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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묵상글 (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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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연중 28주 토요일-2015
어제에 이어 오늘의 로마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얘기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
믿었기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하였다는 말로 읽힙니다.
그런데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한다는 게 도대체 뭔 말입니까?
희망이 없는데 뭘 희망을 한다는 것입니까?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희망이고,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이 영적인 희망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세상 사람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희망이 가능성이 있을 때 그것을 희망하거나 소망하고,
그 희망의 가능성을 자기나 다른 사람 안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자기든 남이든 인간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때
이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하게 되지요.
이에 비해 믿는 이들은 이때 희망을 하느님 안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을 때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질 때 하늘의 별이 보이고 달이 보이는 법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불이 꺼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을 보고, 별을 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아무 것 없어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찾으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도
아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거스르는 희망을 우리는 갈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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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2,10)
오늘 말씀은 아주 짧지만 아주 강력한 당부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2,10)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있다 하시니 말입니다.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인간 편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고 모욕한 바람에 초래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란, 우선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고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거나, 혹은 성령의 활동을 사칭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완고함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과 ‘완고함’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이는 ‘고집’이 성령을 거스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항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1)
이는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할 모든 것을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영을 따라 살게 하소서.
더 이상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주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는데, 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빛으로의 초대하시는데, 제 제 스스로가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당신의 영을 모독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수락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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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고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땅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고의로 거부하는 것은 그분의 선물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그 자유조차 존중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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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3년 ‘한가위’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축일과 겹쳐진 날이었습니다. 그날 미사는 축일 미사 대신에 ‘한가위’ 미사로 하였습니다. ‘한가위’는 우리 민족의 명절이기에 천사들의 축일이 양보하였습니다. 명절에 밀려서 축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명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천사들이 기꺼이 양보하였다고 생각하니 착한 일을 한 것이 알려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날 강론에서 신부님은 ‘한가위’의 의미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한가위는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부가 첫 수확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수확한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이 한가위인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창고에 쌓아놓고 이웃과 나누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듯이, 우리는 재물을 하늘의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하늘의 창고는 우리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린 이들 가운데 있습니다.
2023년 한가위에 ‘이민자들들 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민자들이 많은 브루클린 교구에서 이민자들의 공동체를 초대해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봉사자를 시상하는 행사입니다. 브루클린 교구에는 한인 공동체가 4곳이 있습니다.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 베이사이드 성당, 우드사이드 성당, 브루클린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당이 있습니다. 이날 오후 6시에 있는 행사가 우천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모두들 저녁 시간을 비워 놓았기 때문에 신부님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축일 축하파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민자들을 위한 행사가 저에게 천사 축일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것처럼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천사 축일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지하에 물이 고였습니다. 어떻게 청소를 할까 막막했는데 신부님들이 팔을 걷고 도와주었습니다. 내리던 비도 그치고 그렇게 한가위와 천사 축일이 지나갔습니다.
어제 저는 두려움과 믿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한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이 크면 믿음은 작아지고, 믿음이 크면 두려움이 작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믿음과 희망을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낯선 곳에서도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희망을 간직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 평탄하게 이루어지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충족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뜨거운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다고 믿는 것이 희망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기에 자식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셨고,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민족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희망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잘 아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종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백인대상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때로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신앙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완벽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업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결함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잘못을 했지만 뉘우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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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유치원 아이들과 동물원에 갔습니다. 그 동물원에는 동물을 만져보며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안대를 하고 새끼 코끼리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체험이 끝난 후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만져본 코끼리를 도화지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아이는 큰 기둥 같은 다리를 그렸고, 어떤 아이는 호스 같은 코끼리의 코를 그렸습니다. 다른 아이는 귀를 만지고 나서 코끼리는 날개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같은 코끼리를 만지고서도 다른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 우리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의 일부분을 체험하고 경험하며 만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만난 하느님을 이런 분이라고 말합니다.
코도, 다리도, 귀도, 꼬리도, 몸통도…. 모두를 만져봐야지만 코끼리를 정확히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야 코끼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한 번의 만남으로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의 대화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교감해야 비로소 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 문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고 교감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능소화
저는 능소화를 좋아합니다.
능소화는 7월부터 9월에 피는 꽃입니다.
꽃말은 이렇습니다.
‘업신여길 능’, ‘하늘 소’ 자를 씁니다.
하늘을 업신여긴다는 말입니다.
이런 거친 이름을 가졌을까요?
능소화의 만개 시기는 8월입니다.
비와 태풍과 더위가 기승을 부릴 그때
능소화는 피어납니다.
식물에게는 저주와 같은 그 시기에 말입니다.
오히려 능소화는
태풍 한 줌
더위 한 모금으로 피어나는 듯합니다.
능소화는 8월에 꽃피우며 계절을 향해 말합니다.
아무리 난리 쳐봐라. 나는 그래도 피어난다.
능소화! 꼭 우리 주님 닮은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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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운전하다가 라디오에서 ‘고마리’라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름의 유래는 너무 번식력이 강해서 ‘그만, ’고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또 하나는 더러운 물을 정화해 준다고 해서 ’고마운, ‘고마우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식물은 더러운 시궁창에서도 잘 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시궁창의 물을 깨끗하게 정화해 준다는 것입니다.
문득 ‘고마리’도 깨끗하고 모든 환경 조건이 만족스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 아니더라도 ‘여기는 도저히 못 살겠어.’라면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자기 주변을 정화하면서 변화시킵니다. 물을 깨끗하게 하고, 그래서 벌이 날아오게 하면서 자연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우리 곁에도 ‘고마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보다는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 주변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분이었지요. 이 세상에 악이 얼마나 많이 판치고 있습니까? 그 ‘악함’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님,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통해 악을 이기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궁창처럼 더럽고 냄새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면서 철저한 사랑의 실천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저희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의 악이 우리를 박해하면서 온갖 고통과 시련을 주더라도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많은 말과 행동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도 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거나, 자신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희망 없는 절망으로 몰아넣는 이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고마리의 모습처럼, 용기 있게 주님 사랑을 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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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희망이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시들어 결국 말라 죽고 만다(세스 고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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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성령님!
-신망애(信望愛)의 삶-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의 소주제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는 교회의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교회에 속한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인 우리의 사명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참 좋으신 주님을 그대로 한결같이 끊임없이 반사하는 참 좋은 삶, 말그대로 신망애의 삶입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행복하게 살게 하는 신망애의 삶,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으로 행복하지만 어제도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주문했던 커다란 그림 동화집, “사랑을 주면 줄수록”이란 책을 받았고 그림만 봐도 행복했습니다. 책은 다음처럼 끝납니다.
“아이는 언제나 더 많은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그만큼 많은 사랑을 돌려 받았어요, 돌아온 사랑이 더 컸을까요?
그럼요!
사랑은 지금껏 아이가 상상해 온 것보다 훨씬 더 컸어요.
그리고 그 사랑 덕분에 행복했답니다.
그곳에 숲이 있었어요.”
사랑의 숲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 바로 거기가 사랑의 숲이요,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바로 오늘 여기서부터 사랑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면 줄수록 사랑을 받습니다.
어제 뜻밖에 46년전 1977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8명으로부터 쌀 8부대를 선물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13세때 아이들은 지금은 59세의 장년들이 되었고 당시 저는 29세의 쳥년교사였던 저는 지금은 영원한 현역의 75세 노수도승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잊지 않고 수도원에 사랑의 선물인 쌀을 보내주는 제자들입니다. 오늘 고마운 8명 제자들을 위해 생미사를 봉헌하려 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이런 사랑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줍니다. 주님을 증언할 힘을 줍니다. 모든 사랑의 뿌리에는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안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랑의 증언입니다. 사랑할 때 압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안다고 증언합니다. 어제 원장 수사가 노트북 파일 정정법을 가르쳐 준 후, 요즘 쓴 시를 달라 하기에 나눈 짧은 두 시가 있습니다. “하늘”과 “하늘과 산”이라는 시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바 사랑입니다.
-“고결高潔하게
살라고
언제 어디서나
눈들면
높고 높은 하늘
넓고
깊게 살라고
언제 어디서나
눈들면
넓고 깊은 하늘
날마다
배우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다”-
날마다 배우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하늘 같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어 ‘하늘과 산’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나
아, 평소 늘 그리고 바라던
하늘이
산이
하늘과 산이 되었구나”-
언제나 늘 거기 있는 하늘같은, 산같은 “사랑”이 되기를 소망하며 쓴 고백시입니다. ‘하늘과 산이 되었구나’ 말마디를 바꾸면 ‘사랑이 되었구나’가 될 것입니다. 사랑의 성령,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가 사랑입니다. 진리이자 사랑이신 성령을, 주님을 모독하면 안됩니다. 진리이자 사랑인 성령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자 성령을,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성령, 진리의 성령이요, 이런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령의 힘은 주님의 힘입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을, 희망을 북돋아 주는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 앞에서 참으로 겸허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겸허와 감사를 거스르는 것 역시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의 희망, 성령의 사랑, 성령의 믿음입니다. 성령이 답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모독함을 삶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참으로 어떤 박해의 어려움중에도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않게 하는 믿음은 순전히 성령의 선물입니다. 적절한 필요한 말을 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의 주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야 말로 신망애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다음과 같은 아브라함의 묘사가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던 희망의 사람,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그 희망과 믿음의 저변에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깊디 깊은 사랑과 앎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신망애의 영웅, 아브라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한 희망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희망없이 살 수 없다. 매일의 적은 희망을 잘라내면 우리의 정체성도 잃게 된다. 우리는 희망위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신적 희망은 매우 수수하지만 그러나 매일 양념을 치는 것과 같다.”
참으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궁극의 희망이신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신망애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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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백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카 12,8)
불신의 사람들 앞에서
믿음의 고백을 굳세게
절망의 사람들 앞에서
희망의 고백을 환하게
증오의 사람들 앞에서
사랑의 고백을 뜨겁게
배척의 사람들 앞에서
포용의 고백을 따뜻하게
독선의 사람들 앞에서
관대의 고백을 부드럽게
탐욕의 사람들 앞에서
나눔의 고백을 아낌없이
불의의 사람들 앞에서
정의의 고백을 거침없이
폭력의 사람들 앞에서
평화의 고백을 넘치게
억압의 사람들 앞에서
해방의 고백을 드높게
죽임의 사람들 앞에서
살림의 고백을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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