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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묵상글 (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존재적 변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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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존재적 변화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욕을 가끔 내뱉는 저를 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문제의식을 크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욕을 입에 결코, 담지 않았고
욕설이 난무하는 군대 있을 때도 욕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전보다 더 나쁜 놈이 된 것이고,
제가 전보다 더 화가 나 있는 걸까요?
반대로 전에는 제가 좋은 사람이었고
별로 화가 나지 않았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 반대입니다.
다만 지금은 전보다 누르는 힘이 떨어진 면도 있고
죄의식이 약해져 덜 누르는 면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죄의식이 약해진 데는
욕쟁이 아줌마가 욕은 걸쭉하게 해대지만
마음은 따듯하고 그 욕에 오히려 정이 있듯이
욕에 미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실리지 않기 때문인 면도 있지요.
어쨌거나 말은 존재의 표현이랄까 표출입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미움이 있으면 미움이 말로 표출되기도 하고,
미움을 감추려고 말을 하지 않으면 눈으로라도 표출이 됩니다.
화가 나 있으면 그것을 풀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표출됩니다.
잠시 그 화를 누르거나 가둘 수 있지만 영원히 가둘 수 없고,
화가 쌓이면 화병이 되거나 폭발하게 됩니다.
미움과 화만이 아니라 사랑과 온유도 마찬가지이고
슬픔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이며
괴로움이나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있는 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미움은 감추고 사랑만 드러내고 싶지만 미움이 있는 한 그럴 수 없습니다.
미움을 드러내지 않을 방법은 미움이 안에 없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독설이나 상처를 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설이나 상처 주는 말은 그 존재가 악독하기에 나오는 것이고,
존재가 악독해지는 것은 악이 그 안에 오래 쌓여 독해지기 때문인데
그 악의 독이 해독되기 전에는 독설과 상처 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존재가 사랑과 선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존재가 악하면서 선의 열매 맺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위선으로 선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고 그래서 자주 인용하는 불교의 말이 있습니다.
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사음수 성독 우음수 성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이룬다.
智學 成菩提 愚學 成生死(지학 성보리 우학 성생사)
지혜로운 배움은 보리를 이루고 어리석은 배움은 생사를 이룬다.
같은 물을 먹어도 뱀은 독을 만들어내고,
아무리 우유를 먹어도 독을 만들어내니
남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젖을 만들어내려면
뱀과 같은 존재에서 소와 같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같은 이치를 가시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존재적 변화로 응답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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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루카 6,45)
오늘 <복음>은 좋은 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예레 17,10;21,14;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를, 오늘 <복음>은 두 가지로 말해줍니다. 곧 ‘말’과 ‘행실’ 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루카 6,43-45)
그러니 ‘첫 번째 열매’는 우선 입으로 하는 ‘말’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어떤 말들이 담겨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입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의 곳간이며, ‘말’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말’은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향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두 번째 열매’는 몸으로 하는 ‘실행’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그렇습니다. 말씀의 ‘실행’이야말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그러니, 우리 역시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며,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일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가?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인가?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4)
주님!
나무에 붙어 있게 하소서!
붙어 있지 않고서는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려나가기 전에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게 하소서!
찬란해 보이는 잎도, 아름다워 보이는 꽃도, 버려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의 껍데기 위선을 벗기고, 숨겨둔 기만을 도려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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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에 담아야 할 것
말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도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일상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음 안에 좋은 것을 담아야 좋은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를 건 거르고, 삭힐 건 삭히고 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르는 행동이 선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마음보다 형식과 겉모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선할 때 선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인데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르7,21이하).
그야말로 가시나무에서는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법입니다(루가6,44). 그러므로 닦고 가꾸어야 할 것은 말보다 먼저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고운 말도 나오고 바른 행동도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소리만 합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강아지 얘기만 합니다. 그 강아지에게 마음 쓰는 만큼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을 터인데… 동물 애호가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마음속에 강아지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 자체가 사랑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는 남 얘기만 합니다. 자기 속을 보지 않고 남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참견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온통 남의 흉, 허물로 자기 마음을 가득 채워 놓은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으라 하시는 데 남의 흉, 허물 위에 집을 짓고 있으니 그 집이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습니다’(루카6,49).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성경 말씀과,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 예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기쁘거나 위기가 닥칠 때나 어느 때이든 그분 것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키십시오”(토마스 머튼). 잠언에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4,23)라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주시리라”(잠언3,5-6). 주님을 마음에 담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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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에서 교우 분들과 함께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외식보다는 집 밥이 좋다고 하시면서 음식은 모두 준비해서 갔습니다. 점심은 주로 공원에서 먹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며 식사를 하니 좋았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숙소에서 먹었습니다. 교우 분들은 저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셨고, 저는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2박 3일 여행 중에 운전은 한 자매님이 해 주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자매님은 ‘고생은요, 수고한 것은 맞네요.’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고생과 수고’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고(受苦)는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의 능동적인 의지가 동반된다고 하겠습니다. 고생(苦生)은 어렵고 힘든 일을 겪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의 능동적인 의지가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고생 앞에 ‘생이나 개’를 넣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매님은 ‘수고’했습니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여행을 위해서 운전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23년도에 LA에 3번 왔고, 앞으로 1번 더 올 예정입니다. 모두 신문 홍보를 위해입니다. 신문에는 교회의 보물이 있습니다. 교회의 보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고생이 아니라, 수고라고 생각합니다. LA에 올 때마다 잠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더욱 감사할 일입니다. 2023년도에 성지순례를 5번 다녀왔고, 앞으로 1번 더 갈 예정입니다. 성지순례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예수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5번의 순례를 통해서 150명 이상의 교우 분들을 만났습니다. 매일 잠자리를 옮겨야 하고, 늘 새로운 분들을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니 결코 고생이 아닙니다. 모두들 자발적으로 순례에 함께 하였으니 모두들 수고하였습니다. 10월에는 ‘한국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10월에 한국으로 휴가를 갈 계획이 있었는데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으니 더욱 잘 된 일입니다. 저의 수고가 열매 맺어 성지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기쁨입니다. 산모의 고통은 고생이 아닙니다. 고통을 넘어 한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에 당연히 수고입니다.
교회는 며칠 전에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소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서 3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자에게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어머니에게는 이 사람이 아들입니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고생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고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튼튼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 같아서 삶의 풍랑이 다가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우리의 신앙은 주기적으로 순환을 합니다.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연중,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준으로 순환합니다. 저는 60년을 순환하였습니다. ‘기도, 희생, 단식, 나눔’의 생활을 충실히 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순환입니다. 마치 대나무는 마디를 이루면서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나이테를 이루면서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매년 순환은 하지만 헛바퀴를 도는 것처럼 살기도 합니다.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시련의 파도가 오면 곧 무너지는 신앙입니다. 원망, 불신, 근심, 분노가 자리 잡고 있어서 하느님께로 향하지 못 하게합니다. 가진 능력과 재물을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봉헌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하느님의 은총을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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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참으로 명료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또 만나왔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합니다. 말은 늘 언제나 우리를 도와준다고 합니다. 말로 신뢰를 쌓으려는 사람들, 말로 일 다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만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끝은 금방 드러납니다.
우리가 힘든 일을 겪을 때,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말로 신뢰를 쌓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우리를 버리고 도망쳐버립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통을 보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조심하세요. 이런 사람은 분명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을 쉽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주님이라고 말하면서 왜 실천하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따른다는 것은 말이 앞서는 믿음이 아닙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실천이 있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믿는 사람은 실천합니다. 반대로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이 늘 살아 숨을 쉬는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선함의 실천이 우리 믿음을 더욱 밝기 빛내기를 희망합니다.
양발은 치명적입니다.
축구를 보다 보면
축구 해설하시는 분들이
양발을 쓰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설명합니다.
양발을 쓰면 수비수가 양쪽 다 신경 써야 하기에
수비하기 더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쪽으로든 슛을 할 수 있기에
성공률도 더 높다고 합니다.
양발을 쓰는 축구 선수는 치명적 매력을 지닙니다.
우리 신앙의 길에도 두 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이고 또 하나는 감성입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이성적인 앎을 갈구하고
하느님을 느끼고자 하는 감성적인 일치를 염원할 때
우리 신앙은 치명적은 매력을 지닌 것입니다.
이성적인 것만을 추구한다면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감성적인 것만을 추구한다면 이성적인 뿌리가 없어서 신앙은 늘 다른 이단적 바람에 흔들리거나 뿌리가 뽑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치명적 매력을 발산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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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8월 말에 휴가를 갔습니다. 우선 아버지 기일을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오랜만에 대전교구 동창 신부들도 만나고, 그다음 혼자만의 여행으로 경상도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특별히 ‘사유원’이라는 수목원을 방문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이번 혼자만의 여행 중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기대한 만큼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수목원의 이름처럼, 혼자 걸으면서 많이 생각하고 또 벤치에 앉아 쉬면서도 생각하고 또 식사하고 물 마시면서도 생각하면서 이 안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 생각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너무 덥다.’
그때 기온이 36도였습니다. 따갑게 느껴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걷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계속 쏟아지는 땀방울도 저를 힘들게 했지만, 무엇보다 제 곁을 떠나지 않는 날파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어떤 생각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자그마한 날파리 때문에, 항상 겪는 여름 날씨인데도 덥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생각의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우리가 겪는 모든 분심이라는 것도 특별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별것 아닌 것이 우리 생활 자체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모두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에게서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라고 하십니다. 좋은 나무인 주님이시기에 주님에 붙어 있는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주님께 붙어 있지 않고 다른 곳에 붙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 붙어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온갖 유혹도 주님을 통해 이겨낼 수 있으며, 고통과 시련 안에서 주님이라는 희망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붙어 있기 위해서 주님의 말을 듣고 실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더 단단하게 붙어 있게 됩니다. 강물이 들이닥치는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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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언제나 현재에 집중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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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좋은 사람이 되길, 반석 위의 인생집을 원하십니까?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십시오!”
-늘 깨어 한결같이-
요즘 제 기상 시간은 밤12-01시 사이입니다. 요즘 나라 걱정, 세계 걱정이 커질수록 잠도 줄어든 듯 저절로 잠깨게 됩니다. 일어나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를 나서면 불암산 정상과 배경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집무실에 들어서면 예수님 십자가 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을 바친후 만세육창후 매일 강론 쓰기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주님의 기도”를 모르는 가톨릭 교회 신자들 없듯이, “애국가” 모르는 한국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애국가이자 그대로 우리의 염원이 배어있는 기도이자 성가입니다. 그래서 요즘 면담성사차 집무실에 오는 분들은 예외없이 고백성사 보속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사랑하듯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국가를 소리내어 부르도록 합니다.
이어 강론 쓰기전 인터넷을 열고 국내외 뉴스를 일별해 보고 교황님 홈페이지에 들어가 샘물같은 뉴스가 있는가 확인해 봅니다. 새삼 지옥은 텅비어 있다는 농담같은 말을 실감합니다. 온갖 악마들이, 괴물들이 활개치는 국내외 세상이 된 듯 합니다. 참으로 내가 참으로 살아 있는 참사람인지 늘 깨어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 인생 여정중인 우리에게 악마나 괴물 역시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보고 배울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불행입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 정말 도덕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반듯하고 정의롭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브란트, 만델라, 김대중 같은 위대한 지도자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때로는 천박하기가 조폭 두목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자기 철학을 지닌 사상가라 할 수 있는 거인이 없습니다.
수십년전 어느 수녀님이 던진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는 넋두리 같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국가 지도자는 그 국민들 수준이라는데 사람들 역시 세속화되어 가치관도 없고 드높은 이상이나 도덕관념을, 세상이나 인생을 보는 눈을 잃은 듯 합니다. 역사의 진보라가 보다는 역사의 퇴행이요 역행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참사람 넷을 만납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바오로, 그리고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이고 후에 설명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핵이 부를 파멸을 내다본 원자탄의 아버지라는 오펜하이머의 후회하는 마음으로 쏟아 놓은 고백입니다.
“나의 일생을 후회한다. 내가 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했을 일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인공지능(AI)의 대부라 불리는 제프리 힌턴은 구글을 퇴사하며 후회 가득한 고백을 하며 AI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흡사 원자탄의 개발로, 인공지능의 개발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지옥문이 열린 듯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나 이제나 끊임없이 한결같이 자문해야 할 물음입니다. 참으로 늘 활짝 깨어 한결같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여 참 좋은 사람, 참 거룩한 사람이 되어, 반석 위의 인생집을 짓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반갑게도 교황님 홈페이지 1면 기사가 좋아 소개합니다. 교황님이 베네딕도회 봉헌자들과의 알현시 하신 말씀입니다.
“베네딕틴의 정신은 말할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 넓어진 마음으로 특징지어 진다.” 이어 ‘하느님을 찾음’, ‘복음을 향한 열심’, ‘환대’, ‘하느님 사랑을 추구하고 그 증인이 되며, 환영하는 사랑’을 지닐 것을 촉구하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 영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살아 있는 성인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금세기 교회에 또 세계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의 평지설교의 결론 부분으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와 “내 말을 실행하여라” 두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 사람의 행위를 보면 사람을 압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이듯 좋은 사람에서 좋은 행위들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열매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사람도 똑같습니다. 나는 과연 좋은 열매를 내는 좋은 나무, 좋은 행위를 하는 좋은 사람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이 진리의 복음 말씀을 부정할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와 다릅니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선택하여 부단한 실행의 훈련으로 말씀을 습관화할 때 좋은 마음, 좋은 사람으로 변모하니 그대로 주님 은총의 기적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자발적 기도와 회개, 말씀공부와 실행이 중요합니다.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위의 열매이지만,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부단히 실행함으로 마음도, 사람도 선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나를 탓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말씀 사랑과 실행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들은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과연 이런 반석 위의 인생집이요,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요 나라입니까? 이와 반대의 경우도 그 묘사가 실감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요 공동체요 국가입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흡사 총체적 난국을, 총체적 위기를 맞이한 국내외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무엇보다 국내 상황이 너무 위중하고 위태해 보입니다. 곳곳에서 화산처럼 터져 나오니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아, 이 모두가 궁극으로는 하느님을 떠난 업보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한 자업자득입니다. 정말 괴물이, 악마가 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말씀을 실행하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을 다하며 제대로 깨어 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회개와 감사의 고백기도를 바치는 제1독서의 바오로입니다.
“나는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톨릭 교회의 유구한 살아 있는 전통의 생생한 증거가 성인들입니다. 우리는 참사람, 성인 둘을 만납니다. 로마의 주교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입니다. 한결같이 주님을 믿고 사랑하다가 3년 사이 나란히 순교한 성인들이요 친구인 두분 사이의 우애도 깊었습니다. 성 치프리아노가 고르넬리오 교황에게 쓴 편지중 일부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둘 중 하나에게 곧 죽음의 은총을 주신다면, 우리의 우정은 주님 앞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우정이요 두분 다 참사람의 성인들임을 입증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 좋은, 거룩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도록 도와 주십니다. 바오로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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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살펴야지요>
내 곁의
모든 것이
무릇
나에게서
비롯하는 것이니
내 곁의
그 무엇을
탓하기에 앞서
나를
살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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