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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다해 12월16일 화요일 [(자)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수도회] 사랑을 실천하며 기다리는 메시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5,6ㄴ-8.18.21ㅁ-25
† 복음 루카 7,18ㄴ-23
◈ 오늘의 묵상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 다오.” 대림 시기의 전통적인 성가인
『가톨릭 성가』 94번의 첫 마디인데, 이 성가의 가사는 거의 이사야서의
구절들로 되어 있습니다.
오랜 기간 가뭄으로 비가 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저 하늘을 바라볼
따름입니다. 인간이 비를 내리게 할 수 없기에 그저 하늘에 매달립니다.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 다오.”라는 기도는 그와 같은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구름이 의로움을 뿌리고 땅에서 구원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에 의로움과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는 뼈저린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지
확인하려 합니다. 아마도 죽음을 앞에 둔 그가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부분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증거들입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 곧 사람들이 구원을 체험하는 바로
그것이 그분이 메시아시라는 증거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의로움과 구원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자세는 단순히 기쁘고 즐거운 날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과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날이기에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015년 다해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5,6ㄴ-8.18.21ㅁ-25
복음
<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ㄴ-23
여러분들은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하십니까? 지금 저는 저의 손으로
열심히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컴퓨터를 이용해서 쓰고 있지만, 어떤
이는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손을 이용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운동
경기를 위해 손을 사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똑같이 손이라고 말하지만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제
손에게 “너 잘못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악기나 운동
경기를 위해 사용하는 손에게 틀렸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떤 것을 하든
상관없이 죄로 기울어지는데 사용하는 것만 아니라면 손을 사용하는 그
자체에 대해 그 누구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자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일을 하든
(물론 죄를 범하는 일은 제외입니다)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다보니 나를
통해 움직이는 주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이끄시는 주님께 대한 의심과 함께 불평불만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서 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절대로 틀린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 순간에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까요?
불을 낸 범인을 잡으러 가는 것이 먼저일까요? 당연히 저 사람이 불을
낸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범인 잡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불이
났을 때 제일 먼저 할 것은 불을 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자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불평불만을 간직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또한 지금의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를 찾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주님께 대해 의심하지 않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예수님께 대한 많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는
예수님께 대한 의심이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시켜서 질문을
던지지요.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자리에서 충실할 수 있으며, 나를 통해 움직이시는 주님의 활동에
감사하면서 진정으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과거의 탓, 남의 탓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인생은 호전한다(웨인 다이어).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죠?
세 가지 귀중한 금
남편이 우연히 인터넷 안에서 ‘이 세상 안에서 세 가지의 귀중한
금’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귀중한 금은 ‘황금, 소금,
지금’이었지요. 이 좋은 말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핸드폰 문자 메시지로 보냈습니다.
“여보, 세상에는 세 가지 귀중한 금이 있다고 해. 뭔지 알아?”
그러자 곧바로 아내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습니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본 남편은 깜짝 놀라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고 하네요.
“방금, 쬐금, 입금”
우리가 정말로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에 맞게 지금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 삶,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벗어나는 것들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양 매달리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호주의 멋진 해안가입니다.
◈ [서울] 대림 제3주간 수요일
2015년 다해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 7,18ㄴ-23
서양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체라는 옷을 입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이데아’라고 합니다. 영원한 세상과 영원한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연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제1원인이 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현실의 모든 것은
가능하게 하는 ‘가능태’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가능태의 최종 원인이 있으며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파스칼은 또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의
심판과 축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만일 그분의 심판과 축복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나의 기준대로 살다가, 하느님의 심판과 축복이
있다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하느님의 심판과 축복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과 기준에 따라서 살았는데 정말
하느님의 축복과 심판이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굳이 위대한 철학자와 사상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하느님의 축복과
심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지 않았던 사도들입니다. 어부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고, 열혈당원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한국교회의 순교자들 중에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백정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한 것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신분과 계급의 벽을 허물고,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오시기로 하신 메시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표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귀 먹은 자가 듣게 되고, 눈이 먼 자가 보게 되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갇힌 이에게 해방이 선포되고, 묶인 이는 자유를 얻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죽은 이들이 되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보여주는 표징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도록 하십시오.”
어떤 이는 들의 꽃에서도, 하늘의 구름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합니다. 매일 기도하시는 어머니는 날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면,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면,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바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비록 고난 중에 있었어도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감사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대림시기에는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성모님에게도 나타나고, 요셉에게도 나타나고,
즈카리야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같은 운동경기라도 우리나라 선수가
나오는 경기에 더 관심이 있듯이 저도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 성서 말씀을 들을 때 더 관심을 갖곤 합니다. 가브리엘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고 ‘대천사’
라고 합니다.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를 좋아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 제가 있는 공동체, 또 제 자신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저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전하는 지식과 지혜가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어떤 일의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우리의 전 존재가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이 교차하는 세상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지식과 지혜가,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기쁜 소식’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세상에선 믿음 갖고 살아야
2015년 다해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세상에선 믿음 갖고 살아야
거지가 재벌 되고, 못난이가 미인 되고, 여자가 남자 되면 좋겠지요?
애기가 내일 어른 되고 그러면 자연 질서는 제구실 못하고 깨집니다.
하늘이 인간을 도울 때 자연 질서를 깨고 무시하며 돕지는 않습니다.
허나 자연 질서를 벗어나면 하늘은 하늘 질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세상 자연 질서를 벗어나는 건 매우 간단, 곧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믿음 갖고 살면 자연 불행 이겨내고 죽어서는 영원행복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
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사랑을 실천하며 기다리는 메시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다해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루카 7,18ㄴ-23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22)
사랑을 실천하며 기다리는 메시아
마카에루스 감옥에 투옥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합니다(7,19). 그렇게 한 것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알아보았지만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 등
현실문제를 해결해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어주는 자비의 메시아로서 행동하십니다(17,21-22). 의로움과 구원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이사 45,21) 몸소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과 논리로 따지지 않으시고 행동으로 직접 메시아의
본질을 보여주시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17,23)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내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아,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준 사람에게
나를 대신하여 복수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연중에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때에 나서주시고 내가 기부하고 봉사하고 기도한
만큼 보답해주시는 메시아를 바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메시아는 나의 도구나 상거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빛과 어둠을 창조하시고,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이사 45,7),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45,21). 우리는 하느님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메시아의 본질인 자비와
해방을 온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대림은 그렇게
수동적인 관망(觀望)이 아니라 능동적인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실천하는 행동 없이,
구체적으로 나누는 사랑 없이 말만 앞세우는 ‘빈 깡통 같은’ 요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야고 1,22).
우리 모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메시아의 본질인 자비를 실천하며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렸으면 합니다. 한편으로는 ‘착한 가게’, ‘달콤 창고’,
‘서스펜디드 커피’ 등에서 보듯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말없이 배려하고
위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여 불의에
맞서나가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반겨주실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다해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루카 7,19)
우리는 역사 안에서 참으로 많이 속아 왔습니다.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정말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리라 믿었었는데 그렇게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의 장상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지만
지나고보면 매 한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수천년을 그렇게 메시아 오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기대도 많이 했었는데 결국 아니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도 자기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물어보네요.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기다림의 끝이 바로 예수님이라 믿습니다.
이슬람인들은 마호멧이라 믿고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요 메시아임을 고백하며
그분 오시기를 함께 기다리도록 합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다해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18ㄴ-23)
힘겨운 시간일수록 더욱 돋보이게 되는 복잡다단한 내면의 공간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뜨겁고도 직접적인 체험없이는
단순해 질 수 없는 우리의 공간과 시간입니다.
직접적인 체험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을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됩니다.
직접적인 체험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열정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만나는 기쁨입니다.
보고 듣는 것이 주고 받는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분명히 보고 들은 예수님을 전하기에 복음은 언제나 힘이 있습니다.
우리 내면과 우리 공동체를 고요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보고 들음이 깨어있는 시간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보고 들음을 통해 새로워지는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보고 들은 예수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워지는 출발" "새로워지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본연의 모습을 찾아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다해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 7,18ㄴ-23
본연의 모습을 찾아라.
우산 장수인 큰 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 아들을 둔 어머니는 늘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비가 올 때는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맑은 날에는 큰
아들을 걱정하니 하루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작은 아들이 짚신을 많이 팔 것이니
좋고, 비오는 날에는 큰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이라고 생각하니 늘
기뻤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은 새소리를 들으면 ‘노래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운다’고
하십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어떤 이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 불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항시
은총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으니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뻐해야합니까?
그 감사와 기쁨을 잃어간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근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질병과 비참함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악령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화해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대로 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29,18). “그때에 눈먼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걸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골치덩이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니
미리 감사하고 기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림
없기를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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