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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3-6)
우리는 뻣속까지 죄로 가득한 채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부를 이름도, 찾을 이름도 없을 만큼 소망을 잃은 우리가 겪어야 했을 멸시와 질고, 슬픔, 징벌, 고난, 허물, 상함을 전부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음을 듣고, 우리의 짐을 지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공유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요일4:19).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를 인도했습니다. 살아 오는 동안 숱하게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고 주님을 외면하고 고집부리며,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분을 떠났던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와 운명 때문에 아파하며 신음하고 눈물짓는 우리를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영혼의 작은 신음소리가 주님의 귀에는 천둥소리같이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고, 살려 내기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결정과 선택이 오늘의 우리가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 또한 주님과 동일하게 반응하길 바라시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해다오. 이것이 내가 너를 창조한 목적이다."
기독교 교리를 모아 정리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 "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무슨 재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벌어서? 크게 성공해서?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공유하고 공동운명이 되어, 그분의 사랑에 영원토록 감격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다른 것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엄마만 있으면 됩니다. 엄마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하나면 충분하고, 예수님이면 충분하고,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과 의지를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말입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하니까 말입니다.
♣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저는 20대 초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술집 아들로 태어난 저는 모태 신앙은커녕 교회 문턱도 못 밟아 보고, 예수의 '예'자도 못 들어 본 채 살았습니다. 인생의 벽에 부딪혀 절망하여 중증의 자학 증세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고 훈련받은 적도 없고 교회의 '교'자도 몰랐던 저였지만, 주님을 만난 후 "주님, 이제부터 '무소유'로 살겠습니다. 글자 그대로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자살할 이유가 충분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고통의 이유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저를 절망하게 하고 죽고 싶게 하던 '망해 버린 술집 아들, 별 볼일 없는 집안, 학벌도 없는 구제불능의 성격 파탄자'라는 수식어와 숱한 아픔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만 옆에 계시면, 주님만 함께해 주시면, 저는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초신자 때부터 서원한 대로, 지금까지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무소유란 '하나도 안 갖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이 전부 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내 것을 갖는다고 하면 딱 그것만 갖고 마는 것이지요. 더 가지려고 그만큼 더 애쓰고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무소유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면, '제 건 따로 없지만 주님의 것이 전부 제 겁니다'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는 겁니다.
웬만해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하지 못합니다. 죽을 만큼, 미칠 정도로 좋아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섯 아이를 전부 선교사로 길러 냈고, 전 세계 50-6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저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낯선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왜 자꾸 찾아와서 귀찮게 하느냐며 오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계속 찾아갑니다. 제가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걸까요?
죽을 만큼, 미칠 정도로 주님이 좋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상황에 처하든 엄청난 성공이 한복판에 서 있든 상관없이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무엇과도 주님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꽉 붙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놓쳐 버린 어린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입니다.
예전에 저는 딸아이와 관계가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때 일은 이렇게 자주 강의나 설교 소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잘 모를 겁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저는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화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 얼굴의 15도 위 또는 아래를 보는 겁니다. 한참 얘기하다 답답해진 제가 한마디 합니다. "아빠 얼굴 보면서 얘기해라." 그러면 조폭도 아니면서 짧고 굵게 "네"라고 답합니다. 문제는 그러고도 계속 딴 데를 본다는 겁니다.
딸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솔직히 지금도 궁금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찬송입니다. 찬송이. 정말 좋은 이름이죠?
전도자 가문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아, 벗어날 수 없는 선교사의 운명을 살아야 했던 찬송이가 해외에서 훈련받고 있었을 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찬송이와 함께 있는 사람이 걸어온 전화였습니다. 찬송이는 웬만한 것으로는 원체 부모에게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라 해외에 나가서도 전화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집 떠나 산다는 게, 그것도 낯선 타국에서 산다는 게 모진 고생일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때도 힘든 일이 있는데 집에도 말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나 봅니다. 결국 같이 있는 사람이 다급히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찬송이 아버님, 걱정 끼쳐드리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 ... "
그런데 그 사람도 막상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찬송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괜찮습니다. 어서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 주님이 계신데 뭘 걱정하겠습니까? 어서 말해 보세요."
"지금 찬송이가 많이 아파서 며칠째 누워 있어요. 찬송이가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집에도 연락 못 드렸어요. 의식을 잃었다가 이제 회복되었는데, 의사 말로는 심각한 탈진 상태라고 해요. 아무래도 아셔야 할 것 같아 전화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찬송이는 지금 어디 있나요?"
"옆에 있어요. 안 그래도 아빠 목소리 듣고 싶다고 바꿔 달라네요."
이윽고 기운이 하나도 없는 듯한 딸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습니다. 어찌나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말했던지,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야만 했습니다. 찬송이는 남은 힘을 쥐어짜 희미한 목소리로 "사랑해요, 아빠.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혹시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아빠에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냅다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니, 아파서 한 달 동안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병의 원인을 찾지도 못한 상태에서 탈수 현상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도저히 그 아이를 그것에 홀로 둘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송이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도 더는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부모가 나서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주님이 우리를 책임지실 것을 신뢰합니다. 선교 사역을 하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도 비일비재하게 겪습니다. 원래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이런 고통과 슬픔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딸아이의 문제 앞에서만큼은 덤덤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 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나 봅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는 비밀로 하고서 곧장 그곳으로 출발했습니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출발하는 비행기 중에는 직항 노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딸아이의 몸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단 1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독일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다음,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글로벌 특급 수송 작전을 방불케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겨우 딸아이를 찾아가서 보니, 전화 연락을 받았을 때보다 더 상태가 나빠져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물만 조금 들어가도 바로 토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검사를 해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 의사들에게까지 조언을 구해 봤으나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기껏 나온 대안이라는 것이 '외국 의사들은 한국인의 체질을 잘 모를 수도 있으니, 일단 환자를 독일까지 데려와라' 하는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그 상태로 그냥 둘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현지 병원에서는 치료할 길이 없으니 주변 사람들까지 한국행을 주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 생각에도 일단 한국에 가면 무슨 수든 생길 것 같았습니다. 이제 다 커서 어른이 된 딸이었지만, 엄마가 그리워서 아픈 것 같기도 했고 엄마가 해주는 된장국 한 사발을 들이키면 나을 것도 같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엄마 밝힘증' 환자인 아이었으니까요. 엄마가 해주는 한국 음식을 먹으면 그래도 조금 차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공사에서 중환자인 딸을 비행기에 태워 주려 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탈진한 채로 2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려면 링거로 수분을 계속 공급해 주어야 하는데, 항공사 측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한 설비를 갖춘 상태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동행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만일의 사태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기로 하고, 딸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연락하여, 공항에 구급차를 대기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떠나기로 한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아무런 기력도 남지 않은 채로 긴 시간을 버텨야 할 딸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네 옆에 있을게. 뛰어난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무뚝뚝한 아빠이지만, 지금 너와 함께 있을 수는 있어. 다른 것은 전부 포기하고 취소한 채 오직 네 옆에 있어 줄게.' 제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 그 아이를 사랑하는 제 진심을 보여 줄 유일한 길은 바로 그저 곁에 같이 있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곁에 있어 주는 것 말고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같이 있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제 딸의 몸 상태에까지 도움이 되진 못하니까요. 제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내린 선택이었지만, 그것으로는 딸의 병을 낫게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때 저는 사람의 최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력한 것인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말은 '동행'이라고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참 아쉽고 부족하고 안타까운 동행이었던 겁니다.
아침이 되어 퇴원 수속을 하려는데, 의사가 당장 링거를 빼라고 했습니다. 장시간을 비행해야 하는 환자한테 너무한다 싶어서 공항까지만 달고 가게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링거를 빼지 않으면 퇴원을 시킬 수 없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어찌나 정이 없게 굴었는지, 이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저희 부녀는 위험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 행복하고 안전한 주님과의 동행
그날 새벽에 제가 묵상을 하면서 적은 글을 나중에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빠하고 손잡고 가는 길, 행복하지만 위험한 여행.
아빠인 제가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행복은 마음의 위안 정도입니다. 현실의 위험까지 막아 줄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그래서 아빠인 저와 손잡고 가는 길은 '행복하지만 위험한 여행'입니다.
그런데 제가 적은 글은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밑에 이렇게 적은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 행복하고 안전한 여행.
우리 둘만의 여행이 아니었음을 확신했기에, 저는 딸아이의 팔에서 링거를 뽑은 채 먼 길을 떠날 수 있던 겁니다. 한국으로 오는 동안 줄곧 저의 딸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찬송이의 손을 제대로 붙잡아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저도 할 말은 많습니다. 제가 특별히 못된 성격을 가졌다거나 나쁜 아빠여서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제가 손을 잡으려 해도 그 아이가 매번 손을 빼 버려서 그랬을 뿐입니다.
찬송이와의 여행을 통해서 저는 사람의 최선으로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일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늘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배우자도 때가 되면 제 곁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효자, 효녀라 해도 부모의 죽음에까지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혼자 맞이해야 하는 죽음의 순간까지 같이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동행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반드시 만나야 할 동행은 따로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결코 놓칠 수 없는 단 하나, 행복하고도 안전한 동행 말입니다. 그 동행은 오직 하나님만이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부터 우리를 홀로 두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복음, 곧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동행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사람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회복은 임마누엘이신 주님과의 동행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은 임마누엘의 약속을 성취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우리와 함께 죽으셨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에 우리를 참여시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비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바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그래서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고, 예수 이름만 있으면 온 인류가 구원받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나 자신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복음을 누구에게 전하겠다는 말입니까? 나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을 누구한테 전한다는 말입니까? 나도 믿지 못하는 복음을 감히 누구한테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복음은 복을 받으려고 외우는 주문 따위가 아닙니다. 마음 수련이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 제도 나부랭이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면 누구나 뒤집어집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축이 바뀌는 기적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주님 때문에 훌러덩 뒤집어지고 인생의 축이 바뀌는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도 부어지길 소망합니다.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도 아십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 주님은 열두 명의 제자 형님들을 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 이름도 다 외우기 힘든 열두 명의 제자 형님들은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말씀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생전 들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생선 비린내에 찌든 어부이자 무식하고 천한 신분의 제자 형님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제자 형님들은 그야말로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이 십자가라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거나 믿을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거라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바로 그 말씀 앞에서 제자 형님들의 실존이 그대로 다 드러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형님의 진심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습니다. 다들 잘 알고 있듯, 베드로 형님은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붙잡혀 심문 당하시는 곳에도 찾아갔습니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자리에까지 따라갔던 것입니다. 베드로 형님은 정말 주님을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역시 연약하고 불신할 수밖에 없는 육신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신도 예수랑 같은 패거리죠?"라는 계집종의 말에 겁을 먹은 베드로 형님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고 맙니다. 이후로 계속 베드로 형님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아파하며 괴로워 했을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를 정도로 사랑한 주님을 배신했다는 사실, 그분이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실 때에 그분을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며 저주까지 퍼부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소식이 들려옵니까? 자신이 배신했던 주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베드로 형님의 성격상 기뻐서 난리를 쳐야 맞지만, 그 얘기를 듣는 것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게 부담스럽고 불편했습니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베드로 형님은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3년 동안에도 주님의 훌륭한 능력 때문에 그분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는데, 죽음까지 이겨 내고 부활하신 진짜 하나님을 어찌 쉽게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무식한 어부인 것도 모자라 배신까지 한 자신이 어찌 다시 그분의 제자가 되어 같이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습니까. 얄궂게도,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은 베드로 형님에게 참담한 실패감만 안겨주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확실히 알게 되자, 베드로 형님은 결국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게들. 나는 다시 예전처럼 고기나 잡으려 하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난 어부 아닌가? 3년 전에 주님은 내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지.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씀에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그분을 따라다녔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설친 것 같아. 고기나 잡으면서 살아야 족한 놈이지. 내가 무슨 사도이며 주의 종이 될 수 있겠는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네. 잘들 있게. 나는 이만 고기나 잡으며 살겠네."
베드로 형님이 그렇게 말하며 비통한 심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니, 전부터 몰려다니기 좋아하던 다른 제자 형님 여섯이 졸졸 따라 나섰습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긴 했는데. 3년 전에 다 때려치웠기 때문에 고기 잡을 장비가 없었을 테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배와 그물을 겨우 빌려 고기 잡으러 나섰는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3년을 쉬었다고는 하지만 어업으로 잔뼈가 굵었던 이들인데 밤새 그물질해도 피라미 한 마리 잡질 못하니 얼마나 낙심되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러는 사이, 디베랴 바닷가에는 동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갈보리 언덕과 디베랴 바닷가의 아침을 경험한 성도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갈보리 언덕을 경험하면, 더는 따르지 못하겠다며 도망친 배신자를 주님이 찾아오시는 디베랴 바닷가를 경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은혜에 붙들려 살게 된다는 뜻일 겁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나 같은 건 틀렸어'라며 절망에 빠진 자포자기 인생, 배신하고서 그대로 도망쳐 버린 인생 낙오자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밤새 헛탕 쳐서 지치고 굶주린 채로 몸이 쫄딱 젖어 고개를 푹 숙이고 찌그러져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닷가에 손수 모닥불을 지펴 떡과 고기를 준비해 먹여 주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21:15-17)
식사 후에 주님이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을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시몬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붙여 주신 별명으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어째서 뜬금없이 베드로의 본명을 부르셨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그를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고 부르셨다면, 그는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쳐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의 마음을 헤아리셨기 때문에 본명을 부르신 게 아닐까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말에 베드로는 죽고 싶은 심정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도 아십니다."
세상에 이런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면 '사랑한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해야지요.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다시 한 번 베드로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데다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으니가요. 사실 이 정도 되면 게임이 끝난 거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의 마음 한구석에는 '하지만 나는 주님을 아직도 많이 사랑해. 주님을 마주 대할 낯짝은 없지만, 그렇다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면목은 없지만, 그렇다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습니다. 즉,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도 아십니다"라는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주님, 저는 더 이상 주님을 따를 수 없는 놈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곳으로 돌아온 겁니다. 떠난 지 3년이나 흘렀지만 고향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물론 바람도, 바다도 여전하더군요. 사실 저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반 푼어치도 안 되는 모자란 인생인 것도 변함없고, 입만 살아서 떠들어 대는 못 믿을 놈이라는 것도 변함없었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달라진 게 있었습니다. 3년 전과 비교하면, 그것만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밖에 모르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능력이나 배짱이 없지만, 그렇다고 주님을 떠날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부 망가지고 잃어버려도 예수님만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3년 동안 베드로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짓이 있어서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도 아십니다."
그런 마음을 알아들었는지, 주님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오냐, 좋다. 지금은 일단 놔두지만 나중에 보겠다. 날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앞으로 지켜볼 테니 잘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팽개치고 온 사도의 직분을 다시 맡기실 뿐입니다. "내 어린 양을 네게 부탁한다."
주님은 왜 더는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신 걸까요? 베드로가 바로 주님이 듣고 싶어 하신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반응을 원하셨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부정과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갈망과 안타까움. 주님은 3년 동안 바로 이 일을 제자 형님들 안에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인간 베드로는 변한 게 전혀 없었습니다.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과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3년 동안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 내면의 터를 닦으셨습니다. 그렇게 닦아 놓으신 터 위에 성령이 부어지니까, 이들을 통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던 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처참하고 비통한 절망의 현장인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질문을 주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던지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대답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주님은 여러분 안에도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여러분에게 주님의 비밀을 보여 주시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내면의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행복한 고백을 받아 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