지로 하고 있는 모든 일아 부질없이 느껴졌다. 나 하나 발버둥친다고 변할까.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외로워."
외롭다? 내가 입 밖에 낸 소리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외롭다라. 그래, 나는 지금 외로운가 보구나. 이런게 외로운거구나.
창 밖으로 횡단보도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어쩌다 한 번 눈길이 갈 때면 늘 불이 켜져 있는 카페. 저 카페가 생긴지 한참 됬었지, 아마. 그런데도 나는 저곳에 불이 꺼진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언제나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듯 바닥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에 있는 지갑을 들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위잉-
엘리베이터 특유의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충동적으로 뭔가를 결정한 것은 처음이라 1과 가까워지는 빨간 전광판의 숫자들을 보며 차가운 금속 벽에 머리를 기댔다. 복잡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카페의 불빛이 너무 따뜻해보여서, 집에도 있는 전구빛이겠지만 그것이 그렇게도 따뜻해보였다.
쏴아아-
비가 세차게 떨어진다. 빗발이 굵고 바닥에 떨어져 도로 튀는 것이 사납다. 흔히 말하는 장대비인것 같다. 살그머니 내민 손이 따가운 느낌과 함께 자꾸 바닥으로 처지려 한다.
차박.
한 걸음 비가 요란한 밖으로 내딛었다. 운동화 밑창이 젖은 바닥과 만나 울림있는 소리를 만들었다. 나머지 발도 끌어다 빗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금새 옷이 완전히 젖는다. 머리카락도 비에 젖어 가라앉았다. 앞머리 끝부분을 따라 떨어질듯 하던 물방울이 센 빗방울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멍하니 뿌연 하늘을 응시하다 몸이 으슬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귀를 멍멍하게 울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앞을 보니 초록불이 깜박이는 횡단보도 너머 불이 켜진 카페가 보였다. 뛰었다. 비록 달리기에 젬병이라 느린 속도지만 정신없이 뛰어 횡단보도를 건넜다. 중간에 크락션 소리가 세차게 울린것 같지만 무시하고 뛰었다.
딸랑!
뛰던 속도 그대로 카페 안으로 뛰어들어와서야, 밖과 다른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에 흠칫 했을때야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카페를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다행히 그것은 찰라의 시간이어서 나는 급히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푹-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이불을 뒤집어 쓴 것처럼 숨이 막히기도 했다.
"어디가. 다 젖었는데."
머리에서부터 나를 덮었던 것이 뒤쪽으로 흘러내렸다. 수건. 큰 수건이었다. 바닥을 향하고 있던 눈에 초록색 캠버스화가 들어왔다.
가만히 있던 내가 움직였을 때는 떨어질듯 말듯 간당간당하게 걸쳐져있던 수건이 누군가에 의해 내 머리칼을 해칠때였다.
급하게 눈을 위로 올렸다. 내 키높이까지 눈을 올렸것만 어깨부분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 살짝 고개를 드니 요즘 자주보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머물러 눈길을 잡던 사람. 키 큰 여자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리를 만지던 손이 급하게 멈췄다. 그리고 까만 눈동자가 잠시 눈꺼풀 뒤로 사라지더니 다시 그 모습을 들어냈고 멈췄던 손 또한 부드럽게 움직였다.
왁스를 칠한듯 둔탁한 광이 나는 바닥이 내 몸에서 떨어지는 물에 거멓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순간 눈살이 찌뿌려졌다. 급하게 몸을 돌릴때였다.
"어디가냐고."
어깨를 세게 잡은 손에 멈칫하자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 나무잖아요. 물 닿으면 안 좋아요."
내 말에 여자의 입꼬리가 휙, 올라갔다. 왼쪽. 비웃음이다.
"그래봤자 무생물이야. 살아있는 너는 고작 물 몇방울이 아니고."
다시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여자가 말했다.
"여기 주인이에요?"
"아니."
당당하게 대답이 나왔다. 주인이 아니라면서 이러세요 그럼?
"솔아. 멈춰."
더 생각해 볼것도 없이 여자에게서 몸을 빼 유리문을 반쯤 열었을때 뒤에서 어딘가 위험한 목소리가 들렸다.
"넌 나를 미치게 해."
마치 상처입은 맹수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였다. 유리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소름끼치도록 무표정했다.
여자는 내 손목을 비틀듯이 잡아 카페 안쪽의 직원 휴게실로 나를 끌고갔다.
"더 이상은 피하지 마."
꽤 큰 쇼파에 나를 던지다시피 앉혀놓은 여자가 문 옆의 벽에 걸린 담요를 내 무릎에 던진 후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뭔가 내가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라 머리가 띵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한것은 없었다.
똑똑-
문득 젖은 옷이 떠올라 쇼파에서 일어나 진하게 물든 자국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 가야ㄱ?"
가야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왜 서 있어요. 앉아있지."
한 손에 고양이가 프린트된 하얀 머그컵을 든 남자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 옷이 젖어서...요. 저, 그런데 집에 가고싶어요."
누군가 들으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혼자 간답시고 문을 열었다간 여자와 마주칠것 같아 집에 가고싶다고 남자에게 말했다.
첫댓글 정말.이러면.안되죠 어여어여 길게길게...
저두 동감!
길게 써주세용~~~^^
으음....무슨사이일까요....궁금궁금....
잘 읽었습니다.
알쏭달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