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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국가대표 팀의 수장을 뽑는 것에 대해 여러 말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오늘 나온 기사를 보면 다시 감독 선임을 일주일 뒤로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는데요, 협회의 감독 선임 작업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간 협회에서 계속해서 흘렸던 말들을 종합해 보면 일순위가 허정무 감독의 연임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다음의 차선책이 정해성 코치의 감독 승격이었던 것 같구요.
헌데 두 분이 모두 고사했지요.
따라서 협회의 입장에서도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버렸습니다.
일찌감치 허정무 감독 이후의 감독 선임에 대해 국내 감독으로 가겠다고 공언했던 축협의 입장에서 외국인 감독을 알아보기는 어려울 듯 하구요.
그렇다면 현재 국내의 전, 현직 지도자들 가운데 축구 철학과 전술 능력 그리고 인맥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어린 대표 선수들과 어울릴 수 있는 50대 초반의 감독이 선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기까지야 조금만 축구에 관심 있는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일 텐데요, 아래 내용은 90년대 이후 협회의 국내 감독 선임 과정을 통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역대 A대표팀 감독 명단 연 도 감 독 2007.12. 7~2010. 6.30 허정무 2006. 7. 1~2007. 8. 3 핌 베어벡 2005.10. 1~2006. 6.30 딕 아드보카트 2004. 6.24~2005. 8.23 요하네스 본프레레 2004. 4.20~2004. 6.15 박성화(대행) 2003. 2. 3~2004. 4.19 움베르토 코엘류 2002.11.18~2002.11.20 김호곤(대행) 2001. 1. 1~2002. 6.30 거스 히딩크 1998.10.14~2000.11.13 허정무 1998. 6.22~1998. 6.25 김평석(대행) 1997. 1. 8~1998. 6.21 차범근 1996. 2.15~1997. 1. 7 박종환 1995.10.20~1995.10.30 고재욱 1995. 9.16~1995. 9.30 정병탁 1995. 8. 1~1995. 8.12 허정무 1995. 4.26~1995. 7.31 박종환 1994. 7.24~1995. 2.26 비쇼베츠 1992. 7. 8~1994. 7.23 김 호 1991. 5.22~1991. 7.27 고재욱 1990. 8. 9~1990.10.23 박종환 1990. 7. 3~1990. 8. 8 이차만 1988.10. 6~1990. 7. 2 이회택 1988. 7. 6~1988.10. 5 김정남 1986.11.20~1988. 7. 5 박종환 1985. 3.19~1986.11.19 김정남
보시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들 보이시지요.
한편으로는 즐거움을 주었던 분들도 계시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만 남긴 분들도 계십니다.
먼저 90년대의 감독 선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90 이탈리아 월드컵입니다.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은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의 월등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실제 월드컵에서는 3전 전패, 1득점 6실점이라는 처참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하게 됩니다.
이러한 대표팀의 참패는 한국 축구 특히 국내 프로 리그에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양산하여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던 국내 리그를 거의 고사시킬 정도였습니다.
물론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 감독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요.
사실 이회택 감독은 우리나라 역대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입니다.
86 멕시코 월드컵 감독이었던 김정남 씨가 스타 수비수 출신에 온건한 성향의 감독이었다면 이회택 감독은 선수 당시에 얻었던 ‘풍운아’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매우 강인한 성향의 감독이었습니다.
우리 젊은 축구팬들께서 쉽게 이해하시려면 차범근 선수가 등장하기 이전의 한국 축구의 대표 스트라이커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또한 88년에 협회장에 취임한 당시 김우중 전 대우 그룹 회장 역시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성공을 위해 대단히 많은 노력을 쏟기도 했었습니다.
만약 이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이 선전을 했다면 축협 역시 김우중 체제를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랬다면 대우의 부도와 함께 축구 협회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참 세상 일이란 것이 일장이 있으면 반드시 일단이 있는 법인가 봅니다.
이탈리아 월드컵의 충격이 한국 축구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92년에 열린 아시안컵 지역 예선에서 태국에 1-2로 패하면서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거든요.
2년 후에 열릴 94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이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축구 협회는 이전과는 다르게 국대 감독을 명예직이 아닌 전임 감독 체제로 전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후보로 올려놓았던 사람이 박종환 당시 일화 감독, 고재욱 당시 LG 감독, 그리고 유럽에서 연수중이었던 김호 감독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술 위원회에서 투표까지 간 결과 고재욱 감독을 누르고 김호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 사상 최초의 전임 감독에 임명되었지요.
그 이후 김 호 감독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도하의 기적’을 이루며 3년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고 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전 대회 우승팀인 독일, 그리고 스페인, 볼리비아와 한 조에 속하게 되었고 2무 1패라는 호성적을 거두며 전 국민의 환영 속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김 호 감독이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 잠시 비쇼베츠 감독이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감독을 맡게 됩니다만 그 이후 대표팀 감독 선임은 초유의 헤프닝을 벌이게 됩니다.
바로 감독에게 긴 시간을 주지 않고 당시 K리그 감독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단발성으로 감독 자리에 앉힌 것이지요.
감독 코치
95년 10월 20일 ~ 95년 10월 30일 (사우디 방한 경기) 고재욱 박경훈
95년 9월 16일 ~ 95년 9월 30일 (보카 주니어스 방한경기) 정병탁 조윤환
95년 8월 1일 ~ 95년 8월 12일 (브라질 방한 경기) 허정무 이장수
95년 4월 26일 ~ 95년 7월 31일 (95 코리아컵) 박종환 최만희
위의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95년 4월부터 10월까지 무려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K리그의 감독들이 돌아가면서 감독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는데요, 아마도 당시가 축구계 내에서 가장 주류와 비주류 간의 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였습니다.
축구협회는 오랫동안 관선 인사로 회장을 선임해 왔습니다.
내셔널리즘이 강한 축구를 역대 정권이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지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회장에 임명함으로써 보다 쉽게 축구를 통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 78년 신동아 건설 회장인 최순영 씨가 협회장에 취임하여 10년에 가까운 장기 집권을 했고 다시 88년에 전 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이 협회장에 취임하였으며 다시 93년에 정몽준 씨가 협회장에 취임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후임 회장이 들어 올 때마다 전임 회장의 업적을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웠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임 회장 하의 축구인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연이 닿은 인물들끼리의 이전투구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러한 맥락이 지금도 축구계에 학연이나 지연 등의 소위 ‘인맥론’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정몽준 씨의 집권이 장기화되고 02 월드컵 유치와 같은 거대한 사건이 터지게 되자 이전의 축구인들이 설 자리가 많지 줄게 되었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 예를 들어 축구 감독 선임 문제나 협회 내 인사 문제 등 - 지금의 축구 협회가 과거의 축구계 인사들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을 통해 하나된 모습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축구계 발전을 위한 길이 아닌가 합니다.
국대 감독 선임을 정몽준 씨와 그 주변 사람들이 돌려 가며 해 먹는다는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축협이 도입한 ‘K리그 감독의 순번대로 국대 감독 돌려 먹기’는 그 자체로도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전임 감독을 두지 않고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감독을 하다 보니 국대의 경기력이 안정되지 못 했고 이는 자연히 96 아시안 컵의 비극을 낳게 됩니다.
제가 지켜 본 바에 의하면 90년대 한국 축구에는 세 번의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참패, 두 번째는 96 아시안 컵의 비극,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감독 경선이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 간 축구계 내부에서 곪아 왔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대회가 바로 96 아시안 컵이었습니다.
96 아시안 컵에 출전하기 전만 해도 이 팀에 대한 국민들이나 언론의 기대는 대단하였습니다.
83년 멕시코 청소년 대회 4강 신화의 명장에다가 프로 리그 93-95년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한 커리어는 박종환 감독을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했구요, 게다가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 아니라는 그의 이력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매번 국대 감독 후보에 올랐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탈락한 것이 협회 내 주류 인사들의 계획적인 훼방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당시 박종환 감독의 국대 감독 선임은 축구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선수들은 어땠습니까.
협회 내 인맥을 통한 국대 선발이 아니라 당시 K리그에서 가장 폼이 좋은 선수들로만 구성하여 명실상부 K리그 올스타를 선발하는 등, 이번에야말로 축구 협회가 발상의 전환을 하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획기적인 안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최악의 결과를 거두게 되지요.
예선에서부터 삐걱대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 주던 국대 팀은 간신히 예선을 통과한 후, 8강에서 숙적 이란을 만나게 되지만 2-6이라는 참패를 당하며 탈락하고 맙니다.
한국 축구사를 연구해 보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바로 96 아시안 컵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첫 번째는 94 미국 월드컵 이후, 축구 협회가 보여 주었던 우유부단한 태도입니다.
94 미국 월드컵에서 전임 감독제를 도입했다면 그 이후에도 협회는 전임 감독을 두어 감독의 축구 철학이 지속적으로 국대 팀에 녹아들도록 했어야 했습니다만 협회는 주류 인사들만 해 먹는다는 여론에 휘둘리면서 갈지자 행정을 펼쳤지요. 그러다 보니 여론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정책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무려 6개월 동안 네 명의 K리그 감독이 돌아가면서 감독에 선임되었고 이전의 비쇼베츠 감독까지 포함하면 5명의 감독이 94 미국 월드컵 이후, 96 아시안컵까지 난립하는 등, 지속적인 감독직 수행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어요.
두 번째는 박종환 감독의 지휘 스타일에 있습니다.
박종환 감독은 이전에 청대를 지휘할 때나 클럽 팀을 맡았을 때도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훈련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문제는 국대에 뽑힐 정도의 선수라면 이런 강압적인 방식은 결국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다음의 세 번째 문제와 연결됩니다.
세 번째는 선수들의 항명 파동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 모 선수를 필두로 해서 몇 몇 선수들이 박종환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반감을 품고 항명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기 중에도 선수들이 파벌을 형성해서 자신들끼리만 패스를 주고받았다는 것이 대회가 끝난 후 언론을 통해서 밝혀지기도 했어요.
특히 세 번째 문제는 한국 축구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간 한국 축구가 다른 축구 강호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경쟁력은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팀워크였는데 이것이 이 대회에서는 전혀 발휘가 되질 않은 거예요.
협회는 이를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였습니다.
또한 감독의 선수 장악 능력 부족이 발생한 이유를 박종환 감독의 지나친 카리스마 이외에도 국가 대표를 경험하지 못 했던 것으로 꼽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국대에 차출되는 선수들은 대부분 청대, 올대, 국대까지 엘리트 코스를 거친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이들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다음 감독으로 차범근 감독을 선임하게 되는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로 박종환 감독의 전술 실패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96 아시안 컵 당시 박종환 감독은 스위퍼인 홍명보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리고 막 수비수로 전업한 김주성 선수를 스위퍼에 두는 파격을 단행하였습니다.
나름 참신한 발상이기는 했습니다만 타이밍이 문제였어요.
훗날 김주성 선수는 대우에서 스위퍼로 변신하여 대우가 3관왕을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당시에는 수비수로 전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거든요.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전술 실패가 수비 조직력의 와해를 불러오게 된 이유라는 것이지요...
이 처럼 96 아시안 컵은 한국 축구에 여러 가지 숙제를 남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협회에게도 몇 가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K리그를 더 이상 믿지 못 한다는 것과 두 번째로 선수 장악을 위해서는 카리스마(감독 개인의 능력) 보다는 국대를 경험했다는 외형적 조건이 더 중요하다는 것 말이지요.
이 트라우마는 제법 오랫동안 유지되구요, 지금도 국대 감독 선출 과정 중에는 반드시 언급될 정도입니다. 그 만큼 축구 협회의 트라우마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종환 감독의 실패로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통과가 불투명해지게 되자 협회는 그 동안 협회와 평형선을 달리던 또 한 명의 비주류 인사에게 SOS를 보냅니다.
바로 차범근 감독이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차범근 감독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았습니다.
일단 외형적으로도 압도적인 경력을 자랑했을 뿐 아니라 비록 프로 리그에서 우승하지는 못 했지만 어느 정도 지도자 경험을 한 차범근 감독은 당시 고조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협회가 빼들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습니다.
차범근 감독을 설득하기 위해 협회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 끝에 결국 차범근 감독의 동의를 받아내게 되고 차범근 감독을 통해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치루기로 결정을 하게 되지요.
다들 아시듯이 ‘도쿄 대첩’을 포함한 빼어난 성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되지만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는 토털 풋볼의 원조인 네덜란드에게 0-5의 참패를 당하는 등, 졸전을 펼치며 대회 중 감독 교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대회 이후 차범근 감독은 ‘프로 리그 경기 조작설’의 여파까지 겹치며 수 년 동안 한국 축구와는 담을 쌓고 살다가 03년에 수원 블루윙즈의 감독에 선임되며 국내 무대로 되돌아오게 되지요.
아마 역대 대표팀 감독 가운데 차범근 감독만큼 혹독하게 시련을 겪은 대표팀 감독도 없을 거예요.
물론 원인이야 감독인 자신에게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 감독이 겪었던 시련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지금도 차범근 감독이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지옥과 같은 순간이었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감독을 떠나 한 인간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 놈의 국가 대표 감독이라는 자리가 어떠한 자리이기에 한 인간을 이렇게 까지 매장시켜 놓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던 것일까요.
당시 국민들의 협회에 대한 불신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오죽하면 협회가 차범근 감독의 경질 이후 감독 선임 시에 국대 감독을 경선을 통해 뽑을 생각을 했을까요.
쉽게 말하면 더 이상 자신들이 선임할 능력이 없으니 감독 자리를 투표를 통해 뽑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원한 사람은 이차만, 허정무, 김호곤 이렇게 세 명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리고 투표 결과 허정무 감독이 이차만 감독을 5% 이내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지요.
협회는 허정무 감독에게 올림픽 대표팀 감독과 국대 감독을 모두 맡기는 강수를 두게 됩니다만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시드니 올림픽 조별 예선 탈락과 아시안 컵 결승 진출 실패였습니다.
사실 시드니 올림픽 조 예선의 결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아시안 컵 결승 진출 실패는 그다지 나쁜 결과는 아니었어요. 전전 대회에서는 아예 아시안 컵 본선에도 오르지 못 했고 96년 아시안 컵에서 8강에서 탈락한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과 차범근 감독을 거치면서 협회에 누적된 축구팬들의 불만 속에 허정무 감독은 재임 기간 내내 낙하산 인사의 오명을 들어야만 했습니다.(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말하면 협회의 방패막이가 된 셈이었어요.
그 당시 대표팀 자리는 누가와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 자리에 지원했던 허정무 감독을 용감하다고 해야 할 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허정무 감독이 자신의 안녕보다는 자기를 키워 준 한국 축구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기에 미안했던지 협회에서도 허정무 감독의 대표팀 사퇴 이후 허정무 감독에게 기술 고문이나 기술 위원회 부위원장직 등의 명예직을 맡기게 되는데요, 여기에서 또 문제가 벌어집니다.
즉, 허정무 감독이 대표적인 친 축협 인사로 낙인이 찍혀 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 낙인은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 감독 자리 내내 허정무 감독의 이름 옆에서 떠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결과론적으로는 한국 축구의 자산이 되었어야 했던 두 명의 레전드가 동시에 침몰해 버리고 맙니다.
한 명은 축구 협회에게 버림을 받고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축구팬들에게 버림을 받지요.
우리는 한 명의 인재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만 축구계만 놓고 보면 불과 4-5년 사이에 선수로서 외국에서 가장 성공하였으며 훗날 축구 협회장과 기술 위원장으로 거론되던 두 명의 레전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90년대에 선임되었던 국대 감독들을 통해 그간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대충 보셔도 아시겠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하지요.
거의 2년 간격으로 파란이 일어난 셈이에요.
그리고 이런 과거의 선례를 통해 축구팬이나 협회 모두 배운 부분이 많았겠지요.
아무쪼록 이번 국대 감독을 선출할 때는 가급적 과거의 사례에 반추하여 문제점은 보완하고 가장 적합한 감독을 뽑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만큼 이번 국대 감독의 선출은 향후 10년을 내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약간만 보완할게요. 일단 90년 월드컵의 이회택감독님은 88년 협회가 프로리그 우승팀 감독을 국가대표 감독으로 삼겠다는 계획에 따라 89년부터 대표팀을 맡았으며, 이로 인해 포철은 1년 6개월간 수석코치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92년 아시안컵 예선은 축구협회가 이 예선을 매우 만만히 보고 무려 '실업선발'을 내보냈습니다. 그 팀은 당시 이랜드에서 뛰던 박건하가 에이스였고 노상래도 있었구요. 그래서 이 결과를 놓고 축구팬들이나 축구협회나 94년 월드컵 본선진출을 걱정해 본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92년 아시안컵 예선에 실업 선발을 내보낸 것은 저도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만 한국의 아시안 컵 예선 탈락과 맞물려 그 당시 보여 주었던 아시아 국가 팀들의 경기력이 90년 월드컵 예선 당시와는 달리 많이 향상되었다는 점에서 경각심이 부각되었었지요.
그런 의미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 96년의 비하인드스토리가 그런거였군요.. 그때 전 중학생이라.. 그런 내막들은 전혀 몰랐네요.. 이런 글이 다음 메인에 떠야 하는데..
좋은 글 넘 재밌게 보았네요..
테클은 아니구 한가지 집고 넘어가자면 개인적으로는 허정무감독의 다소 독선적이라고 까지 느껴질 정도의 소신과 카리스마는 한국축구의 풍토에선 꼭 필요한 감독의 덕목의 하나로 생각하고 그리고 이번 월드컵에서도 몇번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감독으로서의 첫출전인 이번 월드컵에서도 여태까지의 어떠한 한국인 감독보다는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만..
2000년 아시안컵에서 허감독이 경질된것은 4강 이라는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당시 외신과 국내언론 국내전문가들 그리고 팬들이 통적으로 전술부재를 지적하였었죠.아마도 스위퍼 시스템을 쓴 몇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한국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당시 아시안 컵에서 국대의 경기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어요.
수비와 공격 라인 사이의 간격이 매우 넓은 롱볼 축구를 구사했었지요.
하지만 이랬던 허정무 감독도 출범 초기에는 지금처럼 공수 간격을 좁히는 압박 축구를 구사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 아시는 것처럼 일본 올대와의 두 차례 평가전에서 완패를 당하면서 그 충격으로 새가슴이 되면서 수비 라인을 지나치게 끌어 내리게 되어 허정무 감독 초기의 압박 축구가 많이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문제라면 일본과 평가전 시기를 애매하게 잡은 축구 협회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축구팬 입장에서는 두고 두고 아쉬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8강전 4강전을 앞두고 전술훈련없이 패스훈련만을 줄창 시켜서 기자들이 물어보니 허감독님 왈 한국선수들은 기초가 부족해서 기본기 훈련을 시킨다고 말했었죠.그당시 한동안 떠들석하게 회자되었었죠..그리고 여러 감독들이 프로 올스타팀을 뽑는다면 대표팀을 이길수 있다는 말까지 공언할 정도로 허감독님의 입맛에 맞게 뽑았던 그당시의 아시안컵 대표팀은 선발당시 부터 많은 잡음도 따랐었죠. 아시안컵에서 보여준 성적이나 축구협회의 방패막이로 감독이 교체 된게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구시대적인 전술과 비전의 부재로 인해 2002년의 월드컵을 기대할수 없다는 현실이 감독을 교체할수밖에 없게 만든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국대는 한국 최고의 선수들을 뽑은 게 아니라 올대+와일드 카드 형식의 매우 이상한 조합이었죠.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선수 선발이 하도 이상해서 크게 기대는 안했습니다. 덕분에 이동국 선수가 혹사당해 10년 가까이 슬럼프를 겪었죠
파란혜성님 제가 알기로는 허 감독이 국대와 올대를 겸임하면서 올대의 멤버를 국대로 키워서 02 월드컵을 준비하고자 하는 장기적인 차원의 일환으로 아시안 컵을 치루었습니다.
잘 아시듯이 결국 히딩크 감독은 당시 멤버들을 주축으로 해서 공격진과 수비진을 보완한 후 02 월드컵을 준비하게 되지요.
확실히 허 감독이 네덜란드 학파답게 선수를 선발해서 육성하는 능력은 뛰어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멀리 보면 현명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르나 우리로선 일본의 아시안컵 우승을 손가락 빨며 구경해야 했다는...
뭐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길 잘했네요. 허 감독으로는 월드컵 4강은 꿈도 못 꿨을 테니 ㅎㅎ
2000아시안컵 멤버가 그랬던 이유는... 최고의 구성원을 소집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황선홍,최용수,김도훈 3인방이 모두 부상이었고... 고종수까지도 올림픽 이후 부상이었습니다. 안정환은 왜 소집 안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허정무가 안정환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었던듯 싶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안정환 선수는 볼을 이쁘게만 찰뿐 몸싸움이 약하다 이런 편견을 달았지요. 그리고 이탈리아 진출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점이라 적응을 위해 소집하지 않았던걸로 압니다.
정말 좋은, 훌륭한 글입니다!! 정리가 잘 된게 머릿속에 너무 잘 들어오네요...새로운 내용도 알게 됐구요...잘 봤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컬럼으로도 가져갑니다.다음스포츠/축구섹션에 보낼수있도록 준비(일부보완) 부탁합니다.
쪽지 보내드렸습니다.
축구의 역사를 잘 정리해 주셔 참 감사해요 ㅎㅎ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98월드컵때 차감독님 생각하면 지금도 맘이 짠합니다요~~~ 그땐 정말 축구인들이 넘 했었죠.. 해설자 심모씨 부터해서..
저도 신모 해설위원을 이때 이후로 사람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조금 심한 말이긴 하지만,,,,)
댓글을 달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기술위에서 투표로 감독을 뽑은 적도 있군요. 공정하게 투표제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너무 파벌싸움으로 가려나;;
2000년 아시안컵 예선을 간신히 통과해서 8강에서 극적으로 연장 골든골로 승리 하고 4강에서 패하고 3,4위전에서 이겨서 3위했었죠.. 일명 한국축구의 암흑기라... 불리기도 했었고.. 경기력은 그닥 좋지 못했고.. 다만 골넣을때.. 패스전개로 인해서 넣은 골들이 많이 있었고.. 1년이 넘는 동안 무릎에 붕대를 감고 부상중이여서 점프도 제대로 못하는 이동국선수를 교체 선발로 번갈아 가면서 투입했고.. 이동국선수는 득점왕에 올랐었죠..마치 유망주의 혹사는 이렇게 하는것이다.. 라는 답안을 보여주는 듯한.. ㅡㅡ... 리그는 중흥기였는데.. 국대는 어둠... 그래도 그때가 그립긴 하네요.. ^^
약관 이동국의 신들린듯한 골결정이 아니었다면 우린 3위 못했을 겁니다. 그당시의 이동국의 모습은 다신 볼수 없겠죠.
그렇군요 님 글을 읽으니 이번월드컵때 무리를 해서라도 이동국을 데려가고 또 경기에 출전시킨 허감독님의 맘을 어느 정도 이해할수 있을거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 쓰신분의 정성과 축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부럽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봤으면 합니다.
차범근 감독이 욕먹는 이유가 본인에게 있다는건 동의하기 힘드네요. 물론 네덜란드전 대패의 최종책임은 형식적으로든지, 경기력적이든지, 감독이 지는 건 당연하겠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네덜란드의 경기력과 한국의 경기력을 본다면, 대회 중 경질이라는 건 심한 처사이었음은 부인하기 힘들겠죠. 그리고 승부조작설은 언론이 그 당시에 잘써주겠다--;;는 식으로 말한 다음 애초 약속과는 다르게 내보낸 걸로 압니다. '차범근 미투데이'를 보시면 그래서 축협보다는 오히려 언론과 기자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물론 그런 자극적인 기사에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겠지요.
96년에 김주성 선수는 이란 전에서 전반전에 플레이 메이커로 미드필더에서 뛰지 않았나요. 어시스트 2개하고 후반 교체. 홍명보가 수미로 올라가고 김주성이 스위퍼로 본 것이 다른 경기에서 그랬다는 건가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이란 전은 마라도나님의 기억이 맞을 겁니다.
조별 예선에서는 김주성 선수가 스위퍼를 보았고 워낙 비난에 시달리자 이란 전에서는 스위퍼 포지션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오래 전 기억이라 저도 가물가물 하네요.
덕분에 수비 조직력은 완전히 붕괴되어 후반전에 대량 실점의 빌미가 됩니다.
어찌 되었든 그 대회 이후로 김주성 선수가 계속해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맞지요.
좋은글입니다.잘봤습니다. 축협과 국대감독이라는 자리는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듯.. 그리고, 축구에서 대패는 쉽지않은데,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된것도 축구는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것 같네요..
한국 축구사를 보는듯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종환, 차범근, 허정무. 이 세분이 어찌보면 독박을 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매우 좋은 글에 꼬투리 잡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감독 경선당시 이차만 감독은 돌연 자진 사퇴한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란 말을 들었죠. 제가 열렬한 지지자 였기에 기억합니다. 제기억이 틀린 건가요?
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 있습니다.
설도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저도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오이밭에서 신발끈 고쳐매지 말고오얏 나무 옆에서 갓 고쳐쓰지 마라'는 속담처럼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이기 쉬운 상황이었거든요.
따라서 본문 글에서는 가급적 가장 일반화된 내용만 언급하였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몰랐던 것들을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도 98 월드컵 이후 차기 국대감독 경선에서 허정무 감독이 5표, 김호곤 감독이 3표, 이차만 감독이 0표 얻은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1차 경선 치르고 최종적으로 이차만감독과 허정무감독의 이파전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젊은 허감독보다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이감독이 우세하다는 평이었습니다. 다만 조중현 전무가 허감독을 민다는 얘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마안있어 이감독이 자진해서 중도하차하고 허감독일인찬반투표로 결정났죠.
당시에는 군대 가기 전이라 어린마음에 의심도 많이 했더랍니다. 마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듯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결론은 나있는 상황에서 후배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 형태를 취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히딩크 감독후에. 박항서 감독이 국가 대표팀 감독 한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그냥 대행만 했군요.
96년 이란전 TV중계때요,
지금도 기억나는게 이미 점수는 3점인가 4점 먹었고
박종환 감독 바로 앞에서 우리 선수가 또 공을 뺏겨서 역습을 허용하는 상황인데
방송 오디오에 박종환 감독이 수비수더러 "저 새X 저거 저거.. "하는 욕설이 그대로 나오더군요..
참.. 쇼크였습니다.
94년때도 김호 감독님의 최종예선은 솔직히 본선 진출 실패가 거의 기정사실이었죠.
최종전에서 북한전에 대량득점하고도 자력진출은 불가..
일본의 어이없는 막판 골 허용이 아니었다면 뭐...
우린 도하의 기적이지만 일본애들은 도하의 악몽 도하의 비극....
글에 마치 허정무 감독이 선거에 의해서 되었기에 낙하산 인사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오히려 이글은 사실을 왜곡하는 글입니다. . 당시 조전무가, 미는 사람이 허정무였고, 이미 그 때 언론에도 많이 언급되었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전형적인 축협인사 였고, 외형적으로 선거형태를 취했을 뿐입니다.
이런식으로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도 선거로 당당히 대통령 했고, 3선도 정당한 결론입니다. 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부정시비는 있었지만. 설이지요, 이런것과 무엇이 틀린지요.
적절한 비유는 아닌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