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과 人生
(글:박만엽/Narrator:이의선 성우)
나는 "바둑은 人生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은
어느 유명한 야구 감독이 "야구는 人生이다."라고
表現한 것과 마찬가지로, 뭇 사람들이 自己가
어느 정도 심취된 취미 생활을 곧잘 人生에
비유하지만, 내가 바둑을 人生에 비유하는 데는
남다른 理由가 있다. 여기에서 無限한 人生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둑은 人生이다.“
라는 표현보다도 "바둑은 人生의 거울 또는
人生의 스승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바둑에서 겸손을 배울 수 있다.
인생살이에서는 뭇 사람들이 實力이 없어도
있는 척, 경제력이 없어도 있는 척, 배경(背景)
및 환경(環境)이 좋지 못해도 좋은 척하여, 이런
것들을 出世의 도구로 삼거나 自己의 약점(弱點)을
보완하는 구실로 삼지만, 바둑에서는 實力이 있는
者가 실력 없는 척할 수 있어도, 實力이 없는 者가
실력 있는 척할 수 없다. 따라서 바둑에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는 있을 수 있는지 몰라도 과장과
허영이라는 단어가 있을 수 없다.
둘째, 바둑에서는 어떤 단계를 무시하거나 건너뛰는
것이 없어, 정당하고 공평한 과정을 배울 수 있다.
인생살이에서는 뭇 사람들이 자기가 유리한 대로
어떤 절차나 과정을 삭제하거나, 반대로 중복시켜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 비난을 사는 일이 있지만,
바둑에서는 상대방과 자기가 오직 한 수씩 두면서
착점의 능률을 기대하는 것이므로 공평한 과정과
절차를 배울 수가 있다.
셋째, 바둑에서는 표리부동한 일들이 있을 수가 없다.
인생살이에서는 뭇 사람들이 특정한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삼아 진실을 왜곡하여 흑백의 논리를
뒤바꾸어 놓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동료,
선후배는 물론 자기가 모시는 웃어른들까지 배반하는
일이 있으나, 바둑에서는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이지,
흑이 백으로 배반할 수 없고 백이 흑으로 변절할 수도
없다. 오직 변할 수 있다면 흑백 간에 군주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죽어서 돌이 되어 상대방에게 인도될
따름이다. 따라서 바둑에서는 신의와 절개라는 단어는
있을지 몰라도 변절과 배반이라는 단어는 있을 수가 없다.
넷째, 바둑에서는 언쟁이나 변명이 필요 없다.
인생살이에서는 뭇 사람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지 못하고 교묘한 언행으로 상대방을 유혹하거나
이간질하게 하는데, 바둑은 수담(手談)이므로 격조 높은
언쟁이나 구차한 변명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바둑에서는 꾸준한 행동에 의한 조용한 결과만 있을 따름이다.
다섯째, 바둑에서는 신중함과 정도(正道)를 배울 수 있다.
인생살이에서는 뭇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하여
속된 표현으로 잔꾀를 부린다거나 중요한 사항을 성급하게
결정하는 수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나, 바둑에서는 자기가
정도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죽음 밖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신중한 수읽기가 요구되며, 이에 따른
정확한 판단력과 정도를 배울 수 있다.
끝으로 바둑에서는 욕심이라는 단어는 없다.
인생살이에서는 뭇 사람들이 부정축재를 하거나
정당하지 못한 재물을 분에 넘치게 자기 수중으로
챙기지만, 결국 죽어서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서로들
무슨 욕심에 무엇이 두려워 자꾸만 재물을 탐내는지
모르겠으나, 바둑에서는 말 없는 결과만 나타날 뿐
반집을 이기나 수십 집을 이기거나 마찬가지이므로,
탐욕이나 사리사욕(私利私慾)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열거한 것들은 신선(神仙)들이
두는 바둑 세계에서나 행하여지는 것인지 모른다. 정말,
우리 속세(俗世)의 인생살이 바둑에서는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하여 괜히 쓸데없는 곳에 자기의 돌을
몇 개 던져 보기도 하고, 후일(後日)을 도모하기 위하여
안전 위주로 실리(實利)를 탐하기도 하며, 또한 자기의
요석(要石)으로 세력을 쌓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주문에 따라 자기의
돌을 속절없이 버리기도 하며, 그 주문을 역행하여
상대방의 의표(意表)를 찌르기도 한다. 심지어 자기가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는 연극을 하여 아주
바보인 양 자기의 돌을 아예 무작정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속세의 바둑에 심취하다가 보면, 바둑이란 실로
'복잡한 인생살이의 축소판'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묘한
느낌이야말로 더욱더 내가 바둑을 사랑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미주 중앙일보 2008년 4월 4일 A-15면 (오피니언) 란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