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4)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차'로 번역된 '에플레스테산'(eplesthesan)은 루카 복음에는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본문까지 포함해서 5번 나오는 등, 오직 루카의 문헌에만 12번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는 '(정한 날이) 다 차다'(루카1,23: 2,6: 21,22) '(어떤 감정의 상태가) 가득하다' (사도3,10: 5,17: 13,45: 루카4,28: 5,26;6,11)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문에서는 '프뉴마토스 하기우'(pneumatos hagiu : the Holy Spirit)와 함께 쓰여 '성령이 충만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에플레스테산'의 단수형인 '에플레스테'(eplesthe)의 경우에는 루카 복음 1장 41절과 67절 등에서도 '성령 충만을 받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위의 용례를 종합하면, '에플레스테산'의 원형 '플레토'(pletho)는 어떤 상태가 가득 찬 상태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단어가 본문에서와 같이 성령과 관계되어 사용되면, 성령이 가득하여 어떤 다른 생각이 전혀 침범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성령께 사로잡히면 성령께서 원하는 일만 하게 된다.
이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의의를 살펴본다.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께서 사람안에 내주하시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해서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에서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코린토 전서 12장 3절의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한 내용과 비교하면, 베드로가 성령에 의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전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잉태케 하셨고(마태1,18),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던 시메온 위에도 임재해 계셨었다(루카2,25). 따라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사건의 의의는 최초성이 아니고 특유성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개별적이거나 한시적 봉사를 위한 성령의 역사와는 달리 총체적이고 집단적 봉사를 위한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이전의 어떤 성령의 역사와도 비교될 수 없고, 그 이후에 임하는 어떤 성령 충만의 사건과도 비교될 수 없는 특유의 사건이다.
성령께서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나(루카1,13~15) 또한 오늘날에도 충만하게 역사를 하시지만, 오순절의 성령 충만 사건은 다른 어떤 사건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회 설립을 위한 유일한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에 이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미리 예언되었고(요한 14,16~ 18.26~27; 루카 24,49) 그 예언에 따라 성취된 구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와 성령 충만이다. 오순절날에는 성령께서 강림함으로써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여기서 개신교에서는 7성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물세례'를 '성령 세례'라고 부르며 '성령 충만'과 구분하지만, 우리 가톨릭은 '성세성사'가 있으므로 '성령 충만'을 '성령 안수' 내지는 '성령 세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서는 편의상 개신교의 용어때문에 헷갈릴 수 있기에 개신교의 편의를 따른다.
하지만,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와 성령 충만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일회적이고, 성령 충만은 반복적이라는 데서도 밝혀진다.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가 죄로 인해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된 관계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작을 표시하므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를 받은 자에게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상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는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다 (사도 4,8. 31; 에페5,18).
또한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죄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이고(38.40.41절),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교회 선익을 위한 봉사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령 임재와 충만의 증거를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가시적이고 가청적인 증거로 보여 주셨고(사도2,2~3), 성령이 임한 후에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각국의 언어로서의 방언을 행하게 하셔서 성령 충만의 외적인 표지을 보다 확실하게 또 다시 보이신 것이다.
오순절 날의 새로운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과 바오로의 서신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은 동일한 면과 다른 면을 가지고 있기에 잘 식별되어야 한다. 동일한 면은 두 방언이 모두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며, 방언을 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즉 오순절의 방언의 경우, 사도 2장 13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고, 코린토 전서 14장 23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이 두 방언의 차이점은, 오순절날의 방언은 실제 사용되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으로서 그 외국어를 알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바오로 서신의 방언은 실제 사용되는 외국어가 아니므로, 해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해석하여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