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5)
~그제야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11)
사도행전 12장 1절에 나오는 '헤로데 임금'은 '아그리빠 1세'이다. 그는 헤로데
대왕의 손자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와 베리니케 사이의 아들로 기원 전
10년에 태어났다.
그는 처음 몇 년을 로마에서 지냈고, 칼리굴라 황제(A.D.37~41년; 재위기간)의
총애를 받아 A.D.37년에는 후작령으로 일정한 땅을 차지한다.
형제가 살해당한 뒤 아그리빠는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되도록 협조한다.
황제직에 오른 클라우디우스(A.D.41~54년; 재위기간)는 고마움의 뜻으로 아그리빠를
A.D.41년에 유다 지방의 왕으로 임명한다.
유다 왕이 된 아그리빠는 자신이 죽던 해 (A.D.44년)까지 유일한 헤로데가(家)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조부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던 거의 전 지역을 다스린다.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은 육체노동을 통한 건축업이나 대규모 공사를 통해 돈을 벌면서
살기보다는 유다인들의 고유한 생활 양식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아그리빠는 소수 사람들을 박해하며, 여기서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지도적 인물들에
대한 박해를 통해 다수의 백성들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인다.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의 집권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의
민족 의식을 조성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다.
사도 야고보가 참수된 사실로 보아(사도12,2) 유다의 국가 권력이 여러해 동안
로마와 친분을 나눈 뒤에 다시금 사형 집행 권한을 정식으로 가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당시 유다 왕국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유다 백성들에게 죄를 범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 다음 베드로가 투옥되었다가 신비로운 손길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오게 되는
사건이 펼쳐진다(사도12,3~6).
그 때가 '무교절'이라는 시기의 표현(사도12,1)은 이 사건이 '예수 수난'과 결부
되었음을 암시한다(루카22,1~7).
예수님의 운명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다.
여기에 서술된 베드로의 처지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
초대 교회 당시의 베드로의 수위권과 으뜸 사도로서의 위치와 신분과 성소의 무게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베드로 반석위에 선 교회(마태16,18~19)안에서 으뜸 사도의 운명은 교회의 존폐를
가늠한다고 여기고, 공동(합심) 기도를 뜨겁게 한 것 같다(마태18,19~20).
하느님께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 편에 서 계신다.
따라서 밤, 쇠사슬, 감옥 등은 결코 속박이나 잃어버린 상태가 될 수 없다.
빛, 천사들의 출현, 살아 움직임, 사슬 같은 장애물의 제거, 문이 열림 등은 바로 구원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표징이다.
공동체의 뜨거운 공동(합심)기도로 '감옥문이 열려 갇힌 이들이 신기하게 풀려나오는
기적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하느님의 권능이 국가 권력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믿음을 드러낸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천사를 통해 구출되어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도달했을 때 아직도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본다(사도12,12).
그녀의 집은 당시 그리스계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던 집으로 여겨지며, 현관 문과
여종이 거론되는 것을 볼 때 귀족적인 집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