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경인 김종환 선생께서 필자의 글에 댓글로 신자(信者)와 환자(患者)와 인간(人間)의 의미를 한번 정리 해주었으면 좋겠다하셔서 수필형식으로 쓴 문학적인 글이다. 독자님들의 신앙과는 다른 견해일 수도 있으니 신앙적 토론은 사양한다. (2020.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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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信者)와 환자(患者)와 인간(人間)의 의미
필자는 20대 청년의 때에 신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신이 있다면 확실히 보여달라고 신에게 매달린 적이 있다. 그래서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내 마음 속의 의혹이 지워지길 정말 간절히 소망했다. 이런 나의 결기는 고등학생시절에 많은 전도자들이 내가 자취하는 집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한 경험사례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들은 청소년인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땀 흘려 일하지도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도 않고 에덴동산에서 영생하게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고 죄(원죄)를 지어 죽게 되었다. 그런 인간을 죽음에서 구하려고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다. 난 전도자들의 이야기가 납득이 되지 않아 물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되었을 터인데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의 속을 떠 본 이유는 뭔가? 내가 그런 질문들을 던지면 전도자들의 답은 “하나님만이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안다”는 거기서 전도자들의 이성은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고 멈춰버리는 것이었다.(이에 대한 답으로 신학에서 예정조화설과 자유의지론이 등장한다)
한 낱 고등학생에 불과한 나는 또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의 말씀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 치자 그래서 모든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들이 죽지를 않는다면 이 세상은 사람으로 터져나갈 것이 아닌가? 지금도 지구가 만원인데 그러면 이 지구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답을 하지 못했다. 기껏 저 먼 우주의 별 하나를 지구처럼 만들어서 그리로 옮겨 갈 수도 있다고 하였다.(답하는 자의 자기 상상이었다. 신천지는 144,000명만 구원한다고 하는 모양). 나는 또 그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의 말처럼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은 아무리 선한 사람일지라도 지옥으로 간다고 하면 예수를 모르고 죽은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그 이전의 사람들은 지금 전부 지옥에 들어가 있지 않겠느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예수를 모르고 죽었으니 지옥에 있겠네? 그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다. 대답할 길이 막힌 그들은 다음에는 목사님을 모셔 오겠다하더니 소식이 없었다.(이성적인 물음에 이성적인 답변을 못했다는 의미)
청년의 때에 군대에 입대하기에 이르러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 군인교회를 나갔는데(당시는 점호시간이 온통 기합시간이라 점호 빼먹을 심산으로/인간은 이렇게 실존주의적인 것이 정상이다) 천당을 다녀왔다는 목사님을 만나 “자네에게는 사명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당시 내가 아는 사명이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밖에 아는 게 없었는데 사명이란 단어 하나가 나의 뇌리에 깊숙이 박히게 된다. 군 제대 후 직장도 없고 장래가 암담한 지경을 당하고 보니 영적 에너지가 약해져서 그 “사명”이라는 단어가 다시 떠올라 내 발로 교회를 찾았는데 말 그대로 당시 교회는 추수할 일꾼이 왔다며 대 환영이었다. 그들이 나를 환영하거나 말거나 나는 나대로의 속셈이 있었으니 내가 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떠난다는 결심이 있었다. 나는 신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당시 경제성장시대와 더불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교회의 이면을 보고 이대로 청춘을 흘려보내다간 폐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스스로 종교에 발을 끊고 생업에 매진하는 길로 돌아 온 것이다. 물론 성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곁에 두고 틈나면 읽는다. 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한 예수의 성찰과 그의 가르침이 복음서에 적혀 있는데 인간내면세계의 오류와 그런 오류를 지닌 인간들이 만든 외형적인 세상(인간사회)의 오류와 모순에 대해 예수보다 더 직선적이고 솔직한 지적을 한 성찰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때문이다. (필자의 인식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물론 수박 겉핥기였지만 궁금하여 신학도, 종교사(사이비 종교사까지)도 공부했고, 인간의 정신사인 세계문화사도 고교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다시 회상해 가며 공부했다. 먹고사는 일을 위해 돈벌이도 열심히 했다. (문학을 이해하고 나의 그런 각성을 글로 쓴 게 <거듭남 2> 인데 수필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쉰이 넘어 우연한 기회에 문학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독서를 통해 알고 있던 보잘 것 없는 지식이었지만, 문학을 통해 은유와 상징을 이해하고 나니 경전이 쉽게 이해(나의 새로운 각성/ <거듭남 3>을 씀) 가 되었고 이데올로기, 종교적 신념 이런 것들과 인간의 이성과 감성에 대해서 이해가 되었고 고교시절에 불후의 명작이라며 읽었던 소설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알게 되었다. 문학이 정신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변잡사의 식상한 이야기들보다는 인간 정신세계에 대한 글들을 틈틈이 썼다.
아득한 10대 후반 부터 그 오랜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나는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신에 대한 실체는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내재한 밝은 이성(참 나를 만나는 일=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는 일=대오각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성경이나 불경이나 모든 경전은 깨우침, 거듭남, 길, 생명, 빛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내가 많은 다른 독서들을 통해서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내 삶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사상사적으로 표현한다면 나는 실존주의자이길 원한다.
그 이유는 내가 한 개의 유한한 생명인 때문이다. 생명이기에 나는 살아있는 동안 생명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할 뿐 절대로 신이 되길 원치 않는다. 그리고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또 그가 생명을 창조했다면 생명이 더욱 번성하고 잘되도록 하는 게 신의 마땅한 책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사랑이자, 자비이고, 인이라고 확신한다. 이걸 떠나서 또 다른 영생과 부활과 휴거가 있다고 떠드는 순간 나는 인간의 기본 의무조차도 망각하고 마는 사이비가 되고 만다는 생각을 한다. (사이비의 속성은 신의 사자인 자기가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주장하고 떠드는 일에 쾌락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신도들에게 종교조직의 감투를 씌우고 헌금과 새로운 신도 모집을 강요한다. 그때가 되면 빼도 박도 못하는 몰 이성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이 땅에 존재하는 생명은 “생자필멸”의 법칙을 따른다. 그게 창조의 법칙이든 자연의 법칙이든 상관이 없다. 그걸 부인하고 또 다른 영생과 부활을 꿈꾸는 순간 인간의 영혼은 욕망의 화신(그게 우상이다.)으로 변하고 자유성을 상실하고 사악한 영혼의 포로(노예. 종)가 되고 만다.(깊이 사유하는 자에게 부활은 삶을 살아내면서 스스로가 풀어가야 할 거대한 화두다)
인간의 영혼은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지닌 양면적 동물이지만 감성에 아주 많이 치우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슬픔과 기쁨과 분노의 감정에 쉽게 사로잡히는 동물이다). 그 점을 이용해서 문장이나 음악 그리고 춤으로 인간의 감성을 뒤 흔들어서 때론 눈물 짓게 하고 때론 웃고 떠들게 만들고 때론 탄식과 후회에 빠지게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을 깨우침의 영역으로(잠든 이성이 빛을 발하도록) 이끄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사이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걸 못한다. 자기가 몽매 중에 있으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되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복음 서를 읽어보면 이를 예수께서 지적하고 이미 다 밝혀 놓았음을 알수가 있다)
문학성이 뭔지를 몰라서 문학성을 궁구할 때 나의 멘터에게 물었다. 독자들에게 눈물이 팍 쏟아지게 쓰면 문학성이 있는 것인가요? 나의 멘터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인간의 감성을 흔드는 일만이 문학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눈을 뜨게 하는 글이 문학성이 있는 글인가요? 그것도 답하기 어렵다. 가르치는 글(철학서)이 되는 때문이다. 미몽의 세계에 잠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찬란한 빛의 세계로 아무런 거부반응 없게 이끌어 오는 가능한 방법과 수단을 찾아내는 그게 바로 문학성인 것이다.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면서 신을 믿으라고 하면 휘발유처럼 불을 확 당 길 수는 있지만 사이비가 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고 말라 빠진 교리만 암송하는 것(교조주의)도 인간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베어링이 나오기 전에는 수레의 축과 바퀴의 틈을 적절히 하는 간격을 맞추는 일은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꽉 조이면 수레가 구르지 않고 헐렁하면 수레가 털컹거리니 그 알맞음은 오랜 경험과 기술이 탁월한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신본주의자가 아니고 인본주의자며 허황한 것을 쫓지 않는, '생명을 지녔기에 언젠가는 필히 소멸될 것임을 믿는 인간임'을 이렇게 이 글로 '선언하는 것이다.
첫댓글 새벽 3시 51분 이 시각에 누군가가 깨어서 내 글을 읽어 주었다. 그는 왜 잠 못들고 일어나 앉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