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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9차 산행]♣ 백두대간 <새재-부봉>
▶ 2018년 6월 17일 (일요일) ◀
* [산행 코스] 고사리 주차장[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09:46)→ 백두대간 ‘조령’-조령관[문경 제3관문]→ 동화원→ 계곡길(원시림)→ 동암문→ 부봉 갈림길→ 부봉(1봉)→ 부봉(2봉)→ 부봉(3봉)→ 부봉(4봉)→ 부봉(5봉)→ 부봉(6봉)→ 조곡관[문경 제2관문]→마사토 명품길→ 주흘관[문경 제1관문]→ <영강 송어회>→ 귀경(오후 8시)
* [백두대간의 부봉 삼거리] — 가파른 바위를 타고 <부봉 제1봉>에 낮 12시 12분, <부봉>의 제일봉(917m)에 올랐다. 암반의 가장자리에 누구를 기다리듯 작은 표지석이 있다. 아주 널따란 공간이 있는 암봉이다. 한쪽으로 몇 그루의 장대한 소나무가 풍치를 더하는 곳이다. 시야가 환하게 열린다. 우선 동쪽으로, 멀리 대미산에서 가까운 포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동남쪽으로는 주흘산 영봉과 주봉-관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장중하기 그지없다. 동북쪽으로는 백두대간에서 북쪽으로 뻗어 올라가는 월악산 지맥이 울컥울컥 뻗어나가고 있었다. 멀리 월악산 영봉이 시야에 들어오기도 했다. 첩첩청산으로 출렁이는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더하기 빼기가 필요 없는 청정 산하(山河), 깊은 침묵으로 흐르는 있는 그대로의 대자연의 풍경이 가슴을 채운다. 암봉의 가장 자리의 관목에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꼬리진달래’라고 하는 희귀종으로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것이라 강우신 님이 말했다. … 소나무 아래 깨끗한 암반 위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부봉 제1봉의 조망] 백두대간에서 부쪽으로 뻗어올라가는 월악산 비맥 (왼쪽 소나무 가지 사이에 월악산 영봉이 보인다) [부봉 제1봉의 조망]-앞에 보이는 암봉은 백두대간 <포암산> 멀리 뒤쪽으로 높이 솟은 <대미산> 앞에 보이는 큰 산이 <주흘영봉>, 멀리 산 능선에 불쑥 솟은 봉우리가 <주흘산> <부봉 제1봉> <꼬리 진달래> (희귀종) * [부봉 제2봉] — 바위 아래 작은 표지석, 그리고 미륵바위 오후 12시 50분, 식사 후, 오후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제2봉으로 가는 길. 가파르게 아래로 쏟아진다. 길목에 크게 하늘을 가리는 ‘바위집’이 있다. 그 아래 공간이 널찍하고 아늑해서 비나 바람을 피하고 하늘 저녁은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긴 철계단을 타고 내려가 안부에서 다시 오르막을 오른다. 거기 <부봉 제2봉>이 있다. 바위 아래 작은 표지석이 겸손하게 길벗을 맞아준다. 지평과 강우진 님이 표지석을 바라보며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그 뒤, 나뭇잎 사이로 우리가 가야할 제3봉의 우뚝하고 굳센 바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긴 철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안부의 길 주위는 기묘하고도 완강한 바위들이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다. 지평이 절벽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미륵바위’였다. 절묘하게 빚어진 자연불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 비와 바람이 빚어낸 대자연의 조화였다. 미륵바위 * [부봉 제3봉] — 새재 주변의 모든 산곡을 조망할 수 있는 암봉 다시 긴 계단을 치고 오른다. 대원들이 열을 지어 차례로 오른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다시 바위 절벽, 지평 대장이 먼저 오르고 나머지 대원들이 차례로 가파른 바위를 탔다. 가파른 암벽에 자일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원들이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다. <부봉 제3봉>이다. 오르는 길을 강팍했지만 올라보니 아주 후덕한 암봉이다. 천지 사방의 시야가 환하게 열려 문경새재 모든 산곡과 주변의 장대한 산줄기가 가슴을 채워온다. 암봉의 주변에서 포즈를 취하는 대원들의 모습이 자연의 풍광과 어울려 멋이 있었다. * [부봉 제4봉] — 뾰족한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한 그루 다시 안부로 내려갔다가 앞으로 나아가니 가파른 바위를 앞을 가로막는다. 제4봉을 올라가는 길이다. 올려다보니 경사가 급하여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평 대장이 먼저 직벽에 가까운 바위를 치고 올라, 준비해온 비상자일을 꺼내 아래로 내려주었다. 대원들이 주의를 집중하여 한 사람씩 바위를 타고 올랐다. 일부 대원은 오르기를 포기하고 우회로로 길을 잡기도 했다. <부봉 제4봉>, 산정에 올라보니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풍경이 아주 장관이었다. 크지 않지만 소나무 한 그루가 암봉에 서 있다. 너무 당당하고 멋있다. 그렇게 산은 정직하고 아름답다. 올라온 만큼 놀라운 경치로 가슴을 채워준다. 정직하게 땀을 흘린 만큼 자연이 주는 보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무모하지 말아야 하고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산(山)을 품고 산을 오르는 사람을 겸허해야 한다. 기백을 앞세워 만용과 욕심을 부리면 문제가 생긴다. 말없는 산이 우리에게 몸으로 전해주는 가르침이다. * [부봉 제5봉] — 험난하게 오르내리는 암봉을 타고 암봉을 내려와 다시 바위를 타고 오르기를 몇 차례, 가파른 바위를 치고 오른다. <부봉 제5봉>이다. 온 사방 주위의 첩첩 산의 장관이 가슴에 안겨든다. 깎아놓은 듯한 경사면의 바위, 그 가장자리에 산봉을 지키는 소나무 그대로 하나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대원들이 포즈를 잡는다. 바위와 소나무와 사람이 삼위일체가 되어 빚어낸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부봉의 암봉으로 이어져 나가는 험난한 코스이다. 내리고 오르는 만큼 힘이 들지만 일단 산봉에 오르면 산행의 고단함을 잊는다. 산을 타는 묘미가 이런 것이다. 사서 하는 고생이라고 말하지만 그 고행이 즐겁고 유쾌한 것이다. 다시 몇 개의 바위를 타고 오르내리고 난 후 거대한 절벽을 만난다. 제6봉으로 올라가는 안부(鞍部), 다시 가파르고 긴 철계단을 오르고 그 위에 절벽의 바위를 타고 올라간다. 자일을 잡기도 하고 바위에 붙어서 기기도 한다. <부봉 제5봉> * [부봉 제6봉의 암송] — 오늘 산행의 최종의 포인트 오후 2시 30분, 오늘 산행의 마지막 포인트인 <부봉>의 제6봉에 올랐다. 새재의 계곡의 북쪽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우람한 암봉이다. 가슴이 열리듯이 시야가 열린다. 서쪽으로 백두대간 깃대봉과 신선암봉, 그리고 장엄한 조령산의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부봉의 형세는 봉황(鳳凰)이 품은 거대한 알[大卵]이다. 산봉에 서면 새재 제3관문에서 제1관문으로 내려가는 계곡이 아득한 깊이로 내려다보인다. 산봉은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정상석을 중심의 늘 푸른 소나무들이 어울려 있는 곳으로, 고고한 멋이 풍기는 곳이다. 세상과는 거리가 멀고 하늘이 가까운 지점이다. 새재 일원의 장엄한 산들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부봉 제6봉>에서의 부자유친(父子有親) * [부봉 제6봉에서 내려가는 하산길] — 험난한 바윗길과와 노송이 즐비한 부봉 등정을 마치고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길은 험난한 내리막길이다. 등산(登山)은 올라간 만큼 내려오는 길의 여정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정직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산이고 자연이다. 그리고 산(山)은 순수 생명의 원천이다. 산이 품고 있는 맑은 물은 유장하게, 아래의 세상으로 아낌 없이 흘려보내 모든 만물을 살린다. 산에서나 우리 인생에서 욕심을 부리거나 성급하면 반드시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험한 구간일수록 더욱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방심하거나 성급해서는 안 된다. 내려오는 거리가 녹녹치 않았다. 백두대간에 속해 있는 새재의 산(山)이 높고 골이 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니 경사가 완만한 산록에 이르고 산죽의 군락지가 나타났다. 그 아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산길에 뒤돌아본 <부봉 제6봉> ♣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풍광(風光) 제2관문 <조곡관>으로 내려왔다. <조곡관(鳥谷關)>은 조선 선조 때(1594년) 축성된 관문으로 새재의 세 개의 관문 가운데 그 풍광과 문루가 가장 아름다운 명소이다. 관문의 동쪽은 주흘영봉(1,117m)에서 뻗어 내려온 장대한 산줄기와 닿아 있고 서쪽은 조령산의 신선암봉(939m)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절벽이다. 성문 앞에는 동쪽 주흘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이 가로질러 나가고 있다. 산과 절벽과 물과 문루가 어우러진 풍광도 아름답지만 이곳은 전술상 아주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성문 앞은 해자(垓字, 성곽 주위를 둘러친 물)의 역할을 하는 계곡이 흐르고 성문의 안쪽은 비교적 너른, 울창한 송림(松林)이어서 많은 군졸이 주둔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성문 앞의 계곡 위에 조곡교(鳥谷橋)를 만들어 꽉 짜인 산세가 준수하고 골짜기의 한 가운데를 장악하고 있는 성곽과 문루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주위에는 쭉쭉 뻗은 장송의 군락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 주고 있다. 장대한 노송(老松)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계곡의 가장자리에는 암반에서 솟아나는 ‘조곡약수’가 있다. 문경새재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뒷면 문경새재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정면 * [제2관문~제1관문] — 청정 조령계의 아름다운 명품(名品) 길 여기서 <주흘관(主屹關)>(제1관문)까지의 구간은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이다. 일반 관광객들의 ‘걷기’는 보통 이 구간을 왕래하기 때문이다. 제1관문으로 내려가는 새재 길은 낙동강의 원류 중의 하나인 조령계곡(鳥嶺溪谷)을 따라 이어진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다. 특히 용추에는 ‘버들치’나 ‘꾸구리’가 서식하는 청정계곡이다. 새재 길은 날씨가 좋으면 맨발로 걸으면 건강에 좋다. 제1관문으로 내려가는 새재 길의 서쪽은 낙동강의 원류 중의 하나인 조령계곡(鳥嶺溪谷)이요, 동쪽은 주흘산(主屹山) 줄기에서 뻗어내려 온 가파른 산록이다. 이 길은 싱그러운 숲이 터널을 이룬다. * [문경(聞慶) 새재 명품길] -한국관광공사 선정 100선 중 1위 — ☆… ‘문경새재’는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 1위에 선정되었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에 이르는 새재의 고갯길은 우리나라 '명품 길 10선'에 들어있다. 그리고 2013년 한국관광공사가 국내 관광지를 대상으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 조사에서, 문경새재가 1위를 차지했다. (<조선일보> 2013년 9월 5일(목요일) 섹션 ‘주말매거진’ 보도) 이미 명승 32호로 지정 <문경새재>는 영주의 죽령, 영동의 추풍령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히며, 백두대간인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라고 해서 '조령(鳥嶺)'으로 불리기도 한다. ♣ [자연과 역사의 숨결] — ‘산불됴심’의 한글 표지석 예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추앙받던 주흘산의 기상이 흐르는 새재의 길에는 역사적인 유적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렇게 나무들이 즐비한 탄탄대로를 걷다보면 ‘상처난 소나무’가 과거의 아픔 역사를 증언하고, 조선 후기 한글 사용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산불됴심’ 표석이 또 눈길을 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 남아있는데, 새재의 ‘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고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다. ♣ [명소(名所) ‘용추계곡’] — ‘교귀정(交龜亭)’과 장대한 노송 한 그루 ☆… 마사토로 잘 닦여진 길을 따라 내려오면 한 그루 장엄한 노송(老松)과 어우러진 ‘교귀정(交龜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신·구 경상감사가 관인(官印)를 인계·인수하던 교인처(交印處)이다. 1470년 경(성종초)에 건립하여 지속적으로 사용해 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로 터만 남아 있었다. 1999년 6월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귀정> 교귀정 앞 에는 장엄한 노송 한 그루가 비껴 서 있는데 그 용자(容姿)가 아주 장관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새재의 절경 용추(龍湫)가 있다. KBS 인기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왕건에 의해 최후를 맞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이다. 옛날 이 길목을 지나는 시인, 선비들이 용추의 수려한 경치를 노래했다. 그 중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시비가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문득 시선을 끄는 소나무 장대하지만, 그 아래 조금 내려오면 울창한 전나무 군락지의 푸른 숲이 청신한 기운을 뿜어낸다. * [새재 길의 삶의 흔적들] — ‘주막(酒幕)’과 ‘조령원터’ ☆… 조령계의 맑은 물을 끼고 내려오다 보면, 새재를 넘나드는 과객들이 고단한 몸을 잠시 쉬어가는 ‘주막(酒幕)’도 있고 새재를 넘는 관리들의 여관 역할을 하던 ‘조령원터’가 있다.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영남대로]이다. ‘새재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이나 관리, 상인 등이 이 험준한 새재를 지나다 피로에 지친 몸을 잠시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고,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는 곳이다.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 주막을 옛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주막 입구에 율곡(栗谷) 선생이 쓴 ‘새재에서 묵다’ 시비가 서 있어 대학자의 숨결을 체감할 수 있다. ♣ [문경새재] — 천혜의 요새(要塞), 우리나라의 남북을 잇는 요로(要路) ☆… 우리 일행은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에 이르렀다. 청정한 새재 길을 걷는 맛이 아주 쾌적해서 좋다. 곳곳의 유적지와 산천의 풍경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보통 새재 길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제1관문(關門)이다.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관문은 신라시대부터 외적의 방비나 입국자의 조사를 위해 국경·군사요충지에 세운 성(城)의 출입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조정은 문경새재에 3개의 관문을 축성했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이요,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은 새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오른쪽의 주흘산(1079m)-관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와 왼쪽의 조령산(1,026m)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이 만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자연적 지형을 잘 살린, 그 규모가 아름답고 위엄이 있는 성문이다. 좌우의 성곽은 학(鶴)의 날개처럼 앞으로 뻗어내어 축성하고 그 성문 앞은 시야가 확연하게 열린 광장(廣場)을 조성하여 모든 상황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뒷면 ♣ [영남대로 문경새재] — 청운의 뜻을 품은 수많은 인재들이 지나던 길 ☆…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지칭되는 문경새재 과거(科擧) 길은, 조선 태종(太宗) 때 개설 되어, 약 600여 년 동안 영남과 충청도-경기도-한양을 잇는 요로(要路)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등극하여 금의환향한 길목이 이곳이었다.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의 중심은 영남의 선비들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구미로 낙향하여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제자를 길러낸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위시하여, 그 계보에서 용출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이 모두 이 길을 오고가면서 문명(文名)을 떨치며 세상의 영욕을 다했다. 무엇보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며, 조선시대 전기 대문장가 서거정(徐居正)도 대구의 양친을 그리워하며 이 고개를 넘었고, 한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안동 예안의 퇴계(退溪) 선생을 뵙기 위해 지나간 길도 이 길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이 길을 넘어서 영남의 민정을 살피러 갔다. 새재를 지나는 수많은 선비들의 사연이나 감상도 많다. 그래서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한두 편의 시를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 [영남대로 문경새재] — 그러나 때로는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 새재는 역사적으로 비운(悲運)의 현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곳도 바로 이 길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고니시의 부대는 부산에서 열 흘만에, 척후병들이 그렇게도 경계(警戒)한 문경 새재 입구에 도착했다. 비조불입(飛鳥不入), 문경새재는 나는 새도 못 들어간다는 천혜의 요새였고, 여기만 뚫으면 한양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은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그냥 왜적에게 내줌으로써 충주 탄금대에서 참패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전투 이틀 만에 신립 장군은 자결했고, 부장 김여물은 전사했다. 그리고 열흘이 채 안 되어 한양은 왜군에 넘어갔다. 고니시는 한양 입성 사흘 전 피난 간 선조를 쫓아 함경도로 진군했다. 백성들은 몰래 도주한 왕과 관료들에 분노해 궁궐과 관아를 불태우며 분노했다. ♣ [聞慶 縣監申吉元忠烈碑] — 왜군과 맞선 의기와 장렬한 순국! ☆… 문경새재는 비장(悲壯)의 충혼(忠魂)이 살아있는 곳이다.… 임진년 4월 26일,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이 접근해오자 피하지 않고 대적했다. 몇 안 되는 군사마저도 다 달아나고 총상을 입고 홀로 적장 앞에 섰다. 북상하는 왜군의 길을 막았다. 적장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비키라고 협박하자, 공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희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며 꾸짖었다.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가해 왔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꾸짖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왜란 끝난 후, 숙종 32년(1706년) 조정에서는 공(公)의 장렬한 순국을 기리어 ‘현감신길원충렬비(縣監申吉元忠烈碑)’를 세워 그 충혼(忠魂)을 기리고 있다. 새재 <옛길박물관> 입구의 오른쪽 길목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간과(看過)한다.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문경현감 신길원 충렬비 ♣ [에필로그] — 험난하지만 멋지고 감동적인 산행 오후 5시, 모든 대원들이 문경새재 주차장에 하산을 완료했다. 오늘의 문경새재 안쪽의 중심을 이루면서 백두대간의 장엄한 산세를 조망할 수 있는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부봉>의 연봉을 산행했다. <부봉(釜峰)>의 6개 봉우리는 916~933m의 암봉이다. 가파르고 아기자기한 암벽과 우람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절경이다. 오늘 우리가 오른 상봉(제6봉)의 정상에 서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백두대간 능선과 문경새재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계곡[鳥嶺溪]을 따라 내려오는 <새재 길>은 동쪽의 주흘산 연봉과 서쪽의 조령산 연봉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이다. 부봉은 동쪽의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조령계곡으로 치고 들어와 솟은 거대한 암봉으로, 그 위치가 새재의 깊은 곳에서 떨치고 솟아있다. 새재 주변의 산을 거대한 꽃잎이라면 부봉을 그 꽃술[花芯]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부봉은 문경새재 전체 계곡의 한 가운데 솟아있는 고고한 암봉이다. 암봉을 오르내리는 산길이 험난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산행을 했다. 모든 대원이 무사하게 산행을 마치고, 점촌에 있는 <영강 송어횟집>을 찾아 뒤풀이를 겸하여 저녁식사를 했다. 싱싱한 송어회를 곁들여 맑은 이슬로 오늘 산행의 피로를 풀었다. 오늘의 별식 송어회는 강완식 산우가 특별히 자리를 마련했다. 강 대원은 우리 산악회 김준섭 회장의 지기지우이다. 우리 대원들을 생각하는 그 정성이 남다르다. 힘든 산행을 마친 대원들이 고단한 피로를 풀고 함께 어울려 따뜻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그 마음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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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고문님 ^^^
밖에는 장마비가 내리고있네요
오랫만에 비가 내리고있어요
항상 좋은글 아름다운 사진
너무 너무 감동깊게 읽고 보고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