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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면 관현,천향리 일대는 예천(醴泉), 감천(甘泉), 천향(泉香), 온수곡(溫水谷) 등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고 옛부터 온천수(溫泉水)가 있었다는 유래가 있다. 특히 샘밭은 1775년경 온양(溫陽) 정씨(鄭氏)가 개척(開拓)한 마을로 마을 어귀에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추워도 얼지 않는 샘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천전(泉田-샘밭), 온수골(溫水谷)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실록(朝鮮王朝 實錄) 1599년(선조 32) 9월 22일 편에 보면 임금이 몸이 좋지 않아 평산(平山)에 갈 것을 희망하면서 조종조(祖宗朝)에도 온양(溫陽)이나 예천(醴泉)에 간 일이 있다 하였다. 조종조(祖宗朝)란 태조~세조조까지로 추측할 수 있다.
“나의 병은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는 것을 의관들이 다 알고 있다. 이제 그 증세가 갈수록 더 깊어져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남들이 온천수로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평산(平山)에 신효(神效)한 물이 있다고 하니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지금 혼자 갔다 오려고 하는데 열흘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의당 내신(內臣) 한 두명과 함께 양식을 싸가지고 갈 것이니 어떻게 감히 백성에게 폐를 끼치겠는가? 옛날에도 임금이 목욕하여 병을 치료한 일이 있고 더구나 조종조에는 온양(溫陽)과 예천(醴泉)에 간 일이 있었는데 어찌 경들은 억지로 막는가? 며칠 내에 떠나려 한다”하였다. 「원문 : - - - 조종조유 온양예천지행 하경등지강위거야 욕어수일내발행(祖宗朝有 溫陽醴泉之行 何卿等之强爲拒也 欲於數日內發行)」
지금의 예천온천(醴泉溫泉-예천 감천 관현,천향) 일대는 1992년 부존량을 탐사하고 1995년 12월 군에서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온천공(3공), 진입도로(300m), 시욕장(240평) 등의 사업을 추진한 후 2000년 3월 24일 개장하였다.
온천수의 PH(수소이온농도)가 9.52~10.25의 알칼리성으로 지하 800m 이상에서 용출(湧出)되는 원천수(源泉水)를 100% 그대로 냉,온,열탕(冷,溫,熱湯), 샤워기에 사용하는 우수한 온천수로 수질이 부드럽고 감촉이 좋아 피부미용(皮膚美容)에 좋을 뿐만 아니라 중탄산염 성분을 다수 함유하고 있어 피로회복과 노화방지(老化防止)에도 아주 좋다고 한다.
앞으로 온천지구(1,925,216㎡) 중 관광지(觀光地)로 지정받은 이 일대 221,960㎡을 예천군의 명소(名所)인 용문사(龍門寺), 회룡포(回龍浦), 석송령(石松靈) 등을 비롯하여 예천박물관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지(觀光地)로 조성하고자 기반시설(基盤施設)을 구축 중에 있다.
온천지구 내에는 약 300년이 된 만지송(萬枝松)이라는 특이하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가지가 만개가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8m, 둘레가 3m가 넘는다. 만지송은 우리 후손의 번영(繁榮)을 상징하는 신비스러움과 오래도록 무성하고 영세(永世)스러움을 느껴 주는데, 이는 온천이 있는 이 곳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암시를 준다.
선사시대 마을의 수호신으로 보이는 선돌 또한 암(雄)바위와 숫(雌)바위가 있어 온천을 수호(守護)하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북한(北韓)이 자랑하는 금강산(金剛山) 온정리 온천수와 수질이 같은 중탄산-나트륨(HCO3-Na) 단순천으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예천온천의 역사는 <선조실록>에 나타나듯이 조선 초(初 : 1500~1600년)로 추정할 수 있다.
석송령(石松靈)
천향리 석평마을에 있는 석송령(石松靈)은 예천에서 풍기 방향으로 1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294호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이 나무는 부귀(富貴), 장수(長壽), 상록(常綠)을 상징(象徵)하는 반송(盤松)으로, 크기는 수고(樹高) 1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 4.2m, 수폭 동서(東西) 32m, 남북(南北) 22m이며, 그늘 면적은 1,000㎡에 이르는 큰 소나무로서 수령(樹齡)이 6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마을의 단합(團合)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목(洞神木)으로 보호받으며 매년 정월(正月) 대보름에 동신제(洞神祭)를 올리고 있다.
석송령(石松靈)의 유래(由來)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洪水)가 났을 때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주민들이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1927년 8월 경에는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란 사람이 영험(靈驗)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 토지 5,259㎡를 상속(相續) 등기해 주어 이 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樹木)으로서는 토지를 가진 부자(富者)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재산을 가지고 세금(稅金)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5년에는 새마을사업을 잘한다고 하여 대통령(大統領)이 준 500만원으로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장학회(奬學會)를 조직하여 고향의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奬學金)도 주고 있다.
석송령에 얽힌 여러 전설에 의하면
1) 일제시대에 이 나무를 제거하여 민족(民族)의 정기를 말살하고 일본(日本) 군함(軍艦)의 재료(材料)로 활용하고자 일본인이 인부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려고 톱과 장비를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석송령 부근의 개울을 건너오는데 갑자기 자전거 핸들이 뚝 부러져 순사(巡査)는 목이 부러져 죽었고, 인부들은 영험스러운 이 나무를 보자 겁에 질려 달아나서 무사했다.
2) 그리고 한국전쟁(1950) 때는 인민군(人民軍)이 석송령 나무 밑을 야전병원(野戰病院) 막사로 사용하였는데 삼천초등학교(三泉初等學校)를 비롯한 인근 모든 지역에는 비행기로 많은 폭격(爆擊)을 받아 피해를 보았으나 우산(雨傘)모양의 이 나무 밑에는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아 영험스러움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한다.
3) 또한 지금도 학질(瘧疾)에 걸리면 소나무에 가서 절을 정중히 하고 기도(祈禱)를 드리면 병(病)이 낫는다고 전해진다.
4) 이 소나무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정월(正月) 대보름이나 각종 마을행사가 있으면 1년에 10말 이상을 마신다고 한다. 그것은 한 번에 막걸리 5말씩을 행사 후에 나무뿌리 주변에 살포(撒布)한다.
석송령에서 바라보이는 예천온천(醴泉溫泉)은 2000년 3월 24일 개장하여 하루 천명 이상이 다녀간다. 물 좋기로 소문난 이곳은 중탄산-나트륨(HCO3-Na) 성분(性分)을 가진 알칼리성(PH 9.7~10.25) 단순천으로, 수질(水質)이 매우 부드러워 피로 회복은 물론 여성들의 피부미용과 노화방지에 아주 좋다. 최근 수질검사 결과 북한이 최고로 자랑하는 금강산에 있는 온정리 온천수와 같다는 판정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별의 동산인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 가전체소설(假傳體小說)의 효시(嚆矢)인 <국순전(麴醇傳)>의 저자 서하(西河) 임춘(林椿) 등을 봉향한 옥천서원(玉川書院),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 보물 제667호)을 모신 한천사(寒天寺), 선사시대(先史時代) 고인돌로 추정되는 마촌리(馬村里)의 남,옥근석(男,玉根石)이 있다.
또한, 경북북부 유교문화권(儒敎文化圈) 개발사업 중 우리 군의 가장 관심을 가지고 추진 중인 충효테마공원(忠孝테마公園)이 조성 중이며, 수락대 정자(水落臺亭子)가 복원되었다.
만맛의 동신(洞神 - 돌, 소나무)
조선 현종 때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신천인(信川人) 강광윤(康光胤)이란 선비가 처음 들어올 때 해 질 무렵에 들어와서 개척하였다 하여 만촌(晩村)이라고 불려졌다고 하며, 또한 덕율동(德栗洞)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앞들이 비옥(肥沃)하고 넓어 햇볕을 받는 시간이 길어 벼를 심어도 농사가 잘 되고 해가 늦게 지므로 만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위치에 따라 서녘마, 안마, 웃마로 구분하여 부른다.
이 마을의 입구에는 암(雌)동신으로 모시는 돌과 숫(雄)동신으로 모시는 소나무가 있다. 약 400년 전 이 마을에는 액운이 자주 닥쳐 주민들이 늘 불안한 나날을 보냈는데, 하루는 어떤 할머니가 꿈에 풍기군(豊基郡) 봉현면(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다래골에 있는 길다란 돌이 자주 나타나 이 돌을 마을 동구에 세우면 액운(厄運)이 없어진다고 하므로 동네 장정(壯丁) 4명을 데리고 그 곳에 가니 실제 돌이 있어서 목도를 이용 하여 이곳까지 운반하여 꿈에 나타난 대로 마을 동구에 세우니 그 이후부터는 액운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이 영험한 돌을 암동신으로 삼아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삼았으며, 암동신과 마주 보이는 앞산에 있는 소나무를 숫동신으로 삼아 동신 (洞神)끼리 부부(夫婦)의 인연(因緣)을 맺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정월(正月) 대보름 자시(子時)에는 꼭 동신제를 올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동신제를 지내면 동네가 평안하고 가축(家畜)이 건강하다고 한다.
돌고지(石串)
풍기 방향(豊基方向)의 도로 변에 위치하고 석관천(石串川)이 옆으로 흐르고 있다.
이 곳은 멀리 보이는 주마산(走馬山)이 흡사 말이 달려오는 형상과 같아 말이 달려오면 붙잡아 매기 위해 돌을 모아 돌 말뚝을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 그 자리에는 큰 느티나무가 바위틈에 자라고 있으며 나무 밑에는 조그마한 정암사(靜岩寺)가 자리하고 있다. <예천군지> 고적조(古跡條)에, “기둥같이 똑바로 서있고 높이는 10척(尺)이며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이 혈(穴)을 질렀다”라고 하였다.
농바우(籠岩)와 복골(福洞)
농바우마을 앞산에 바닥이 5평 남짓한 큰바위 위에 농(籠)같이 생긴 바위가 또 얹혀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농암(籠巖) 또는 농바우라고 불렀다.
약 150년 전 보문면(普門面)에서 거주하던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현재까지 마을을 이루고 살고있는데, 어느 날 이 바위가 위치한 산아래 마을에 길을 닦던 힘센 장사가 힘 자랑을 하기 위하여 이 바위를 굴러 밀어냈는데, 이튿날 이상하게도 그 바위가 제자리에 다시 올라와 얹혀 있어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서는 이 신기한 바위에 대하여 마을의 번영(繁榮)과 안녕(安寧)을 빌면 재앙(災殃)이 없어진다고 하여 매년 기원(祈願)하고 있으며, 지금도 바위를 두드리면 “둥둥” 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한 이웃마을 복골(福洞)에는 둥글고 큰 바위가 동네어귀에 있어 이 바위를 복바위(福巖)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바위에 복을 빌고 고사(告祀)를 지내기도 한다. 또한 지형(地形)이 복(鰒)처럼 생긴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고 불려져서 복골(鰒洞)이 되었다고도 한다.
묵은재
감천면 포1리 할미성을 지나 현내(縣內)로 넘어 가는 고개를 묵은재라 한다.
1) 약 200년전에는 산이 가로 막혀 있었으나 동민들이 들로 나가기 위하여 산을 뚫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동네의 가마가 무척 급한 일로 이 재를 넘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마침 그 때는 해가 질 무렵이어서 서둘러 이 재를 넘어 가는데, 갑자기 교꾼의 발이 땅에 붙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내려와 산아래 동네에서 하룻밤을 묵고 날이 밝은 후 그 다음 날 아침 다시 이 재를 넘어 가니 쉽게 넘을 수 있었다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동네 사람들은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이 재를 넘을 경우에는 하루를 묵고 난 뒤에 넘어야 한다고 하여 “묵은재”라 부르게 되었다.
2) 또한 이 곳을 오기전 할미성에는 옛날 어느 풍수(風水)가 여기를 지나다가 지형이, “할머니가 손자(孫子)를 안고 있는 형(老姑抱孫形)이니 이 곳에 집을 짓고 살면 자손(子孫)이 번창할 것이다”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1921년 감천면사무소를 현내리에서 이 곳 할미성(現 浦1里)으로 옮김에 따라 마을이 번창(繁昌)하게 되었다 한다.
寒天寺 (한천사)
한천사(寒天寺)는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절이 융성하던 때의 규모나 내용은 기록으로 전하는 바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절에 현존하는 석탑(石塔)과 철불의 모습, 그리고 남아있는 사각이나 원형의 거대한 주초석(柱礎石) 등을 보아 신라 말기에는 사세(寺勢)가 매우 왕성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난 1988년 가을 조경작업을 하던 중 청동자물쇠 3점, 청동반자 1점, 청동용뉴 1점, 청동주완 1점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감정 의뢰한 결과 고려시대 유품으로 확인되어 관리 보존상 본관 유물전시관에 보관한 바 있는데 고려시대에도 지금의 사세 이상이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리고 1803년(순조 3)의 한천사 법당 신창상량문(新創上樑文), 또는 1875년(고종 12)의 한천사녹화기(寒大寺祿化記) 등의 현판 기문에는 의상조사가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할 때 기둥을 설주하고 지붕을 덮기만 하면 빈번히 넘어지므로 관법을 하여 보니 소백산맥(小白山脈)의 남록인 이 곳의 뒷산이 “말이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달려가는 주마형국(走馬形局)의 머리 부분이라 부득이 이 곳에 지금의 한천사를 세워 지축과 지붕을 날려 가는 바람을 잡게 하니 이후 부석사를 건립하는데 장애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인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 보물 제667호)을 안치하였다.
한편 한천사와 한대사 칭호 사찰의 성쇠(盛衰) 때마다 달랐다는 가람배치 흔적, 그리고 이 곳 주마산(走馬山)으로부터 소백산맥 정기(精氣)가 흘러가는 것이 완급된다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밀기(密記) 등을 들어, 이 절은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지만 부석사나 이 곳으로부터 소백산맥을 이어가는 남서쪽의 사찰들과 전혀 무관할 수 없어 본당 위치의 변경이 자주 있었고, 사명(寺名)을 바꿔 부르기도 하다가 1900년대 이후 다시 한천사(寒天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바위와 동신목(洞神木)
돈산리 산골마을은 조선 영조 때 한양인(漢陽人) 조보양(趙普陽)이 유동(酉洞)에서 고방산(주마산 : 羅峙山) 동쪽에 터를 잡아 산골(山洞)이란 마을 이름을 지었으며, 동구에 있는 독서동(讀書洞)에 서당을 건립하고 문도(門徒)들을 모아 강학(講學)하였다.
명금간(鳴琴澗)에는 잉어바위가 천연적으로 물고기 모양(天然魚形)으로 누워있으며, 산골마을 중앙에 거북바위(龜岩)와 크고 작은 둥근 바위들이 군데군데 박혀있고 주마산(走馬山) 동쪽에 반월산(半月山)이 있어 나직한 산들이 마을을 푹 둘러싸고 있다.
이 거북바위는 조보양(趙普陽)이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고자 이 곳에 쉬고 있을 때 잠시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 거북바위의 신령(神靈)으로 만약 그대가 이 곳에다 터를 잡고 살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家門)이 크게 일어날 테니 여기에서 살아라.” 하면서 “내가 동신(洞神)이 되어 그대의 후손(後孫)을 보살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여 정착(定着)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바위 신령(神靈)을 모시기 위하여 동네 입구에 있는 버드나무를 동신목(洞神木) 으로 삼아 2년마다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있다.
인근 유리(酉里)는 마을의 생김새가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型)이라 하여 유래되었으며, 감천현(甘泉縣)과 역사를 함께 한 오래된 마을로 마을 복판에는 달걀처럼 생긴 바위 계란암(鷄卵岩)이 있으며, 김해(金海) 김씨(金氏)와 경주(慶州) 최씨(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범바우 마을 뒷산에는 범같이 생긴 큰 바위가 마을을 바라본다 하여 범바우(虎岩), 또는 안마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 특산품(特産品)인 배(梨)는 관배(官梨)라고 하여 조선시대 진상품(進上品)으로 올려졌다고 한다.
인바위(印岩)
대맥1리 마을 앞 동쪽 대산지(池) 옆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가 있다.
약 500년 전 이 마을에 거주하는 경주(慶州) 손씨(孫氏) 가문에서는 이 두 바위와 인접한 문중산(門中山)인 화전(花田)이라고 부르는 이 산에서 매년 음력(陰曆) 10월 7일 조상(祖上)의 성묘(省墓)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작은 바위를 큰 바위 위에 올려놓는 일을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씨(孫氏) 가문의 번창(繁昌)과 각종 액운을 없애준다고 하여 지금까지 계승하여 왔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손씨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마을에 화(禍)를 가져다 준다 하여 손씨 가문에서 돌을 올려놓으면 다른 주민들은 내려놓곤 하였다. 이런 행위를 약 500년 간 되풀이하여 왔는데, 이렇게 작은 바위를 큰 바위 위에다 올려놓는 행위가 마치 도장을 찍는 것 같다 하여 이 바위를 인바위(印岩)라고 부른다.
버리골(蜂洞, 麥洞)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 강릉(江陵) 김씨(金氏)들이 이 마을을 개척(開拓)하였다고 한다. 감천(甘泉)에서 영주(榮州)로 넘어가는 버리골재가 마을 앞에 있고, 마을 뒷산에는 큰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위에 빗물이 고이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백두산(白頭山)의 천지(天池)와 같다고 하여 이 물을 천수(天水)라 하였으며, 이 물로 한약 (韓藥)을 다리면 약효가 신효(神效)하다고 전해진다.
예천지방의 방언 “버리”는 벌(蜂)과 보리(麥)의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뒷산이 벌통 처럼 생겼다고 하여 버리골, 또는 봉동(蜂洞)으로 불려오다가 일제(日帝) 말엽(末葉) 이 지역에 보리를 많이 재배하면서부터는 보리골, 즉 맥동(麥洞)이라 불려지고 마을 이름도 대산마을과 합쳐 대맥(大麥)이 되었다고 한다.
말뚝바위(男根石)와 암바위(女根石)
감천면 마촌리 말골 뒷산(속칭 달마산) 밭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 고인돌로 추정되는 남근(男根石) 모양의 말뚝바위 3개가 있으며, 맞은편 150m 지점에는 여자를 상징 (象徵)하는 암(雄)바위(女根石-玉根石)가 한 개가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날 달마산 정상에 암자(庵子)가 있었는데 그 옆에는 수 백년된 노송(老松)이 한 그루 있었다. 어느 날 한양(漢陽)으로 과거(科擧)를 보러가던 선비가 암자에 잠시 쉬기 위하여 말을 이 소나무에 매어 두었다가 말방울이 소나무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과거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자식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달마산 말뚝바위에 소원(所願)을 빌면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와 인근(隣近)의 사람들이 가끔 찾아온다.
남근(男根) 모양의 바위 건너편에 있는 암바위 앞에 나무나 풀이 가려져 있을 경우는 불이 나지 않으나 앞에 아무 것도 가려지지 않으면 산불이나 가정에 불이 많이 난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奇異)하다. 그래서 마을의 주민(住民)들은 암바위가 가려져 있지 않을 때는 나무, 나뭇잎, 볏짚 등으로 가려서 화재(火災)가 나는 것을 방지(防止)한다고 한다.
출 처 : 예천군 감천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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