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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한 주인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아무래도 초대받은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겠지요.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고 정말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할 때일 것입니다.
잔뜩 차려진 음식 앞에 손님들이 눈이 휘둥그래 지면서 정신줄놓고 폭풍 흡입할 때, 초대한 주인도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신이 날 것입니다.
숱한 고민과 갖은 정성 끝에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차려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깨작깨작 먹는다든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며 한 젓가락만 먹고 딴청 피운다든지, 요즘 금식기도 중이라며 아무리 음식을 권해도 고개를 흔든다면 초대한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해 준비한 풍성한 천상잔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구약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약시대는 한 마디로 잔치의 순간입니다. 축제와 환희의 기간입니다.
이토록 흥겨운 순간, 보속과 단식, 눈물과 통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흥겹게 춤추며 잔치를 즐길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우리 각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면서 즐기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단식은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 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잔치를 즐기고 축제를 만끽하라는데 즐길 구석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뭘 즐기라는 거냐는 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은 즐길 거리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하수(下手)에게는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겠지만 고수(高手)에게는 삶이 온통 호기심 천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자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태오 9,14-15
단식의 이유가 하느님이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단신 논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는 단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단식은 신랑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희생은 이웃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모든 희생은 피 흘림입니다.
피는 생명인데 내가 흘리는 피로 끈끈한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부부관계이고 가정이고 나라이며 넓게는 인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남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까요? 어차피 세상은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희생을 합니다.
그 희생이 자기 자신이 될 때는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에서 주인공은 호화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성공한 월스트리트의 경영자 잭 캠벨입니다.
그는 직업적 성공을 위해 개인적인 관계와 가족생활을 희생하면서 자기 경력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잭은 의문의 남자와의 이상한 만남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다음 날 아침 대체 현실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새로운 삶에서 그는 더 이상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며, 대학 시절 연인 케이트와 결혼한 평범한 교외 가장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으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방향 감각을 잃고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잭은 점차 사랑, 가족, 일상의 단순한 기쁨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가족의 따뜻함, 부모로서의 도전과 보상, 헌신적인 파트너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 대체 생활에 더욱 몰입하면서 그는 개인적인 관계보다 자기 경력을 우선시함으로써 자신이 놓쳤던 것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됩니다.
어차피 고생하는 것으로 따지면 같은데 결국 나 자신을 위해 고생했던 것은 외로운 지옥이었음이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단식은 이러한 희생과 같습니다.
희생의 목적은 소속감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만을 위한 희생이라면 그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희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영화의 주인공이 가정을 위해 사기를 치고 도둑질하며 살인까지 저지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고 가족들은 그러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하는 희생이 가정을 위한 것이라면 가정을 지켜주는 더 큰 공동체인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도 지키고 세금도 냅니다.
하지만 오염으로 지구가 멸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가정을 위한 사랑은 온 인류를 위한 사랑과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가다 가장 큰 공동체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이요 모든 공동체의 원인인 하느님과 그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기준이 먼저 신랑이신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도, 나라도, 가정도, 배우자에 대한 희생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국가 유공자로서 가정에서도 환영받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희생이 이기적이지 않도록 모든 공동체의 원인이 되는 하느님을 위한 희생이 되게 합시다.
그러면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단식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희생으로 온 인류, 나라, 가정, 배우자를 위한 희생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시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이 사순시기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 15)
잔치도
공감도 모두
가장
좋은 것만을
내놓으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삶이라는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마음과의
만남이다.
서로의 마음을
아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야말로
믿음의 잔치요
믿음의
단식이다.
믿음도
단식도
안과 밖을
비워내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속일 수 없는
우리들
현실이다.
이 현실은
우리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된다.
단식은
말이아닌
행동이다.
너무 많은
생각속에
살고있다.
좋은 실천이
좋은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잔치의 시간과
신랑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단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잔치의 식탁과
단식의
식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본다.
관계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비워야
더 깊어지는
관계이다.
사순시기는
비워내는
믿음의
시간이다.
하느님으로
채우기위해
비워내는 것이다.
비워내는 것이
내려놓고
맡기는 믿음임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우리의
생활안에서
우리의
관계안에서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비자들에게 종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후에 신앙을 버리시는 분을 종종 보게 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는데, 지금의 불행을 해결할 수 없다면서 기껏 얻은 신앙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큰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말씀하십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데 하느님 믿으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 중에서 너무 미운 사람이 있다면서, 어떻게 성당 다니면서 저럴 수 있냐고 그런 사람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듭니다.
사실 종교로 인해 세상 안에 혼란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을 비롯한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중세에는 선교를 명목으로 한 식민지 지배도 있었습니다. 최근 탈레반이 저지르는 만행까지 종교인의 잘못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교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면서 행복해하시는 분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문제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따르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 안에서 올바른 가치와 의미를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야 종교 잘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행복의 기준 자체를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의미와 가치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단식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음을 두고서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에 두 번 단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는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단식의 의미와 가치는 보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식의 의미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을 동참하는 이유로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으로 절약한 것을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봉헌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주님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가치와 의미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평생 마음을 맞대면서 산다(김재식).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
'예수님의 단식!'
오늘 복음(마태9,14-15)은 '단식 논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다른 사람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혼인 잔치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구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단식에 대한 말씀인 오늘 복음과 독서(이사58,1-9ㄴ)를 통해 '예수님의 단식', 곧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단식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단식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과 독서가 전하는 단식, 곧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식과는 크게 다릅니다.
오늘 독서는 '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6-7)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나쁜 영들이 없어지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단식'이며, '단식의 본질'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는 이런 단식을 자주하고,
그리고 많이 합시다!
7)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이사58,6)
주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은
우리의 이기심을 끊어내는
단호한 사랑이라네.
그 사랑을
불의하게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이들
떠도는 이들
굶주린 이들
헐벗은 이들의 몫으로
돌려주려는 거룩한 자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단식이라네.
복음 말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