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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제4권 / 세기(世紀) 4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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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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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부여국은 지금의 봉천부(奉天府)의 개원현(開原縣)이니 본디 우리나라의 구역 안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부여는 구려(句麗)와 백제(百濟)가 일어난 곳이기에 특별히 똑같은 예로 기(紀)를 둔다.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상서전(尙書傳)》에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자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와 부여(夫餘)의 족속이 모두 길을 통하였다.”고 하였고, 《산해경(山海經)》에는 “대황(大荒)의
북쪽에는 호(胡)가 있다. 불여(不與)란 나라로 성은 열(烈)이고, 기장을 먹는다.”고 하였다.
‘불(不)’이 중국 음(中國音)으로는 ‘부(夫)’이니 불여국은 바로 부여국이다.
그리고 《풍속통(風俗通)》에는 구이(九夷)의 조목 가운데 부유(鳧臾)가 있는데, 부유 역시 부여이다.
《통지(通志)》의 씨족략(氏族略)에 나오는 ‘부유씨(鳧臾氏)’는 백제(百濟)의 부여(夫餘)인데 음이 변하여 부유로 된 것이다. 또 기자(箕子)의 이름인 서여(胥餘)가 혹 수유(須臾)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대개 부(鳧)와 부(夫)는 음이 서로 비슷하고, 유(臾)와 여(餘)는 옛날에는 서로 통용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부여라는 명칭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 부여국은 현도(玄菟)의 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읍루(挹婁)와,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였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지방이 2천리이고, 본디
예(濊)의 땅이다.
○ 처음 북이(北夷)의 색리왕(索離王)이 살펴보건대, 색(索)은 혹 고(櫜)로도 되어 있다. 출행(出行)하였었는데, 시아(侍兒)가 그 뒤에 임신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죽이려고 하자, 시아가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계란만 한 크기의 무슨 기운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시아를 가두었는데, 뒤에 드디어 남자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주어 죽지 않게 하고, 다시 마구간[馬蘭]으로 난(蘭)은 바로 난(欄)이다.
옮겨 내다버렸으나 말 역시 그렇게 하였다. 왕이 이에 신령스럽게 여겨 그 어미에게 데려다가 기르게
하였는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은 자라나면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이 그의 용맹을 꺼려서 죽이고자 하니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쳤다.
엄사수(淹㴲水)에 지금 고구려(高句麗) 가운데에 개사수(蓋斯水)가 있으니 이 강물이 그것이 아닌가 싶다.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떼를 지어 물위로 올라왔으므로 동명이 이를 타고 건너갔다.
이어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이의 지역 가운데서 땅이 가장 평평하고 넓어 오곡(五穀)이 잘 자라며,
궁실(宮室), 창고, 뇌옥(牢獄)이 있다. 사람들의 성품은 굳세고 용감하고 신중하고 관대하며,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 병기(兵器)를 삼는다. 육축(六畜)으로 관직의 이름을 지어
마가(馬加)ㆍ우가(牛加)ㆍ구가(狗加) 등이 있으며, 읍락(邑落)은 모두 여러 가(加)에 속한다.
《이상 모두 후한서》
○ 부여국은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천 리이다. 호구가 8만이며, 산과 구릉 및 넓은 늪이
많다. 나라에는 군왕(君王)이 있다. 읍락에는 토호가 있는데, 하호(下戶)들을 모두 노복으로 삼는다.
여러 가(加)가 각각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세력이 큰 자는 수천 호를 주관하고 작은 자는 수백 호를
주관한다. 나라의 기로(耆老)들이 스스로 “옛날에 망명해 온 사람이다.”라고 한다. 나라에 오래된 성(城)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고 한다. 대개 본디 예와 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이 되었던
것이니,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 하는 것은 까닭이 있어서인 듯하다. 《삼국지》
○ 한 광무제(漢光武帝) 건무(建武) 연간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공물을 바치면서 알현하였고,
25년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는데,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이에 사신이 해마다
통하였다. 《후한서》
부여는 고려의 북쪽, 읍루의 남쪽에 있는데, 후한(後漢) 때부터 중국에 조공하였다. 《통전》
○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 왕이 비로소 보병과 기병 7, 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침략하여 관원과 백성을 살해하였다. 그 뒤에 다시 귀부하였다. 《후한서》
○ 영녕(永寧) 원년(120) 12월에 부여에서 맏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한나라 궁궐에 나와 공물을
바치자,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하사하였다. 《상동》
○ 연광(延光) 원년(122) 2월에 부여 왕이 아들을 부여 왕의 아들 위구태이다.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현도를 구원해 고구려, 마한, 예, 맥을 격파하였다. 《상동》
○ 순제(順帝) 영화(永和) 원년(136) 정월에 부여 왕이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하자
순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牴戱)를 보이게 하고 전송하였다. 《상동》
○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 12월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상동》
○ 《후한서》에 또, “6년에 선비(鮮卑) 단석괴(檀石槐)가 용맹이 있고 지략이 있어서 남쪽으로 변경을
침략하면서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고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퇴각시키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격파하여 흉노(凶奴)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하였다. 그런 다음 스스로 그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러 부여와 예ㆍ맥과 경계를 접해 25개 고을을 묶어
동부(東部)라 하고는 각각 대인(大人)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 영강(永康) 원년(167)에 부여 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를 침략하자,
현도 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고 1천여 급을 목 베었다. 《상동》
○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 정월에 다시 글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본디 현도에
속하였었는데 헌제(獻帝) 때 부여 왕이 요동에 속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한다. 《상동》
○ 유우(劉虞)가 유주 자사(幽州刺史)로 옮겨 가자 백성들과 오랑캐들이 그의 덕화에 감화되어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부여(夫餘)ㆍ예(濊)ㆍ맥(貊)의 무리들이 모두 수시로 와서 조공하였으며,
감히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자가 없었다. 《상동》
○ 한나라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 웅거하여 있으면서 외이(外夷)들을 위엄으로 복종케 하자,
부여 왕 위구태(尉仇台)가 다시금 요동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였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이 두 오랑캐 사이에 처해 있어 위태롭다고 여겨 종녀(宗女)를 시집보내었다.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즉위하였는데, 간위거에게는 적자(適子)가 없고 얼자(孼子) 마여(麻余)만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여러 가(加)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세웠다. 우가(牛加)의 형(兄)의 아들 중에도
위거(位居)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대사(大使)로 있으면서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많이 따라붙었다. 해마다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삼국지》
○ 위 문제(魏文帝) 연강(延康) 원년(220) 3월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상동》
○ 제왕(齊王) 방(芳) 정시(正始) 연간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邱儉)이 구려를 토벌하였다.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파견하여 부여로 보내자, 위거가 견가(犬加)를 교외로 보내어 맞이하였으며,
군량(軍糧)을 대 주었다. 위거의 계부(季父)인 우가(牛加)가 역모할 마음을 품자 위거가 계부의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한 다음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을 장부에 기입하고 관가로 보내었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 의려(依慮)가 나이 6세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상동》
○ 진 무제(晉武帝) 때 자주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부여는 나라가 부유하여서 선조 때부터 나라가
피폐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태강(太康) 6년(285)에 이르러서 모용외(慕容廆)에게 습격당하여 격파되어
왕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목숨을 보존하였다. 이에 무제가 조서를 내기를,
“부여 왕은 대대로 충성을 지켜왔는데,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는바, 내가 몹시 불쌍하게 여긴다.
만약 남아 있는 무리들 가운데 나라를 다시 세울 만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계책을 세워서 그로 하여금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자 유사가 아뢰기를, “호동이 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하니, 무제가 조서를 내려서 선우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교체시켰다.
다음 해에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하감에게 와서, 현재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옛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이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하감이 위에 보고하고는 독우(督郵)
가침(賈沈)을 파견하여 군사를 보내었다. 모용외가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침의 군사를 요격하였는데,
가침이 싸워서 크게 격퇴시켰다. 모용외의 군사가 물러가자 의라는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 뒤에도 모용외가 번번이 부여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다 팔았다. 이에 무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또다시 조서를 내려서 관가의 물품으로 속(贖)한 다음 돌려보내었으며, 사주(司州)와 기주(冀州) 두 주에
조서를 내려 부여 사람들을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진서》
○ 《자치통감》에는, “하감이 가침을 보내어 의라를 호송하게 하였는데, 모용외가 그의 장수 손정(孫丁)을
보내어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요격하게 하였다. 이에 가침이 온 힘을 다해 싸워 손정의 목을 잘라
드디어 부여가 나라를 회복하였다.” 하였다.
○ 목제(穆帝) 영화(永和) 2년(346)에, 이에 앞서 부여가 녹산(鹿山)에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녹산은 대개 바로 그곳이다.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지자,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는데, 연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보내어 모용군(慕容軍)ㆍ모용각(慕容恪)ㆍ모여근(慕輿根) 등
세 장군과 군사 1만 7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군사에 관한 일을 모두
모용각에게 내맡겼다. 드디어 부여를 격파하고 부여 왕 현(玄)과 부락 사람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왕 현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삼고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자치통감》
○ 해서공(海西公) 태화(太和) 5년(370)에 진왕(秦王) 견(堅)이 연의 수도인 업(鄴)을 공격하자 연의
산기상시(散騎常侍) 여울(餘蔚)이 부여와 고구려 및 상당(上黨)의 인질 5백 명을 이끌고 밤중에
업의 북쪽 성문을 열고 진의 군사를 끌어들였다. 《상동》
○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에 모용수(慕容垂)가 업을 취하고자 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왔다. 옛 부여 왕(夫餘王)인 여울(餘蔚)을 영양 태수(榮陽太守)로 삼았다. 창려(昌黎)와 선비(鮮卑)가 무리를
이끌고서 모용수에게 항복함에 미쳐서는 모용수가 여울을 정동장군 통부좌사마(征東將軍統府左司馬)로 삼고
부여 왕에 봉하였다. 《상동》
○ 21년(396)에 연왕(燕王) 보(寶)가 부여 왕 여울로 태부(太傅)를 삼았다. 《상동》
○ 살펴보건대, 여울은 본디 부여 왕의 아들이다. 연왕 모용황이 부여를 격파하고 잡아 온 것이다.
여울은 연이 망하자 진으로 들어갔으며, 진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다시 연으로 돌아갔다.
이에 연왕 모용수가 부여 왕으로 봉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부여는 동사(東史)에는 부(夫)가 부(扶)로 되어 있다. 처음에 북부여(北夫餘)라고 칭하였다.
뒤에 왕인 해부루(解夫婁)가 단군(檀君)의 아들인 해부루(解夫婁)가 아니다. 금와(金蛙)에게 전하고 금와가
도읍을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동부여(東夫餘)이다. 예전의 도읍지에는 해모수(解慕漱)라고
칭하는 자가 와서 도읍하였다. 금와의 말기는 한나라 성제(成帝) 때에 해당된다. 뒤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는데,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격살되었다. 이때는 신망(新莽) 지황(地皇) 3년(22)이다.
대소의 동생이 갈사수(曷思水)로 도망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가 갈사왕(曷思王)이다. 그의 손자인
도두(都頭) 때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에게 항복하였다. 동부여가 망한 것은 바로
한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11년(68)이다. 그 뒤에 남은 종족이 있어 진(晉)에 사신을 통하였는데,
이름을 의려(依慮)ㆍ의라(依羅)라 한다. 왕 현(玄)에 이르러서 마침내 모용씨(慕容氏)에게 병합되었다.
[주-D001] 부여(夫餘) :
기원전 1세기경부터 300년까지 현재의 북만주(北滿洲) 농안(農安)ㆍ장춘(長春) 일대에 웅거하였던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하나이다. 그 강역은 동쪽으로는 읍루, 남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선비ㆍ오환과
인접하였다. 일찍부터 농경 생활을 하였으며, 중국의 철기 문명을 수입하고 은력(殷曆)과 복골(卜骨)을
사용하였다. 중국 정사(正史)에 보이는 부여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와 《후한서》가 있으며, 이밖에
《진서(晉書)》ㆍ《통전(通典)》 등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의 멸망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없으며, 대체로 4세기경부터 고구려의 판도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9~151쪽》
[주-D002] 읍루(挹婁) :
만주에 있던 부족명으로, 장백산(長白山)의 북쪽 목단강(牧丹江) 유역에서 연해주(沿海州) 및 두만강에까지
퍼져 살았는데,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부여에 복속되어
있던 미개 종족으로 군장(君長)은 없고 각 부락마다 추장(酋長)이 있었으며, 모두 부여에 조부(租賦)를
바쳤다. 언어는 부여와 달랐으며, 주로 돼지를 사육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통상적인 유목 민족과는 다른
특성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8쪽》
[주-D003] 선비(鮮卑) :
고대 아시아 민족의 하나이다. 전국 시대 무렵에 만주(滿洲)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그 일파가
3세기경에 거란족(契丹族)으로 발전하였다.
[주-D004] 약수(弱水) :
약수라는 이름은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에 처음으로 나오며,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이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병도는 여기에서의 약수를 송화강(松花江)을 지칭하는
듯하다고 하였고,《韓國古代史硏究 3쪽》 북한에서는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하였다.
[주-D005] 색리왕(索離王) :
탁리왕(橐離王)ㆍ고리왕(稾離王)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것이 고려(高麗), 혹은 구려(句麗)를
달리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06] 엄사수(淹㴲水) :
엄니수(掩泥水)ㆍ엄시수(掩施水)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기되나, 이는
엄니수(掩泥水)를 잘못 쓴 것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가 틀림없다.
엄리는 큰물이라는 뜻인 ‘엄내’로서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나, 또는 송화강 상류의 휘발하(輝發河)를
지칭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07] 육축(六畜)으로 …… 있으며 :
마(馬)ㆍ우(牛)ㆍ구(狗)ㆍ저(猪) 등 가축의 이름을 붙인 것은 축목경제(畜牧經濟) 시대의 축산별(畜産別)에
의한 족장의 칭호가 그대로 계급 문화에 잔존한 것이며, 가(加)는 처음 족장의 칭호에서 씨족의 붕괴와
계급의 분열로 인하여 대관(大官)ㆍ장관(長官)의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0쪽》
[주-D008] 가(加) :
이병도는 “가(加)는 만몽계통어(滿蒙系統語)인 한(땀)ㆍ가한(可汗)이나 고조선 및 남방항렬
사회(南方行列社會)의 한(韓)ㆍ간(干)ㆍ한(邯)ㆍ금(今)과 같은 말로, 귀인(貴人), 대인(大人)의 칭호이니,
원래는 부족장(部族長)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4쪽》
[주-D009] 사출도(四出道) :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첫 번째는 부여의 지방 행정 구역이라고 보는 설이며,
두 번째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거기서 사방으로 통하는 네 갈래의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설이다.
모두 고대 국가의 지방 지배를 위한 조직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된다. 부여는 중앙에 왕이 있고,
사방에 가(加)가 각 길에 있어서 거기에 소속된 귀족과 서민을 지배하였다. 이병도는 “당시의 행정 구역을
말한 것이지만, 특히 출도(出道)라 한 것을 보면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하여 거기서 사방으로 통하는
가도(街道)를 의미한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5쪽》
[주-D010] 낙랑(樂浪)을 침략하여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낙랑을 침략하였다고 하는 것은 거리상으로 보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이는 필시 현도를 잘못 쓴 것으로 고쳐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9쪽》
[주-D011] 마한 :
이병도는 이곳의 마한은 연문(衍文)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9쪽》
[주-D012] 황문고취(黃門鼓吹) :
악곡(樂曲)의 이름으로, 한나라 광무제 때 황문무무(黃門武舞)를 만들고 여러 신하들과 연회할 때
연주하였다.
[주-D013] 각저희(角牴戱) :
옛날 중국의 유희로, 두 사람이 맞붙어서 힘을 겨루는 놀이이다. 고구려에서도 행하여졌으며,
각희(角戱)라고도 한다.
[주-D014] 단석괴(檀石槐) :
선비족 부족장의 이름이다. 동한 때 흉노(凶奴)의 옛 땅을 차지하여 동부(東部)ㆍ중부(中部)ㆍ서부(西部)의
세 부를 두었다. 한나라에서 왕으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後漢書 卷90》
[주-D015] 정령(丁零) :
흉노 북쪽에 있는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정령(丁零)ㆍ정령(丁靈)ㆍ정령(丁令)으로도 표기한다.
[주-D016] 오손(烏孫) :
한나라 때 서역(西域)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다. 돈황(燉煌)과 기련(祁連) 사이에 살다가 뒤에
대월지(大月氏)를 축출한 뒤 오손국을 건국하였는데,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경내의 온숙현(溫宿縣) 이북에서
이령현(伊寧縣) 이남이 그 지역이다.
[주-D017] 공손역(公孫域)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공손도전(公孫度傳)에는 공손역(公孫琙)이라 하였다.
[주-D018] 공손도(公孫度) :
후한 말기의 장군으로, 본래 요동의 하리(下吏)로 있다가 요동 태수가 되었다. 고구려와 오환(烏桓)을
공격해 세력을 떨쳤으며, 고국천왕(故國川王) 12년(190)에 요동군을 요서군(遼西郡)과 중료군(中遼郡)
두 개의 군으로 만들고 스스로 서서 요동후 평주목(遼東侯平州牧)이 되었다.《三國志 魏書 公孫度傳》
[주-D019] 재산을 …… 보내었다 :
이 부분의 원문은 ‘籍沒財物 遣使簿歛送官’이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람을 파견,
부렴(賦歛) 즉 부세(賦稅)를 가벼이 하여 관으로 보내게 하였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0쪽》
[주-D020] 모용외(慕容廆) :
모용씨(慕容氏)는 선비(鮮卑)의 일족으로, 모용외 때 요하(遼河) 상류에서 일어나 부여(夫餘)를 공격해
동쪽으로 옮기게 하고, 또 요서(遼西) 지방을 침략하여 지금의 금주(錦州) 부근에 있는 극성(棘城)에
도읍하였다. 그 뒤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慕容皝) 때에 이르러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지금의 조양(朝陽)인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여 위세를 떨치면서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주-D021] 백제(百濟) :
《동사강목》에서는 백제는 고구려(高句麗)의 오류인 듯하다고 하였고,《東史綱目 附錄 卷上 考異》 이병도
역시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너무도 거리가 맞지 아니하므로 고구려의 오기(誤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1쪽》
[주-D022] 해서공(海西公) :
진(晉)의 폐제(廢帝) 사마혁(司馬奕)의 봉호(封號)이다.
[주-D023] 해부루(解夫婁) :
‘해(解)’는 해, 즉 태양을 의미하고, ‘부루’는 불로서 광명(光明)이나 신성(神聖)의 개념을 표시한다.
[주-D024] 금와(金蛙) :
지신족(地神族)인 ‘곰’ 또는 ‘고마’에서 유래한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쪽》
[주-D025] 동부여(東夫餘) :
《삼국유사》에는 북부여(北夫餘)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동해 가로 옮겨 가서 세운 나라라고 하였다.
부여의 일족(一族)으로 보인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333쪽》 동부여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해서
금서룡(今西龍)은 ‘백두산 북쪽에 남아 있던 부여족’일 것이라고 하였고, 이병도(李丙燾)는 ‘함경남도
정평(定平) 이남에서 강원도 북단(北端) 사이에 있던 동예 지방’이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두만강
하류’로 추정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512쪽》
[주-D026] 해모수(解慕漱) :
‘해(解)’는 해, 즉 태양을 의미하며, ‘모수(慕漱)’는 고구려의 인명인 ‘명림어수(明臨於漱)’, ‘우수(于漱)’의
‘어수’나 ‘우수’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편(東明王篇)에 해모수의 별명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한 것은 해모수의 의역명(意譯名)일 것으로 생각된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쪽》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해동역사 제4권 / 세기(世紀) 4
옥저(沃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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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蓋馬)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하며, 그 산은 평양성(平壤城)의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하였고, 북쪽은 읍루(挹婁), 부여와,
남쪽은 예, 맥과 연접하였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긴 것을 짤라 짧은 데 보태면 땅이 사방
1천 리 가량 된다. 토질이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서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를 잘 짓는다.
읍락에는 장수(長帥)가 있다. 《삼국지》에 “호수가 5천 호이며, 대군왕(大君王)이 없으며, 읍락(邑落)에는 각각
장수(長帥)가 있는데, 대대로 세습한다.” 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강인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전(步戰)을 잘한다. 언어와 음식, 거처, 의복은 모두 구려와 비슷하다. 《후한서》
동옥저는 후한(後漢)과 통하였다. 《통전》
○ 한나라 초기에 위만(衞滿)이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 옥저는 모두 조선에 속하였다. 무제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정벌하고는 그 지역을 나누어 사군(四郡)으로 삼은 다음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그 뒤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도로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한나라에서 지역이 너무 넓고 먼 데다가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에 있다는
이유로 동부 도위(東部都尉)를 나누어 두고는 불내성(不耐城)을 쌓아 별도로 영동의 7현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삼국지》
○ 광무제 건무 6년(30)에 변방의 군을 줄임에 동부 도위가 이로 말미암아 혁파되었다. 그 뒤에 현에 있던
거수(渠帥)들로 현후(縣侯)로 삼으니, 불내(不耐)ㆍ화려(華麗)ㆍ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모두 자칭 삼로(三老)라 하였으니, 이는 옛날 현국(縣國)으로
있었을 때의 제도이다. 옥저는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핍박을 받다가 드디어 구려에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구려에서는 다시 그곳 사람 가운데서 대인(大人)을 뽑아서 사자(使者)로 삼고는
그로 하여금 거수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租稅)를 책임지게 하여,
맥(貊)ㆍ포(布)ㆍ어(魚)ㆍ염(鹽) 및 바다에서 나는 생산물을 천 리 길에 져다가 바치게 하고,
또 미녀(美女)를 보내도록 하여 비첩(婢妾)으로 삼아 마치 종처럼 대우하였다. 《상동》
○ 위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관구검(毌邱儉)이 구려를 토벌하니, 구려 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다.
이에 관구검이 드디어 진격해서 옥저의 읍락을 모두 깨뜨리고 3천여 급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사로잡았다.
구려 왕 궁이 다시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漊)라고도 하며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에는 매구루(買溝漊)로 되어 있다. 남옥저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나라의 풍속은 대개 남쪽과
같다. 경계는 남쪽으로는 삼가 살피건대, 남쪽은 마땅히 북쪽으로 되어야 한다. 옥저강역고(沃沮疆域考)에
상세히 보인다. 읍루와 접하였는데,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자주 하므로, 북옥저에서는
그것을 두려워해 매년 여름이면 암혈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된 다음에야
마을로 내려 와서 살았다.
왕기(王頎)가 별도로 군사를 보내어 궁을 추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까지 갔다. 그곳에 이르러서 그곳의
기로(耆老)에게 바다 동쪽에 다시 또 사람이 사는 곳이 있는가를 물으니, 기로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풍랑을 만났다. 수십 일간을 표류하여 동쪽으로
가 한 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곳의 풍속은 항상 7월에 동녀(童女)를
취하여 바다에 처넣는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어떤 한 나라가 역시 바다 가운데 있는데, 여자들만 있고 남자는 없다.”
하였으며, 《후한서》에는, “혹 전하기를, 그 나라에는 신정(神井)이 있어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문득 자식을 얻는다고 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포의(布衣) 하나가 바다에서 떠밀려 왔는데, 몸체 부분은 중국 사람들의 옷과 같았으며, 양쪽 소매의
길이는 3장(丈)이었다. 또 난파선 한 척이 파도에 휩쓸려서 해안 가에 닿았는데, 그 안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목 부분에 또 얼굴 하나가 더 있었으며, 살아 있었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하였다. 이러한 나라들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상동》
살펴보건대, 옥저는 지금의 함경 남북관(南北關)의 지역이며, 그 북쪽을 별도로 지칭하여 북옥저라고
하는데, 북옥저는 지금의 육진(六鎭) 등지의 지역이다.
[주-D001] 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고조선연구, 307쪽》
[주-D002] 영동의 7현 :
옛 임둔군(臨屯郡)에 있었던 7현을 가리킨다. 안정복이나 한진서(韓鎭書)는 모두 이 7현의 위치를
지금의 관동 지방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이 7현을 덕원군(德源郡) 부근에 있던 동이현(東暆縣),
안변(安邊)이나 통천(通川)에 있던 불이현(不而縣) 즉 불내현(不耐縣), 문천(文川)이나 고성(高城)에 있던
사두매현(邪頭昧縣), 함흥(咸興) 부근에 있던 부조현(夫租縣), 영흥(永興)에 있던 화려현(華麗縣),
평강(平康)이나 회양(淮陽) 두 곳에 있던 전막현(前莫縣)과 잠대현(蠶台縣)이라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96~208쪽》 북한의 이지린은 “불내(不耐)를 국내성(國內城)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영동 7현의 위치를 압록강 즙안(楫安) 지역에서부터 요동반도 동해안의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조선연구, 191쪽》
[주-D003] 대인(大人) :
부락 단위의 군장(君長)이나 혹은 부족장(部族長)을 말한다.
[주-D004] 사자(使者) :
고구려의 관직명에 나타나는 사자(使者)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인근 소국(小國)을 지배할 때
그 지역의 수장(首長)에게 고구려의 관직을 주어 그 수장을 통해 지배하는 형식을 취한 경우도 있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4쪽》
[주-D005] 구려 왕 궁(宮) :
고구려의 11대 동천왕(東川王)을 말한다. 위궁(位宮)이라고도 한다.
[주-D006] 치구루(置溝漊) :
이병도는 “지금의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북옥저의 한 지방명이 틀림없고, 남옥저에서 8백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함경북도의 북부 지방에 해당한다고 보아야겠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04쪽》
[주-D007] 매구루(買溝漊) :
이병도는 치구루와 매구루가 전혀 별개의 지명이라 하고, “매구루(買溝漊)의 ‘구루’는 고구려어에
성읍(城邑)을 의미하는 말로 현대어의 ‘골’에 해당하고, ‘매’는 천류(川流)를 의미하는 말로 합해서
‘천성(川城)’이나 ‘수역(水域)’이다. 이러한 관계로 볼 때 나는 저 ‘매성(妹城)’이라는 고칭(古稱)을 가진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비정하고 싶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04쪽》
[주-D008] 우리나라 …… 처넣는다 :
이병도는 “동쪽의 한 섬은 지금의 울릉도(鬱陵島), 즉 우산국(于山國)을 말하는 것이고, 그곳의 풍속 운운한
것은 추기(秋期)의 계절풍을 앞두고 해신제(海神祭)에 동녀를 희생(犧牲)하는 풍속이 있음을 말한 것 같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31쪽》
[주-D009] 어떤 …… 없다 :
이병도는 “아마 저 왜인 제국(倭人諸國), 특히 야마대(邪馬臺)를 치소(治所)로 한 여왕국(女王國)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31쪽》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출처] 097.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권 / 세기(世紀) 4|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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