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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제목이 아주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이 책은 인터넷을 뒤지다 발견한 책이다.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1953년 독일에서 태어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철학·역사학을 공부했고, 1997년〈삶의 기술에 대한 철학적 기초〉라는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하고 2004년부터 독일의 에르푸르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스위스에서 철학적 영혼의 치유사로 활동하기도 하고, 한국과 중국 등에서 활발한 강연활동으로 철학의 대중적 보급에도 힘쓰는 학자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철학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관계’를 기술한 것인데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 기술’이라고 한 부제도, 재미보다는 어려움을 먼저 느끼게 한다. 내용에 앞서 소제목들을 보면 대략의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다. ‘주체적 삶의 가능성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습관의 그물 짜기, 쾌락누리기, 고통의 의미, 죽음을 동반하는 삶에 대하여, 격정을 다루는 분노의 기술, 모순을 다루는 반어의 기술, 부정적으로 사고하기,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평정, 삶의 기술로서의 건강관리, 행복에 이르는 길, 삶의 기술의 목적’등 짜임새가 차원 높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후감도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렵더라도 차원이 다른 책 읽는다는 회고를 남기고 내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이 책의 차원에 대해 옮긴이 (장영태-서울대 문리대, 대학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홍익대 명예교수 재직)도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에피쿠로스(BC341∼270)를 위시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상가들이 펼친 삶의 철학에 관련한 담론들을 인용하거나 요약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단숨에 읽어낼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이처럼 호흡이 긴 책을 읽는 데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내를 가진 독자에게 이 책은 새로운 이론적 지식의 중대라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능동적 성찰의 훈련이라는 실천적 조언의 저장고로서 그 값어치를 지닐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면
“우리는 모든 쾌락이 영원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영원은 쾌락의 죽음이다. 이것은 삶에도 해당된다. 설사 영원불멸이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삶이 정지된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 미래에도 살 수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 이 삶을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 만일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끝없는 연장의 본질인 지루한 삶을 이어가지 않기 위해 죽음을 고안해 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한계는 긍정적이다. 삶을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실질적으로 살기 위해 한계가 긍정적이라는 뜻이다. 삶의 환희는 죽음이라는 한계에 고마워해야 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말만으로도 이 책을 다 읽은 기분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기 위해 다음 장을 넘겼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가 말했다. ‘모든 향락을 탐닉하고 아무것도 사양하지 않는 자는 줏대 없는 자이고, 오만한 속물처럼 모든 향락을 거부 하는 자는 아둔한 자이다.’상대와 관계를 맺고 그 바탕 위에서 쾌락이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 쾌락 활용의 특성인데 쾌락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쾌락은 자연 그대로의 신뢰할 수 있는 상태 가운데 존재하지 않으며 소비의 모델, 즉 쾌락의 단순한 소비 반대편에 있는, 그 이용 가운데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쾌락과 반대의 위치에 있는 고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독으로 자기를 내동댕이친다. 자기는 오로지 고통과 함께 그 고독안에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과 쾌락을 나누는 것은 쉽지만 고통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고통은 가깝고 온갖 동정심을 동원할지라도 타자의 고통은 변함없이 낯선 것이다. 고통이라는 소유물에서 초래되는 것은 자기강화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강화의 패배이다. 이 패배는 자기염려를 향한 새로운 동기를 유발하고 타자들도 그런 염려에 연관시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이중적 의미에서 염려이다. 고통은 다시 시작하는 염려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염려가 실존적으로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속여서 알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익숙함도 용납하지 않는다.”참 어려운 말이다. 고통과 쾌락, 인간의 본질적 문제인가 보다.
쾌락을 좋아하면서도 고통이나 고난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질병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없어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성찰적 삶의 기술에 포함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1533∼1502)는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질병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다. 질병은 삶의 한 구성요소이고 삶에서 시민권을 갖고 있으므로 존중해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질병이 약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질병을 그저 제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질병의 요구에 응하고 따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질병에게 통행을 허락해야만 하는 것이다.’병이 든다는 것은 삶의 익숙한 운영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병이 정점에 이른 신체 및 영혼에 의해 삶이 이끌리는 것을 용납해야 하고 정 치료가 되지 않을 때는 질병을 삶의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질병이 죽음으로 이어질 경우 병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몽테뉴가 강조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삶이 첫발을 내딛게 되는 조건인 것이다.
다음은 습관에 대해 보자.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 할 수 있다. 습관은 실행의 반복과 규칙성을 바탕으로 하여 필연적으로 선택의 부담을 줄여준다. 우리는 습관을 통해 이미 결정된 것에 끌려가는 일을 용납할 수 있다. 습관은 우리가 암묵적이고 수동적인 선택을 통해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매 순간 해야 하는 선택의 끊임없는 요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때 모든 관점을 고려하는 습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습관의 의식적 형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뭔가를 선택할 때 일반적으로 명료함보다 혼돈에 지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은 습관의 선로 위해서는 신빙성 있게 그리고 경탄할 만한 규칙성 아래에서는 원만하게 진행된다. 이처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습관이다.
확고하게 정착된 습관은 어떤 경우에도 일종의 힘이 된다. 습관의 가장 탁월한 효과는 우리가 그 힘의 명령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검토해보기 위해 그것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경우 더 이상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사로잡고 예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몽테뉴는 삶 속에서 상이한 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 다른 습관을 준비해 놓으라고 한다. 그리고 계기가 생겨 마음에 드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도 즉각 정상적인 모습을 잃지는 말라고 한다. 습관은 스스로에게 형식을 부여하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되게 만드는 하나의 기법인 것이다.
습관은 단조로움과 똑같은 행위의 생각 없는 반복으로 이어지며 심지어 인간을 본능에 이끌리는 동물로 변하게 한다. ‘모든 습관은 거의 항상 사악하다’는 말은 그 때문에 생겼다. 습관은 이중적 딜레마에 빠진다. 습관화는 삶의 침착한 실행을 가능하게 해 주지만 늘 무감각이 뒤따른다. 그리하여 이미 익숙해진 것과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어려워지고, 또 습관적이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고 생각하는 것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성찰적인 삶의 기술을 위해서는 얼마나 앞서 형성된 습관이나 의식들을 수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스스로 형성된 의식들을 유효화해야 하는지,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수정해야 하는지? 안정과 유동성 사이의 폭을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해 무엇을 새롭게 시험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찰적 삶의 기술에서는 고유한 수련 및 기법과 함께 고행의 구성요소인 쾌락을 다루는 일 역시 의식에 따라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흔히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사고(思考)하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듯이 풍족한 생활, 번영, 건강을 향한 강력한 지향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나 행복해 지는 것에 대하여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말로 바람직한 생각일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은 자기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도만큼 부정적인 것의 세례도 같이 받게 된다는 사태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고착성과 자신을 그것에 내맡기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런데도 말이다. 강박관념 때문에 매우 사소한 비정상조차 부정적인 것으로 확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순순하게 긍정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가능성 없는 모험을 근거로, 마법으로 그린 세계를 불러내는 수사(修辭)만 늘어간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긍정적 사유와 부정적 사유의 차이는 성과에 대한 태도에서 첨예화 되는데 긍정적 사유는 성과에 대한 강박관념을 불러오지만 부정적 사유는 그렇지 않다. 성과가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부정적 사유는 성과만을 주목하지 않으며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술과 결합되어 있다. 또한 성과가 부득이하다 하더라도 자기는 그 성과에 맞서 철저히 대비한다. 왜냐하면 성과는 긍정적 사고의 근본적 수용방식과는 달리 결코 긍정적인 것만을 수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의혹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가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오해에서 기인한다. 긍정적 사고가 삶의 성가신 모순 구조를 곤경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믿고 긍정적인 것만이 길을 열어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성과나 목표를 강하게 추구할수록 삶의 모순들에 추월당할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다.
선과 악의 관례적 구분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개념에서 쌍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며 덜 고풍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행위이다. 긍정적 사고의 낙관주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헐뜯기 잘하는 사람으로 매우 쉽게 간주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부정적인 기본태도를 비난하는 가운데 궁지에 몰리게 된다. 긍정적 사고 편에서는 터무니없이 그 중심인물들이 역습을 통해 진화라는 의미의 발전촉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항상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인간들은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부정적인 것이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동안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공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는 달리 부정적 사고는 성찰적 삶의 기술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판능력을 보존해 주는데, 비판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으며 긍정적일 수 없다. 비판은 악의적이고 비열하다. 그래서 비판이 그처럼 특별히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다. 좋게 생각하는 긍정적 사고는 맹목적인 희망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부정적 사고 또한 낙관주의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신중(愼重)함만이 사유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해 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 환경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사물들로 이루어져왔다. 집과 가구, 기계와 운송수단, 옷가지와 세탁물, 책과 그림, 통조림 강통과 담배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현재는 기형적인 물건들이 도처에서 우리 주변으로 밀려오고 있다. 그것들은 일상의 사물들을 밀어낸다. 우리는 이런 기형적인 물건들을 ‘정보’라고 부른다.”(빌렘 플루세르, 1920∼1991)
전래적 의미에서 정상이 아닌 상태로 실존은 하지만 이 정보는 일종의 현실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삶의 수행의 올바른 방향 설정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를 포함한 정보들과 함께 아무런 의미도 없이 저장되었다가 불려내질 수 있으며 새롭게 형성되고 또 저절로 재생성 되기고 하는 무수한 정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정보들은 채널과 고속 데이터 선로에 넘쳐흐르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포괄적 의미에서 가상공간을 형성된다. 이는 실질적 공간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두 종류의 공간에서 살기 시작했다. 넓이를 지닌 진짜 공간뿐 아니라 인공지능 공간에서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들은 이미 다양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왔다. 신들이 북적거리던 별들과 그것들 의 운동법칙으로 북적거리던 하늘 아래서. 그러나 이제 천체는 디지털화 되었다. 천체는 인공위성들이 다각적으로, 혹성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쏘아대는 정보들에 의해 늘 번쩍인다. 유성들은 인간의 자세와 태도에 거듭거듭 영향을 미친다. 내 위에 있는 디지털 천체와 내 안에 있는 사람의 기술에 까지...
지금 우리는 과학기술로 인한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 삶의 기술의 주체로서 지속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도 과학기술(검색엔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본래의 정보관리는 여전히 주체 자신의 몫이다. 근본적으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얻느냐 이고 다음은 선택할 용기를 가지고 중요도의 순위를 결정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중요한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진실이나 사실에는 오로지 한 가지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충만해지도록 삶을 이끌어 가는 힘. 이 한 가지 말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 시대의 여러 가지 징후 중에 하나는 엄청난 도전 한가운데에서 체력과 건강을 관리하려는 욕구다. 한마디로 건강에 대한 유례없는 강한 욕구로 삶의 기술도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 건강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건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건강은 질병과 대조를 이루는데 건강하다는 것은 앓지 않는 것을 뜻한다. 병에 걸린 환자들은 건강이 값진 재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병에 걸리면 질병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건강한 사람은 수많은 소망을 갖고 있지만 병든 사람은 오로지 하나 건강해 지는 소망뿐이다. 그런 만큼 각 개인의 삶에서 건강은 상당히 의미를 지니며 그 어떤 경험보다 더 우선적으로 추구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가 건강을 선택한다할지라도 질병의 배제를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건강과 질병의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건강과 질병은 삶의 모순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만 아니라 의심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질병을 결정적으로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완전한 건강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순구조가 얼마나 집요하게 유지되는지는 현대역사에서 질병을 뿌리 뽑으려고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새로운 질병들이 속속 등장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될 테지만 이런 노력이 언젠가는 모든 질병이 퇴치되어 인류가 질병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라는 망상까지 가지지 않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에서 육체와 영혼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사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병이 전적으로 육체적인 것으로 조건 지어 진다할지라도 병은 역시 육체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록 객관적으로 측량할 수 없더라도 영혼에서 방출되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할 수 있다. 또한 영적인 에너지에 다시금 방향을 제시해주거나 아예 그것을 일깨우고 유인하고 자극하는 사고 과정과 사유의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삶의 기술에서의 건강에 필요한 측면은 초월성차원에 관련된 문제이다. 병까지 연관시키고 포괄하는 의미에서 건강을 얻는다는 것은 그런 연관이 기반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일이다. 초월성과 관련한 연관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한 없고 진지한 종교성의 복구가 무척이나 필요하다. 이것이 형이상학적 치료에 대한 질문에 관련될 수도 있는 기본적이고 제거할 수 없는 비극적 사태와 우리를 새롭게 대질시키는 21세기의 과제이다.
사람이 쾌활하게 산다는 것에 대하여는 기원전 4∼5세기 데코크리토스(Democritos, BC570∼460경)가 쓴 논술 〈쾌활함에 관하여〉에 이미 잘 드러난다. 그는 ‘심성의 호의, 좋은 기분 상태에 관해 말하고, 이 상태는 우연히 이렇게 또는 저렇게 나타날 수 있는 마음 상태 이상의 무엇으로 쾌활함은 쾌락을 적절히 다루는데서 그리고 균형 잡힌 삶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쾌활하게 살기 위한 쾌활함을 위해서 ‘우리는 정신에 원귀회복을 위해 필요한 여유를 다시 베풀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탁 트인 천공 아래에서 신선한 공기를 접하면 생기가 돌고 의기양양해진다. 때로는 말을 타고 나가는 소풍, 여행 그리고 다른 지역에 머무는 것이 새로운 기운을 북돋워 줄 수도 있고, 사교모임과 자연스러운 술자리도 그렇다고도 한다. 그러나 세네카가 경고한대로 “정신이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그것을 자주 즐기지는 말아야 한다.”
쾌활하게 미소 짓는 얼굴은 자기 확신을 증명한다. 그것은 슬픔의 심연에서도 드러난다. 슬픔은 기쁨에 대비되는 개념이지만 쾌활함에 대비되는 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는 슬픔의 심연이 메워져 평평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오히려 슬픔의 심연은 삶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쾌활함은 지극한 행복의 한 형식일 뿐으로 이 지극한 행복은 행복이라는 근대적 개념과 혼동될 수 없다. 쾌활함은 충만한 삶 가운데서의 실현이며 무엇보다 삶의 충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쾌활함은 유연하고 갇힘이 없으며 오히려 무한 차원을 향한 개방성을 가지고 있고 쾌활함은 후회 없는 삶을 이끌게 될 것이다. 쾌활함은 아름다움의 실현과 더불어 커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제약 없이 긍정할만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제약들 역시 긍정할 만한 가치로 파악하는, 제약 없이 긍정할만한 것 그렇게 해서 비로소 삶이 축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쾌활한 사람이 언제나 좋게 보이는 것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옮긴이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은 우리가 철학이라는 학문분야에서 떠올리기 쉬운 체계적 논리의 전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문제들과 변화된 삶의 환경으로부터 제기되는 새로운 현실적 문제들이 펼쳐지는 공간으로의 소풍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삶의 능력을 다시 가능하게 해주는 답변을 찾으려 한다.
인간의 삶은 습관, 쾌락, 고통, 죽음, 분노와 격정과 같은 문제와 대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이런 문제들은 삶의 충만함과 행복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슈미트의 삶의 기술은 이것과 연관된 문제 상황에 관여하고 문제 해결에 실천적으로 참여한다.” 20190607 비온 다음 날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