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文情)의 나눔과 추파(秋波)
황진이가 문혼(文魂)이 크게 열리자 양반자제랍시고 자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도포자락에 먹물이나 흘리는 어중이떠중들이 귀찮아졌다. 그들을 떨쳐버릴 결심을 하고 세상을 뒤 흔들 만한 음모를 꾸몄는데, 당대에 자신과 문심을 나눌 만한 이는 지족선사와 서경덕뿐이라 여기고 두 사람의 영적 수준을 시험하는 추파를 던진 사건이다. 지족선사의 영혼은 육탈을 하지 못한 수준이었고 서경덕의 문심은 세속을 초월하여 그녀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올라 있었다. 황진이는 평생을 화담을 존경했고 그와 문정을 나누고자 했으나 화담이 답을 하지 않으니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더 이상 세상의 남자들과 문장을 희롱하지 않았다.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이 광안리 해변을 함께 거닐었던 적이 있다고 하였다. 쇼킹한 광경이지만 사람들은 그걸 문정(文情)의 나눔으로 여긴다. 쉰의 중반을 넘긴 내가 마흔의 중반 쯤 되는 여성문우에게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서 차 한 잔 하자고 제안을 했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그건 추파(秋波)라고 여길 것이다. 남녀 문인 사이의 문정(文情)의 나눔과 추파(秋波)의 경계가 어디 쯤이던가?. 둘 다 은근함이 그 바탕이지만 어느 한쪽이 속기를 느끼면 추파가 되는 것인데 문심에 속기가 없는 경지라 함은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그 속에 참이 가득한 경지가 아닐까 한다.
수필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댄지 어언 6년이 되나 내 아직 마음 속에서 속기를 다 떨쳐버리지 못하였으니 문학행사에서 여성문우들과 어울린 날이면 그분들이 내게서 속기를 느낄까봐 지레 겁이 나고, 문학에 심취할수록 내 일거수일투족이 괜한 추파로 보여질까봐 두려워서 법정스님처럼 아예 멀찌감치 산 속으로 피하고 싶지만, 먹고 사는 일에 손을 놓지 못하는 중생인지라 가끔씩 자질미달의 세도가를 만나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하거나, 수준미달의 고객을 만나 입이 아프도록 그를 달래고 나면 퇴근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 되니, 마음이 울적하여 술도 먹고 싶고, 맑은 마음을 지닌 누구에겐가 전화라도 하고 싶다가도 그런 전화가 또 다른 추파로 보여질까봐 혼자 우울해 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헌 지게 내다 버리듯 현실을 벗어 버리고 훨훨 깃을 치는 청산으로 들어 가버리면 내 한 몸은 편안할 지 모르지만,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고서 저 혼자 자유롭다함도 옳은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지라, 그래서 때로는 세상을 확 바꾸고 싶은 마음이, 그런 가당치도 않는 마음이 불쑥 불쑥 일어나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는데, 이런 외로움도 문학의 길을 가려는 자라면 스스로 이겨내야 할 하나의 공부일 뿐인 것이다.
내가 문학을 사랑함은 문장 속에 담긴 문기와 문심과 문정이 좋아서이고, 내가 문인들과 어울리려 함은 대자유하고 청량한 문혼(文魂)들을 만날 수 있을까하는 것이지 사마상여와 같이 한치 붓 끝으로 여인의 마음이나 희롱하며 부귀영달을 꾀하려 함이 결코 아니다. 문학기행을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따라 가기로 결정한 것도 놀러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요, 예쁜 여선생들로 부터 인기를 얻고자 함도 아니요, 다만 속기를 벗어 던지고자 하는 내 이런 마음을 문인이라면 동변상련으로 느낄 누군가가 있을 듯 하여 늦게 사 "참석"이란 결심을 하는 것인데, 남녀 사이거나 남남사이거나 속기를 완전히 떨쳐 버리고 오롯이 문정만 나눌 수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경허가 여인을 가까이 한 것은 고름투성이의 생명을 불상히 여긴 불심 때문인데도, 불심을 모르는 후세의 잡인들이 경허의 기행만 흉내 내며 도를 깨친 양하니 중도 속도 아니란 말이 나오는 것인데 요즈음 내 마음이 문학도 아니요 놀이도 아니니 정말 중도 속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법도를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이긋남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끝없이 자신을 낮추면서도 홀로 있을 때는 허리를 곧게 펴는 그런 문장이라야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며 구름 속을 넘나들듯이 오색찬란한 문심을 주고 받을 수가 있지 않을까.
사람의 향기는 문장에서 나고, 아름다운 향기는 멀리 있을수록 더 그리워진다.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또 다른 추파인데, 이 추파에 홀려올 문심이 있을지 모르겠다.(2012. 4. 26)
첫댓글 지금부터 12년전에 쓴 작품인데 세월이 그만큼 흘렀건만 그 배경이나
내용에는 변한 게 하나 없으니 사람의 인생살이라는 게 아니 그 깊은 속 심사라는 게,
아니지 사람 인품이란 게 참 변해나가기 어렵나 보다는 생각이 절절합니다.
그 마음 그 정신 그 사랑으로 고ㅡ고 하십시요. 대성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