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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7. 묵상글 (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 은총과 은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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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과 은사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은사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은총과 은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부끄럽게도 옛날에 은총론이란 것을 배웠는데도
이 은총과 은사의 차이점에 대해 알지 못하겠고
그래서 오늘은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그 차이점을 한번 보고자 합니다.
은총이란 아시다시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공로나 노력과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고 그래서 사랑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은 내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은사는 이웃사랑을 위해 내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고 있고,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라고 베드로 사도 또한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 지체가 되고,
우리의 은사는 서로를 위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자기를 위해 쓰라고만 주시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저 주신 것은,
우리 또한 거저 주라고 주신 것이고 그것이 제 생각에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쓰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은사는 죽은 은사가 될 것이고,
은총도 내 안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은총이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면
사랑을 위해 쓰이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 은총이 아닌 것은 당연하고
그 은사도 똥과 같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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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은 먹는 것을 찾아다니는데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TV에서도, 인터넷 주요 검색 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이 “맛 집” 입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 집”에 차려진 음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혀의 유쾌함을 넘어서는 “참된 맛 집”을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대체 최상의 “맛 집과 음식”을 어디에서 맛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라는 “맛 집”에서 먹는 “하늘나라의 음식”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곧 “구원의 천상음식”을 먹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초대되어, 바리사이 지도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아사상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큰 잔치를 베풀 것인데, 그 잔치에는 유대인 자신들만이 초대받았기에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라면, 잔치에 사람들을 부르러 나간 “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종”이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초대된 이들에게 잔치가 다 준비되었음을 전하지만, 그들은 초대를 거절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시간이 되자~,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라고 전하게 하였습니다.”(루카 14,17). 그러나 그들은 밭이나 가축을 샀고, 막 장가를 들었다는 핑계로 초대 약속 지키기를 거절합니다. 그들은 세속의 헛된 망상에 쏠려 이 귀한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미 잔치 준비가 다 되었으나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본다면, 이들은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리사이들이요, 유대교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이는 자신의 일을 핑계로 복음 사명을 도외시하는 우리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의 초대에 일방적으로 불참을 선언하고 마는 우리의 완고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초대된 사람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연되거나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주인은 또 다시 “종”을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보냅니다. “고을의 한길”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면, “골목”은 소외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나타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도자들이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 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들은 비록 인간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밭이나 소를 사지도 장가를 가지도 못했지만, 주인의 배려와 사랑에 응답하여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은 또 다시 “종”을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보냅니다. 곧 성 밖으로 보내어, 그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라고 합니다. 주인의 애타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성 밖의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고 잔치에 들어갑니다.
결국,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를 무시하지 않고 따라나서고, “종”의 인도를 받아 당신이 마련하신 주인이신 아버지의 집인 잔치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이 존귀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몸소 따르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루카 14,17)
주님!
당신은 잔치에 음식을 준비하시고, 저희를 부르십니다.
저희가 준비가 되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준비되신 까닭입니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호의에 응답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을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당신이 차린 음식을 먹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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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밭을 샀으면 밭에 나가볼 수 있고 겨릿소를 샀다면 그 소를 잘 샀는지 부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방금, 결혼했다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가야 할 잔칫집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집입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핑계가 필요합니까? 더 좋은 것, 지금까지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가 눈앞에 주어졌는데 왜 망설여야 합니까? 결국 지금까지 기다리고 희망하던 것은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이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놓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나 없이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갖는 한 구원의 잔치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택하면 더 큰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14,24). 결국 처음 초대 받았던 사람들은 재산과 사업상의 관계, 결혼이라는 핑계거리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에서 멀어졌습니다. 이 순간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하느님 나라보다 물질이 앞설 수 없고, 돈이 정신보다 우위일 수 없으며 시간이 영원보다 값질 수 없습니다. 일이 중요하지만 일의 노예가 되어 영혼의 자유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도 영생을 향한 일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의 결합을 통해 가정을 형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능적인 행위로 영혼 사정을 돌볼 겨를 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뿌려진 씨앗의 비유(마태13,1-9)를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씨앗이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관심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돌밭은 흙이 얼마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련이나 어려움이 오면 금방 신앙이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핑계를 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하느님 앞에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열망하며 그것을 너무 많이 고려하다가 그만 중요한 것, 천상의 선물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돌다리를 두드려 보다가 오히려 돌을 깨뜨리고 만다고.’지금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우선 부름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뽑힌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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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양의 고전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이 첫 번째 기쁨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더불어 세상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두 번째 기쁨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기쁨이다.” 여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하는 첫 번째 기쁨은 무병장수하는 것이 첫 번째 일 것입니다. 성공하여 재물을 풍족하게 쓰는 것이 두 번째 일 것입니다. 권력과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대접받고 사는 것이 세 번째 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들을 원하기에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할 때 이 세 가지를 사용하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다른 차원에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곡신불사(谷神不死), 상선약수(上善若水), 천장지구(天長地久)’를 이야기합니다. 계곡은 비어 있기 때문에 신령하고, 물은 아래로 흘러서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데에 거처하므로 땅과 곡식을 풍성하게 한다. 하늘은 높아도 모든 사람을 감싸고, 땅은 죽은 쓰레기를 다 받아들여 생명으로 바꾼다. 그래서 텅 빈 산의 계곡과 거기서 흘러내린 물,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늘과 땅에게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헌신과 겸손이 기쁨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사제삼락(司祭三樂)’이 있다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사제는 예수님을 따르기고 약속하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제의 기쁨의 원천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겸손과 헌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거만한 헌금보다 과부의 겸손한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거만한 기도보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와 사제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서 헌신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겸손과 헌신이어야 합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마귀 들린 사람은 치유하고, 병자들은 고쳐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오직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익숙한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겸손과 헌신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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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식사 공동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중에 기본이 되는 단위는 가족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식사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녀님들 공동체나, 본당 신부님들의 공동체 역시 식사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더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함께 마주 보고, 이야기하고, 감정과 생각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라는 유대감을 형성하게 하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식사하십니까? 자녀들과 혹은 부모님과 말입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식사 공동체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 유대감은 떨어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를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초대된 사람들은 한 가족, 한 공동체로서 인정받았고 그래서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그런 만남의 자리를 사람들은 피합니다. 자신의 생활이 더 중요하기에 공동체, 사랑을 나누고 정을 나눠야 하는 그 자리를 져버립니다.
그 결과는 멀어짐입니다. 그러면 서로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야말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사랑을 나누기에 참으로 기가 막힌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져버리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빵을 나누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의 마음을 나눕니다. 미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족이 되고, 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미사 즉, 하느님의 이 초대가 우리에게 언제나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이 시간을 져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혼은 지퍼와 같다.
혼인 주례를 하신 신부님께서
혼인 성사 중 하신 강론의 주제입니다.
결혼은 지퍼와 같다.
우리가 아는 그 지퍼 맞습니다.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그 지퍼 맞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지퍼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퍼는 무조건 양쪽을 이어주는 고리가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는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지퍼의 고리가 있다면 그것은 지퍼로서 제 역할을 다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퍼는 그 역할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혼인도 그렇지만 우리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가운데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우리의 불협화음은 곧 정상적인 모습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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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키울 곳을 찾아서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공동묘지 근처로 이사하지요. 그러자 상엿소리와 곡소리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다음은 시장 근처로 집을 옮깁니다. 그러자 상인들이 호객하고 흥정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이번에는 서당 근처로 집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글 읽는 흉내를 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배움에 적합한 곳으로 판단해서 이곳에 정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 군데 모두가 맹자를 위한 환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처음의 공동묘지 근처에 살면서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었고, 이로써 삶을 진지하고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장소인 시장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평범한 삶의 치열함과 백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곳이 맹자의 교육에 나쁜 영향만을 주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사상가 맹자를 만드는 훌륭한 환경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곧바로 서당 옆으로 이사 갔다면, 아마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또 인생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내 자리는 언제나 중요했습니다. 나쁜 환경이라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지금 내 자리는 최고의 환경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해 주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손님을 초대하여 모아 놓고 베푸는 잔치와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초대는 시대와 장소를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밭에 가려고, 겨릿소를 부려 보려고, 장가를 들어서’라는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은 초대보다 자기 일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느라 바쁜데 초대한다고 불평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초대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에 주의를 기울이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최고의 선물을 가지고서 부르십니다. 따라서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께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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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을 치유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인간을 전체로 보아야 하고, 긍극적인 치유는 하느님 사랑뿐임을 알아야 합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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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에서 천국天國의 삶
-주님의 초대는 선물이자 과제이다-
그동안 몇 차례의 피정지도 강의때 서두에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 피정이든 맨먼저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매일미사에 참석한 분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내용들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참 오늘 기막힌 선택을 잘 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새삼 이런 선택 역시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좋은 선택은 결단이자 동시에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곳,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나러 오신 가장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한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함으로 참 좋은 선택을 하신 여러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의 큰 잔치 비유에서 보면 세 사람의 경우 바쁘다는 핑계로 주인의 초대에 모두 불응함으로 참 좋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꿔 이해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초대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응답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참으로 이들이 지혜로웠다면 만사 제쳐놓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인의 초대의 선물에 응했을 것입니다.
초대를 거절하자 주인은 종에게 이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심정을, 하느님의 심정을 반영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열린 구원의 기회요 초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 교회에 주어진 선교 사명을 상징합니다.
“어서 가서 가난한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자리가 차지 않자 주인은 거듭 종에게 분부합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큰 잔치 비유는 오늘의 우리를 향합니다. 이 공동의 집인 지구에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로 태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의 선물인지요! 절망이나 자살이 얼마나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큰 죄인지 깨답게 됩니다. 지상에서의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귀한 존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교회의 세례성사요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함으로 참으로 지상에서의 천국 삶을 선택하여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주님께 초대 받은 선물 인생임을 까맣게 모르고, 참으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바쁘게 무지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기도 할 것입니다.
삶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 사는가?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초대 받은 선물 인생,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지상에서 천국 삶을 살아보라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아보라고 주님께 초대 받은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두번 초대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이시고 날마다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미사잔치의 초대에 응답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미사잔치가 우리 모두는 우연적 존재가 아닌 초대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초대에 선택으로 응답했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닙니다. 날마다 죽을 때까지 초대에 응답하는 삶이어야 하고 초대받은 사람답게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초대에 감사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으로 응답하지 않고, 초대받은 신분임을 까맣게 잊고 세상 일에 빠져 살다 보면 구원은 요원할 것이며 이는 바로 그 당사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받은 신분임을 잊은 냉담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세상에서 할 일 다하고,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 만날 것 다 만나고 하며 세상 일에 중독되어 바쁘게 살다 보면 주님의 초대에 응답은 끝내 이뤄지지 못할 것이며 급기야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사 제쳐 놓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삶의 중심과 질서도 잡히고 비로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 초대에 응답 하는 자체가 바로 회개의 결정적 기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대에 선택으로 응답했다 하여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초대는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입니다.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가 초대요 과제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초대받은 사람답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결코 값싼 은총도, 값싼 구원도, 값싼 평화도 없듯이 결코 값싼 초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제를 실천합니까? 고맙게도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통해 초대받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알려 줍니다. 사도 바오로의 자신의 삶에 대한 적나라한 나눔같습니다. 사도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가열찼는지 감동하게 됩니다. 다음 과제 내용에 여러분 삶을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내용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을 위한 규범들입니다.
1.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2.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3.형제애로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4.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5.희망속에 기뻐하고 환난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6.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7.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8.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9.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10.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11.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12.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13.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14.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15.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무려 15개 항목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삶이 얼마나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겸손한 삶이었는지 그대로 감지되는, 또 예나 이제나 얼마나 힘든 공동생활인지 깨닫게 하는 구체적 생활지침들입니다. 결코 혼자가 아닌 모두가 더불어 아가페 공동체 삶을 위한 치열한 영성훈련의 내용들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초대받은 사람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결코 값싼 초대가 아니라, 분투의 노력으로 응답해야 하는 초대받은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초대받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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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로 그렇게>
나를
믿는 이의
믿음대로 그렇게
나를
바라는 이의
바람대로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이의
사랑대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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