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에 대하여~
“불후(不朽, incorruptibility)란 사람의 육신이 죽어서 저절로 보존되는 것으로, 천주교 및 정교회에서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불후체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아닌 꽃향기 비슷한 달콤한 성스러운 향이 나는데 이게 신의 개입에 의한 성스러움의 징표라고 교회에서는 주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시체에서 향기가 나는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생명이 사라진 시체에서 성스러운 향기가 난다고 시체와 같이 잠을 잘 사람은 세상에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따르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불교의 사리 같은 것도 매 한가지 입니다. 사리나 시신에서 향기가 난다고 해서 그 향기 자체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죽은이가 살아있을 때에 행한 행적이 남다른 향기를 지니고 또 그 향기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고양될 때 그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적과 기적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비상식적인 이적과 기적으로 인해, 인간의 영성이 더욱 거룩하여 질 때, 이적과 기적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사이비들은 이적과 기적을 보여주며,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추수해가 버립니다. 이적과 기적을 따르면 추수꾼들에게 농락될 확률이 99.999% 입니다. 시신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는 게 정상이고 향기가 나지 않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생명은 존재 그 자체가 위대하고 존재 그 자체가 기적이고 존재 그 자체가 찬양입니다. 죽은 시체가 살아 있는 삶을 찬양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생명만이 생명을 찬양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살아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래서 “죽은 자로 하여금 저희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희들(=산자들)은 나를 따르라!” 고 합니다. 예수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라는 뜻이 아니고 “내 가르침이 살길이니 나를 따르라!”는 소리 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예수의 가르침은 따를 생각을 아니하고 꽁무니만 쫄쫄 따라다닙니다. 나를 좋아 한다면서 내 꽁무니만 쫄쫄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하찮은 인간인 나도 그런 인간들이 아름답게 보이질 않는데, 하물며 신의 경지에 오른 지혜의 문이 활짝 열린, 인간의 일과 하늘의 일에 완전한 성찰에 이른 분이 그걸 좋아할 리가 있겠는지요? 그래서 “ 저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바른 소리를 문자로 담아내면 책이 됩니다. 인간 내면의 향기는 문자를 통해 책 속에 담깁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나 예수 보다 더 이전의 석가를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남긴 행적에 대한 문장(경전에 기록된)으로 만납니다. 수 천년을 뛰어 넘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분들이 남긴 문장에 담긴 정신력과 성찰의 힘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란 말을 많이들 씁니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씁니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물질체로서의 살아 있음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 불후의 문장으로 영원히 살아서, 경전을 읽으면 지금도 우리 곁에서 가르침을 주시는 듯, 시대를 초월하여 당파를 초월하여,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울림을 지금도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후란 접두사는 늘 문장이라는 단어 앞에 붙어서 불후의 문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학이나 경전은 은유와 상징을 모르면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종교가 교조화 (도그마/교리에 함몰) 되는 이유도 은유와 상징을 모르는 탓입니다. 이 글도 들을 귀가 있는 분들만 들으세요.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들 귀가 있고 소리는 들리지만, 전하는 뜻과 의미는 전혀 들리지 않으니 (=이해하지 못하니),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은유이지요~^^(2020.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