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77
5월1일[노동자의 성 요셉 대축일/부활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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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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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7FKYHS98bbw
(원동일 프레드릭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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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요셉처럼 그 작은 일들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양부(養父)로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엄청난 이바지를 하신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의 희생과 헌신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하느님께 사랑하는 약혼녀 마리아를 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함께 평범하지만 단란한 가정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녀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셉은 군말 없이 수용했지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배신감과 서운함을 감출 길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하루아침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요셉을 과묵하고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참 신앙이었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그 어떤 토도 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당장 이집트로 떠나라니 순순히 떠났습니다. 돌아오라니 돌아왔습니다. 평생토록 그저 묵묵히 나자렛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크게 일조한 요셉이 당대 잘 나가던 고관대작이 아니라는 것, 시대를 주름잡는 엄청나고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대신 그저 평범하고 가난한 목수였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요셉이 엄청난 부자여서, 우리나라로 치면 한강 뷰가 좋은 초고층 100평 아파트에 사셨다면, 막대한 시세를 호가하는 노른자위 부동산의 소유자였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가난하게 이 땅에 오시고,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순례자로 사셨던 예수님의 배경이요 디딤돌이 되어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매일 하는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자신을 증거합니다. 요셉은 엄청 대단한 일이나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자신이 행하던 작은 일들, 톱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고, 못질을 하는 일에 충실함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과연 우리는 요셉처럼 매일 우리 손으로 하는 작은 일들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요셉처럼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일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요셉처럼 그 작은 일들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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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목자와 삯꾼>
한국 천주교는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사가 먼저 들어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선교사를 요청한 유례가 없는 교회입니다. 즉, 성호학파와 남인계 실학자들에 의해 천진암-주어사에서 처음엔 학문으로 시작했다가 차차 종교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각기 주교, 사제 등의 성직을 만들어 자신들이 미사를 행하기도 하였지만(가성직자 제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비밀리에 선교사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성직자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입니다. 그러나 신유박해를 거치며 조선은 다시 성직자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의 숫자는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성직자들을 모셔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온 유럽 교회에 퍼져있었기에 당시 선교회들은 조선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파리외방 선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한 분, 브뤼기에르 신부가 나서서 자신이 그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겠다고 나섰고 그렇게 그분은 초대 조선교구장이 되신 것입니다.
파리외방 선교회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를 들었을 때, 브뤼기에르 신부는 또박또박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 전교회는 현재 기금이 없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2. 해외에 파견할 선교사가 부족하다. “선교사가 지금보다 많았던 때는 또 언제입니까?”
3.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조선의 양 떼들이 당하고 있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습니다.”
4. 조선 포교지로 선교사가 들어가기 어렵다. “예전에 중국인 사제 한 분이 조선에 들어가서 순교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5.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 선교회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데, 이 말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파리외방선교회의 걱정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저 위험한 조선 사목을 맡겠는가?”
브뤼기에르 주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75일간의 생사를 건 위험한 항해와 3년여에 걸쳐 남에서 북으로 중국 땅을 횡단하다가 결국 힘이 다하여 조선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마가자라는 곳에서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한여름에도 파란 눈과 큰 코, 노란 머리를 감추기 위해 거지 복장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다녔고, 기후와 음식, 피로와 열병 등 그 풍토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여행 중 파리외방선교회에 자신이 못 이룬 일을 부탁하였고, 모방, 엥베르, 샤스탕 등 의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교구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참조: 개포동 성당,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를 찾아서(유투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고 하시며, 위험이 닥쳐 양들을 버리는 목자는 ‘삯꾼’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브뤼기에르 조선교구 초대 주교님을 비롯하여 많은 참 목자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한국천주교회가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목숨을 다시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상황을 보더라도 미사나 강의, 특강을 할 때마다 사례비를 받습니다. 강의할 때 기쁘게 하지만 막상 그 봉투를 받을 때쯤엔 왠지 그것 때문에 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데 쓴다는 명목으로 받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어찌 자녀에게 무언가 받으며 자녀를 보살피고 키워줍니까? 저는 아무래도 아직은 ‘삯꾼’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사랑이 불타고 있기에 내가 행복해서 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그런 목자가 될 날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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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성삼일 전례는 3개 공동체가 함께 하였습니다.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입니다. 성가대는 한국어 공동체와 스페인어 공동체가 함께 하였습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3개 공동체가 같이 하였습니다. 강론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하였습니다. 미사 경본은 영어, 스페인어를 같이 보았습니다.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후에는 3개 공동체가 함께 성체를 모시고 행렬을 하였습니다. 성 금요일에도 십자가를 들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거리에서 하며 성당으로 왔습니다. 공동체의 규모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지만 함께 성삼일 전례를 하였고 부활의 기쁨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3개 공동체가 함께하면 분명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전례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다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울 점도 있습니다. 스페인어 공동체는 생동감이 있고 신심이 깊습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많아서 활력이 넘칩니다. 한국어 공동체는 짜임새가 있고 질서정연합니다. 영어 공동체는 마을 앞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3개 공동체의 중심에서 균형을 이루어 줍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사이좋게 지내니 삼위일체의 신비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모든 인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3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오늘은 1조와 2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며 서로 동포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국민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이들과 유사한 그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도 차별을 받지 않고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2번의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고, 죽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행된 식민지 건설은 약소국의 시민들을 차별하였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다시는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인권 침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성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지 75년이 지났습니다. 국제적인 전쟁과 식민지 지배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국지적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그로 인한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곳에서 인간의 기본 권리가 침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세계인권선언’을 하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세계인권선언’이 실현되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입니다.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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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착한 목자는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당신의 몸과 피를 성사로 변화시켜 당신이 구원하신 양들에게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착한 목자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이에 반해 삯꾼은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인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이리가 양들을 습격하면 도망을 가고 만다. 삯꾼에게는 이리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랑도 없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이 관계는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신 관계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된다. 주님은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두고 달아나지 않는다.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신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 양들을 지키신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 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가르쳐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이시므로 그 뜻을 이루신 아드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 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절).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이다. 이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도 항상 그 관계 안에서, 성령 안에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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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제 잇속만 챙길 뿐 그들을 돌보지 않는 임금과 사제들을 ‘거짓 목자’라며 꾸짖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당신 양 떼를 찾아 돌보시겠다고, ‘착한 목자’를 세우시어 당신 백성을 구원하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예레 23,1-8; 에제 34; 즈카 10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된 ‘착한 목자’가 바로 당신이심을 밝히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우리의 진실한 관계가 참된 ‘앎’에서 시작되며, 그 앎은 성부와 성자 사이 일치의 관계만큼이나 구체적이고 생생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사랑한다고, 그분께 온 생을 걸어 희망한다고 말하는 믿음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은 복음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힘 있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목자들을 신뢰하며, 미사 참례에서 나아가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고 함께 나누면서 참목자이신 주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아는 만큼 믿게 되고, 아는 만큼 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종한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던 사도들과 유다계 신자들이 ‘한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모아들이시는 주님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목자 베드로가 있었고 또 그 목자의 말에 양들이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목자와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주님을 더 알아 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삯꾼과 도둑의 소리를 걸러 내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참으로 알아들으며, 영원한 천상 목장으로 향하는 그분의 사랑받는 양 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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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우종선 라우렌시오 신부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살아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니 재미있고 즐거운 것은 내가 살고, 하기 싫고 힘든 일만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 나아가 나를 대신해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착한 목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삯꾼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삯꾼은 자신이 바라는 것만 얻으면 되기에, 맡겨진 양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양이 위험에 빠져도 자신만 안전하면 되는 것이고 약속대로 주어진 삯만 받아 챙기면 그만인 것입니다. 책임질 만한 것에 대해선 너무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전혀 다릅니다. 맡겨진 양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간지러운 곳은 긁어주고 상처 난 곳은 동여 매주며 어딘가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양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피고 어루만져 줍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양들이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자신의 안전은 생각지 않고, 위험을 무릎쓰고 양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뿐만 아니라 목자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위험 속에 헤메이는 양들도 불러모으고 똑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착한 목자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사랑의 명령을 몸소 받아들이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양들이 또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착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선한 양이 되어야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할 수 있으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너무 잘 알아듣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목자의 소리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릅니다.
우리는 모두 선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목자와 선한 양! 그 자체도 너무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선한 양이 되기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양이 목자를 비판만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양이 목자에게 착한 목자가 되어 달라고만 요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신․반목으로 상처만 커져가고 평화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정을 예로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선 모두가 양의 상황에 놓여 있지만 가정 안에서는 목자의 입장에도 놓여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본받아 살아가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너무 힘에 부쳐서 목자의 입장을 포기하는 예도 종종 있다고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하기에 좋은 모든 것을 다 주시려 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아프면 대신해서 아프기를 바라고 자녀를 대신해 죽기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 앞에서 자녀들이 선한 양으로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가정에는 평화와 행복이 철철 넘쳐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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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밝히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자기 탐욕의 도구로 삼거나, 늑대와 이리의 공격에 나 몰라라 하며 자기 살 궁리만 하는 나쁜 목자와는 다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과 소통하는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서로를 안다는 말은 성경에서 자신의 목숨까지 맡길 수 있는 신뢰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착한 목자는 양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양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의 관계를 예표하시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받는 새로운 생명의 권한을 강조하십니다. 그 권한이란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까지 데려오려고 하시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일로 질타를 받자, 환시를 통해 깨우쳐 주신 하느님의 새로운 뜻, 곧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이 유다인만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도 펼쳐졌음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인간의 잣대로 가로막은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목자와 양의 비유는 넓게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 좁게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 자주 쓰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세상에 선포하며, 모든 민족에게 열린 하느님의 구원을 전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도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며, 같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고유한 소명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펼쳐야 합니다. 그것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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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예정출 가브리엘 신부님]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는 사람>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양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맡겨진 양들을 책임집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풀밭이나 목초지로 이끕니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의 지팡이 아래서 편안히 풀을 뜯습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목자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목가적인 모습이 바로 성서가 말해주는 착한 목자와 양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는 착한 목자는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양들은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힘이 우리를 지켜주는 그 믿음 안에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들림 없는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착한 목자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았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사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함께 나누고 함께 베풀고, 함께 도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매순간을 두가지 갈림길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하나는 죽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두갈래 인생길 가운데 항상 생명의 길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를 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제시해주는 바른 삶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릇된 믿음과 그릇된 길은 인간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사람을 구원에로 초대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시대의 잘못을 따라가지 말고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생명을 주는 길이고, 무엇이 우리를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며, 파멸로 내치는 길인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파멸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합니다. 유혹적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은 쉽게 우리를 멸망으로 내칩니다. 쉽게 우리를 구렁텅이에 빠트립니다.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주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로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내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류와 잘못으로 이끄시는 분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들이 잘못살아 그런 길을 걷고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많은 스승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본받아 현인이 되고, 성인군자가 되고, 학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때론 그렇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인생 길을 걸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알고서 잘못된 길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때론 본인도 모르게 어느날 잘못된 길에 들어선 자신을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결점투성이입니다. 부족하기만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바른 인생길을 제시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목장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양들은 목장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습니다. 안전합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가르침 안에 머무를 때, 참된 사랑 안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참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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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것을 감당하라>
“도모시용(道謀是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가에 집을 짓는데, 길 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짓는 것이 좋을까 상의하면 구구한 의견으로 제대로 완성할 수 없는 것처럼 주견(主見) 없이 남의 의견만 좇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거나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앎, 인격적인 일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듯 목자와 양인 우리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잘 아는 관계이기를 희망합니다.
한편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순명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안 듣는다.”라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이가 ‘저놈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라고 말한다면 귀로 듣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한 목자에 한 양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명은 강압으로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목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신 것이지 결코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랑의 응답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인식한다면 자신을 내어 맡기신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아들은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참사랑을 깨우치면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한 집에 살고 있는 개들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였답니다. ‘우리 주인은 나를 좋아해!.’ ‘아니야 나를 좋아해!.’ 옆에서 듣고 있던 늙은 개가 말했습니다. ‘이봐, 주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나야, 나는 내일 주인 뱃속으로 들어가거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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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국가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던 공학도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수사의 능력을 수도회에서 잘 살려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사가 수도회에서는 하는 일은 소위 ‘막노가다’였습니다. 힘쓰는 일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자기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막노가다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수사의 부모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잘하는 일을 시키지 않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소임으로 아들의 훌륭한 재능을 수도회에서 썩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장 수사님께 이점을 항의했습니다. 이에 원장 수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되기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신앙만이 이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신이 가난한 이가 되기를 바라셨을까요? 왜 신성과 권능을 감추고 우리 가운데 그것도 가장 끝자리를 차지하며 살고 싶어 하셨을까요? 생명 자체이신 그분에게 십자가행, 골고타의 수난, 죽음의 치욕이 뭔 말입니까?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은 공학도가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썩을 수 있는 밀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큰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능력을 살려서 일하는 것을 주님께서 과연 원하실까요? 오히려 자기 능력을 감추고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모습을 더 원하실 것입니다. 이런 겸손만이 주님을 제대로 닮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식으로 ‘나는 ~이다.’라는 표현이 모두 7번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의 신성을 사람들의 생명과 관련지어 말씀하시는 표현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분, 특별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착한 목자’로 말씀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확인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인 인지를 넘어 서로 마음이 통하여 마음의 일치를 이루는 친교를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무엇이든 바치는 사랑의 희생을 하는 상호 관계를 말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겸손한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마찬가지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랑을 겸손한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려고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겸손을 묵상해야 합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주님 영광을 드러내는 삶,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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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노동자의 아들>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노동자의 아들>
노동자의 아들 예수가
지혜와 기적의 힘을 지니자
고향사람들은 비아냥댔지
저 사람은
노동자의 아들이 아닌가?
노동자의 아들 예수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노동으로 세상을 빚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으로 스스로를 이루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으로 벗을 섬기는
노동자 아버지 요셉에게서
돌보시는 하느님을 보았겠지
노동자의 아들 예수가
지혜와 기적의 힘을 지니니
나는 고백하리라
저 사람은
노동자의 아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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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식별할 줄 아는>
제가 북한 선교를 하며 그것을 후원하는 후원회 이름을 <한우리 후원회>라고 지은 것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과 우리는 ‘한 우리 안의 우리’라는 의미가 있는 이름이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한 민족의 우리라는 뜻도 있지만 주님의 한 우리 안에 같이 있는 우리라는 뜻이 더 중요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도 잘 알아야 하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같아서 한 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다르지만, 그런데도 주님의 우리 안에 함께 있고, 주님의 한 우리 안에 있기에 같은 양 떼이고 하나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양 떼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우리 안에 있을 것이고, 만약 도둑의 양 떼라면 도둑의 우리 안에 얼마간 있다가 팔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도둑의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는 죽으러 팔려나가지 않고 푸른 풀밭으로 불려 나가는데 주님께서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데려나가신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도매가 아니라 소매입니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입니다. 하나하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가시는 것처럼 하나하나 이름을 다 아시고 각별하게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 양들을 잘 아는 착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렇지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잘 알기에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우리가 뭘 필요로 하고 원하는지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분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인 우리 몫은 무엇입니까? 목자의 양들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자가 자기 양들을 아는 것처럼 양들도 자기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펭귄이나 괭이갈매기가 그 많은 새끼 중에서 자기 새끼를 알고, 그 많은 어미 중에서 자기 어미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앎은 대단한 사랑과 친밀감의 앎이기도 하지만 자기 목자를 모르고 도둑이나 삯꾼을 자기 목자로 알고 따라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기에 친밀 이상의 생명의 앎입니다.
그런데 현대인 중의 많은 이가 어리석게도 주님이 아닌 사이비 교주를 자기 목자인 줄 알고 따라가거나 SNS로만 알 수 있을 뿐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을 마치 목자인 양 따릅니다.
이럴 때 모름은 어리석음이고 치명적입니다. 참 목자를 따르는 양 떼이어야 하는데 떼로 다니기는 하지만 그저 떼로 몰려다닐 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목자를 안다는 것은 식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게 되고, 천상 목자를 따라 주님의 영원한 우리 안에 안전하게 들게 될 겁니다.
그러니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은 의사와 돌팔이를 식별할 줄 아는 것, 그 이상으로 양들에게 참으로 중요하고 목자에 대한 사랑 못잖게 양들이 꼭 갖춰야 할 능력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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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관계의 깊이>
-주님과 우정의 여정-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시편42,3)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의 첫날이자 노동자 성 요셉을 기리는 날이자 근로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근로자의 날이라 하지 말고 그냥 노동자의 날이라 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어제 미사시 화답송 후렴이 아직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성체강복후 퇴장 성가 51장 역시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다시 1절 가사를 음미해 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 다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성가를 들으며 새삼 주님과 관계의 깊이에 대해, 더불어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여정인가에 대해 말입니다. 나이 들어 몸은 노쇠해 가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파스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졌으면 소원이겠습니다. 문득 26년전 이맘때쯤 쓴 “사랑”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래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날로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나이 50이 넘어서부터 해마다 ‘스승의 날’ 전후로 저를 찾았던 옛 초등학교 교사시절 6학년때 제자들 셋이 어제도 저를 찾아와 스승의 날, 어린이날, 과수원길 및 여러 동요를 열창해 줬습니다. 1978년 13살이었던 제자들이 45년이 지난 올해 2023년에는 58세가 됩니다. 그 오랜동안 잊지 않고 계속된 제자들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 역시 새삼스런 감동의 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가 착한 목자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날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관계에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여정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당신을 얼마나 닮았나 우리의 얼굴을 살피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역설적으로 참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바 삯꾼이 아닌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비단 목자인 사제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 본 받아야 할 착한 목자의 영성,희생적 사랑이겠습니다. 과연 착한 목자 영성으로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이어 같은 맥락의 말씀이 반복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과 서로 앎의 우정관계가 깊어지면서, 더불어 아버지와의 앎의 우정관계도 깊어짐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서 깊이 깨닫는 바 예수님의 자유로움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앎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자유로워짐을 봅니다. 사랑과 앎과 자유는 함께 갑니다. 그리하여 자발적 순교의 사랑도 가능한 것입니다.
어제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수녀님에 관한 감동적 예화를 들었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과 추기경님, 그리고 수녀님의 깊은 우정을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추기경님과 수녀님은 착한 목자 예수님과의 깊은 우정의 사랑을 공통으로 하고 있었기에 서로 간의 깊은 영적 우정도 가능했음을 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과 깊어가는 우정과 더불어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도 저절로 깊어간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진정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치의 수도공동체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착한 목자 예수님 말씀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새삼 교회의 근본적 존재이유는 선교임을 깨닫습니다. 선교없이는 성소도 없습니다. 어제 영어 미션(mission)의 이중적 뜻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미션은 선교 또는 사명으로 번역될수 있고 바로 교회의 선교는 그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의 사명,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참으로 이런 착한 목자 예수님의 의중을 깊이 깨달은 착한 목자의 모범이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주님과의 영적우정이 날로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계속 선교적이 됨을 봅니다.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에 결정적 깨달음이 되었던 무아경에 환시 신비 체험 중 인상적인 대목을 소개합니다. 여러 짐승들이 담긴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베드로 앞에 놓이고 이어지는 대화입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주님, 절대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베드로의 편협한 시야는 이런 충격적 체험으로 한층 깊고 넓어졌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자기의 벽(壁)은 활짝 열린 문(門)으로 바뀐 것이지요! 이어지는 확신에 넘친 베드로의 고백과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이 감동적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에 화답하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얼마나 멋진 장면인지요. 먼 이방의 한국에까지 선교가 이루어져 우리가 착한 목자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은총이자 선물인지요! 새삼 착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독점 자산이 아니라, 인류의 공공(公共) 자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가면서 선교적이 될 수 뿐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며 더욱 선교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시편43;3ㄱ.4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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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10,11)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가자!>
오늘 복음(요한10,11-18)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은 '착한 목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안에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두 가지 중요한 표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문이라고 하시면서 당신을 통해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의 표상은 '목자(牧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지만, 삯꾼은 양들을 위협하는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10,11)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10,16)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0,17)
우리의 신원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나도 너를 위해 죽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원은 '착한 목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제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제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3 '완전한 순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장상이 아랫사람에게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하도록 명한다면, 그 장상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를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버리지 맙시다! 착한 목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제들을 버리지 맙시다!
오늘은 '5월 성모성월이 시작되는 첫 날'입니다. 우리의 보호자요 모범이신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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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wv8BlKay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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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달력 한 장을
넘기니 성모님의 달
5월을 맞이합니다.
삶을 지탱해온 것은
말씀과
노동이었습니다.
우리의
노동으로
말씀의
깊이를
만납니다.
삶을 해석하는
노동입니다.
노동으로 지친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를
노동자
성 요셉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가장 깊은
사랑을
배웁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더 아름다워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봉헌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노동자의
손끝에서
시작되어
기도가 되고
희망이 됩니다.
모든 질서는
노동을 통한
사랑이며
구원입니다.
길을 닦듯
제 마음을
닦습니다.
삶의 무게는
노동의
무게입니다.
우리의 노동으로
주님의 만찬 미사는
더욱 소중한
잔치가 됩니다.
먹여 살리시는
예수님의 사랑도
지켜야 할
말씀을
끝까지 지켜낸
성 요셉의 사랑도
무엇이든지
주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셨던
성모님의 사랑도
모두 땀 흘리시는
노동의 사랑이었습니다.
노동이 삶의
기본이며
기초입니다.
단단한 사랑
뜨거운 수고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기도를 지나고
노동을 지나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말씀의 참된
탄생입니다.
말씀은
수고로운
노동의 풍경이
우리의 애틋한
삶임을 잘
가르쳐줍니다.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이
행복히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노동 안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으로
머무르셨던
예수님을
다시 뵙는
오월의 첫날입니다.
말씀과 노동
사람과 수고로움은
사랑과 존중으로
더욱 깊어지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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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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