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용수
20여 년 전
새벽, 경부선 새마을호 열차에서 바라다 본 차창 밖의 풍경은 추수가 끝난 뒤의 하얗게 서리로 덮힌 빈 들녘이었다.
아마 경산 압량들이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을씨연스럽고 황량하다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한 풍경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그 곳을 스쳐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포근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여름철의 힘겨운 노동과 가을 추수의 결실도 끝나 버린 후의 텅 빈 들녘은 마치 해야할 일을 완수하고 생활전선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는 초로의 신사같은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 때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 한달간 치료를 받다가 퇴원한 지 반 여 년 남짓 지났을 때였고, 더우기 가족이 있는 부산 집을 떠나 직장이 있는 구미로 가는 월요일 새벽 출근 길이었기에 아마도 심경이 착잡하고 약간 감상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감정이 생겼을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는 11월이 되니 그 때의 기억이 몰록 솟아 오른다.
병들어 쓰러지니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행태가 가지각색으로 와 닿았다. 손을 잡고 안쓰러워하는 누이, 공상처리를 하기위해 동분서주한 계원들,문병을 와서 " 내사 마 그럴 줄 알았다. 술을 얼메나 들이 마시노. 술고래아닌가베" 하면서 끌끌 혀를 차는 삼십년 지기 술친구들 ,전화 한 통으로 인사치례만 하는 사촌, " 뇌출혈 걸려 수술했으면 인생 종 친기다. 명퇴해서 후배에게 길을 양보해 줘야지" 라고 자기들 끼리 기대감을 표시한다는 직원들, 회복하지 못한다고 지레짐작하여 외부인에게 사기행각을 사주시킨 이 , 위문금 명목으로 받은 부의금을 중간에서 착복한 사람 기타 등등 요지경이었다. 기원전 로마에서 "브루투스 너조차?" 라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 쓴 말을 내뱉은 줄리어스 시이저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할 때, 누가 친구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은 새겨 들을만하다. 그러나 정확한 말은 아니다. 만인은 만인에 대하여 늑대라고 갈파한 토머스 홉스의 혜안이 실로 경이롭다. 하지만, 그도 정확하지 못했다. 하이에나였다. 일부 사람들은 병들고 약한 사람에게 하이에나가 된다.
당시는 그렇게 속좁게 생각했다.
사람이 늙으면 과거에 산다는 말이 일면 진실일 수도 있다. 흘러간 옛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쓴 웃음 짓게 한다.
중학 2학년 반장 선거일이다. 전임 반장이 대구로 전학을 가버린 가을 어느 날이었다. 새로운 반장 감을 추천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두 명이 추천되었다. 진실로 원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극구 사양했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나를 추천한 아이는 짱구였다. 앞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뒷머리도 둥근 매주처럼 볼록하고 무쇠처럼 단단하다. 그의 뒷 머리통에 중학시절 3년간 5명이 코피를 쏟았다. 그 중 한 명은 상급생인 3학년인데 뒷 머리통에 맞아 기절, 조퇴했다. 그는 그날 이후 짱구의 펜이 되었고, 후일 그의 큰 처남까지 되었다. 그런 짱구는 우리 집에서 한 집 건너 뒷 집에 살았다.
투표결과가 칠판에 바를 정자로 표시되었는데 결과는 62대0
나를 추천한 짱구도 나를 배신했다. 물론 나도 나 자신을 찍지 않았다. 체면상 즉 중이 어떻게 제머리를 깍을 수 있느냐 하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짱구는...
다행이도 이 창피한 순간에도 나는 의연하게 평온함으로 얼굴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얼굴 색이 아버지를 닮아 검붉었기 때문이다. 그 때처럼 아버님의 은혜에 대해 각골난망한 적은 없었다.
짱구는 ... 보이지도 않았다.
태풍이 물러가고 앞산의 구름들이 산기슭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오후에는 저 구름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높고 맑은 창공이 가을의 산풍경을 내려다 볼 것이다. 아픈 몸으로 직장생활할 때,180도 달라지는 세상 인심에 질려서 한직으로의 전출을 갈망했던 시절도 이제는 웃어 넘길 수 있는 과거지사가 되어 버렸고, 짱구는 여전히 어린시절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때로는 나의 파크골프 동반자가 되고 때로는 낙동강 변을 함께 달리는 국토종주대원이 되기도 한다.
20여 년 전 추수가 끝난 텅 빈 압량들녘을 그렇게도 부러워 했었는데 이제 짱구와 나는 흰머리 풀풀 날리며, 민대머리 독수리가 되어 종신 백수로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서리내린 논밭이 되었고 텅 빈 압량벌이 되었다
간혹 의견이 대립되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를 때도 있지만, 우리는 인연이라는 끈으로 이어진 하나의 존재라는 것. 앞산도 하늘도 저 구름도 우리와 하나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아가고 있다. 죽어서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흐르는 세월속에서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끝
첫댓글 가을 걷이가 끝난 압량들과 은퇴한 삶과 친구, 지나간 추억 그리고 짱구란 친구의 영원한 우정 부릅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을 들판의 풍경, 어린 시절의 회상,누구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큰 고통을 극복하고 천태만상의 주위사람들을 포용하면서 겪었을 마음고생이 선연합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힘든 일을 겪을 때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가 알수 있는것 같습니다. 아플때 마음 고생이 느껴집니다. 끝까지 함께 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부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을 추수가 끝난 황량했던 압량들판을 바라보며 쓸쓸하고 안타갑다는 생각보다 할일을 완수하고 백수가 되어 평화롭고 여유로운 초로의 노신사 같다는 표현에 공감합니다.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재미있게 쓰신 글 잘 읽었슴니다.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하시고 멋진 인생의 가을을 맞이 하신 것 같습니다. 한가로운 압량 들녘의 잔상 같이 짱구 어른과의 끈끈한 우정에서 고진감래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글입니다.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익살스런 표현이 맘에 듭니다. 시종 미소를 먹음고 글을 읽었습니다. 가을 벌판 위에 널리 펼쳐 놓아도 추억들이 어른 거립니다. 병마와 주변 인정, 투표와 친구 등 구수한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큰 고비를 넘겨셨습니다.그것도 현직에 계실때 가장 힘들때 내 주위를 살펴 볼 수 있다는 말씀 마음에 닿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 큰병을 이기고 다시 출근할 수 있었다는 본인의 의지와 현대의학의 찬사를 보냅니다. 늘 같이 할 수있는 친구와 함께 할 수있는 문우를 만나 지난일을 토로 할 수 있는 지금도 행복한 나날입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십시오
뇌출혈을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텅 빈 들녘에서 오히려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느낀 그 마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학교 반장선거의 추억.. 62 대 0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 짱구님과는 흰머리 풀풀 날리는 친구로 지내신다니 훈훈한 우정에 박수를 드립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세파를 견디어 내시고 또 이겨내신데 대해 먼저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넓고 큰 들판 같은 마음을 가지신 것같아 부럽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인가 봅니다. 넓고 깊어지는 연습을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을은 황금계절. 황금인생과 비유하면서 즐거이 지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