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9
8월21일[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연중 제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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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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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sF3l91Jadg
(윤상현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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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애야,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언젠가 한 봉쇄 수녀회를 방문해서 수녀님들을 위한 월 피정 강의를 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반성도 했습니다.
머리 털 나고 그런 강의는 처음 했습니다. 저는 격자 창살 이 쪽에서 강의를 하고, 수녀님들은 창살 반대편에 앉아 강의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수녀님들의 강의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열렬한 반응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도 큰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황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 물질문명의 극치 속에 살아가다 보니, 은연중에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경향이 우리 몸에 배어 있습니다. 교회나 수도 공동체 역시 이런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그 수도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창살 안에 가두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했습니다. 스스로 문명 세계를 등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평생을 그 좁은 테두리 안에서 마무리 짓습니다.
이분들의 선택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이 싫어서 그 길을 선택했을까요? 세상에 혐오감을 느껴서일까요? 그도 아니면 실연이라도 당했을까요? 세상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였을까요?
그런데 그분들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만 가두었을 뿐 그분들의 영혼은 얼마나 자유로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삶 전체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했었는데, 그분들의 얼굴에는 ‘행복해 죽겠네’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비록 그분들은 세상을 등졌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아픔과 상처에 민감했습니다. 그분들의 입술에는 세상을 위한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보다 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보다 완벽히 스승 예수님을 닮기 위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스스로 그 험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 때로 알다가도 모를 분이십니다. 때로 한없이 여유로우시고, 끝까지 인내하시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분이시지만, 때로 요구가 얼마나 많은 분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온 한 청년에게, 그 지키기 어려운 계명들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켜온 요즘 보기 드믄 청년에게 큰 상급을 내리시거나 칭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특별히 열심히 신앙생활 해나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하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저희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돈보스코 역시 자신들의 어린 제자들에게 힘에 부치는 요구를 많이 하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된 어린 소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너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깜짝 놀라 이렇게 반문하곤 했습니다.
“신부님, 제게 지금 장난치고 계신 거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이예요?”
돈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애야,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네게 매일 주어지는 일과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정성껏 미사에 참석하는 것, 고백성사를 잘 준비하는 것, 그것으로 너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마음으로 이렇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래, 나는 반드시 성인이 되고 말거야.”
은혜롭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화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만천하에 확실하게 공표했습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더 이상 성직자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했습니다. 성화의 길은 하느님 백성들이면 누구나가 다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길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모두를 성화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일상에 대한 충실과 꾸준한 기도 생활로 보다 완전함에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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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Z4VjdhVx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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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의 서로 다른 역할의 차이>
‘금쪽같은 내 새끼 92화 강압적인 아빠와 숨 막히는 3남매’에 나온 사연입니다. 이번 가족은 재혼 가족인데, 가족 구성은 5남매와 뱃속에 1명으로, 이미 자녀가 셋인 상황에서 재혼 후 2명을 더 낳았고, 1명을 임신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20살 1호 금쪽이, 19살 2호 금쪽이, 17살 3호 금쪽이 3남매는 하고 싶은 것도, 즐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반면에 아빠는 출산을 앞둔 엄마를 위해 6살 4호 금쪽이, 4살 5호 금쪽이들을 돌봐주고 엄마를 돕길 원하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방송 내내 아빠는 강압적인 태도와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녀들을 억압했습니다. 아빠가 퇴근할 때 집에 자녀들이 없으면, 바로 전화로 소집 명령이 떨어집니다.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대화할 때 역시 아빠의 눈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회피합니다. 아빠와 대화할 때 자녀들의 눈빛이 참 슬퍼 보입니다.
자녀들이 아빠와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면 이야기는 이내 극단적인 예시로 향합니다. 김치, 쌀 같이 식량이 떨어져 봐야 알겠냐느니, 돈이 없어서 고생해야 하느니 하는 극단적인 예를 들며 아이들을 압박합니다.
아빠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태어난 지 50일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물론이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금전적으로 자유롭게만 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결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의 더 큰 문제는 어머니 역할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재혼했기 때문에 이미 다 성장한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훈육을 책임지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아녀서 미안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욕구는 다른데 행동만 바르게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는 계명들을 다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당신을 따름은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욕구’에 더 관련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탐욕은 욕망입니다. 당신은 욕망을 없애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탐욕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마칩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만 만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육아도 어머니와 아버지, 둘의 합작품입니다. 아버지는 행동을 잘하게 만드는 분인데, 먼저 어머니에게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렇게 행동은 잘하지만 기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엄마는 욕구를 죽여줘야 하고 아빠는 행동을 바꿔줘야 합니다. 엄마가 욕구를 죽여주는 방식은 자녀를 위한 피 흘림입니다. 아빠의 피 흘림만으로 자녀의 욕구가 줄어들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빠는 행동에 관여하고 엄마는 욕구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둘이 합쳐져야 완전해집니다.
‘아빠는 훈육하면 안 돼’ VS ‘아이 문제는 훈육 못 한 엄마 탓!’, 양육 방식 차이로 인한 부부 갈등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새끼 64회’엔 토할 때까지 먹는 예비 초1 남자 금쪽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행동에 대한 단호한 훈육을 엄마가 하고 아빠는 감싸주는 역할만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에게서 포근함을 얻어 욕망을 절제하고 싶고 아빠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니 욕망도 절제되지 못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엄마 아빠의 역할은 명확해야 합니다.
아빠가 행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아빠를 그리워합니다. 아빠의 훈육이란 다름 아닌 ‘모범’입니다. 아이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기력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 욕구에서 나오는 것들 외에 스스로 의미 있는 것을 원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원하고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를 만나지 않는다면 두 발로 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능력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나의 목적지입니다. 계명이 우리 목적인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하여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노력과 함께 그리스도를 거쳐야 합니다. 욕구를 버릴 수 있어야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목적으로 가며 순간순간 기쁨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기쁨을 느끼려면 어때야 할까요?
먼저 배를 버린 것에서 오는 공허감을 이겨야 합니다. 욕망이 없어야 합니다.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만났다는 증거이고, 그리스도처럼 따라 하면서 조금씩 나아갈 때 비록 물에 빠지기는 해도 나아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도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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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르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던지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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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한번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전문을 외우지는 못하지만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시인은 꽃 한 송이 피기까지 온갖 정성과 노력이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람을 죽이지 말고, 거짓증언하지 말고, 남의 재산 탐하지 말고, 남의 아내 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전해 준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저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칭찬하시면서 더 좋은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이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 동북부 제 42차 남성 꾸르실료 봉사자’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저는 모임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는 그런 마음으로 봉사에 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봉사자들은 매주 수요일에 모여서 8월부터 10월까지 3달 동안 꾸르실료 체험자들을 위한 준비모임을 합니다. 저는 시작 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남성 제42차라는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보물은 꾸르실료 교육에 참가하는 체험자들입니다.”
봉사자들에게는 3달 동안 준비하는 과정에 ‘숙제’가 있었습니다. 숙제에는 ‘묵주의 9일기도, 희생, 선행, 단식, 매일미사 참석, 성체조배’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것은 봉사자들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꾸르실료 체험자들이 교육을 통해서 변화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니 남성 제42차 꾸르실료라는 꽃이 활짝 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니 남성 제42차 꾸르실료는 좋은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은행에 잔고가 많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처럼 이렇게 기도은행에 기도를 많이 쌓아 놓으면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채워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바른 길로 올 수 있도록 ‘판관’을 보내 주셨습니다. 판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앞장섰습니다.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모시곤 합니다. ‘재물, 권력, 명예’라는 삼종세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삼종세트를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는 ‘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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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전에는 6억 명이 굶주렸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8억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1964년 유엔 세계 식량계획(United Nations World Food Programme, WFP)에 가입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가 되었고, 세계에서 10번째로 식량 원조를 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가입했던 아프리카의 <기니>는 아직도 원조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 인구의 10% 이상이 굶주리는 상황인데 우리가 먹는 음식의 35%는 버려진다고 합니다.
버려지는 음식이 1000조 원가량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버리는 음식만 아껴도 8억 명이 넘는 사람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제공되는 음식을 모아서 아이티의 꽃동네로 보낸다고 합니다. 아이티의 꽃동네 수녀님들은 미국에서 오는 음식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다면, 굶주리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8억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월(超越)은 신비한 깨달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만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초월이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애쓸 때, 우리의 삶이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奇蹟)은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만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적이란 연민의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초월과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가문비나무의 노래는 영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 의식이 더 깊은 단계로, 더 높은 단계로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 의식이 소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소명은 이웃의 필요를 헤아려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폰 살란트는 “네 이웃의 물질적 곤궁은 너의 영적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물음이 있습니다. 자기 삶이 어떤 사람 또는 무엇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은 선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이 내게 선함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에 기꺼이 자신을 선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믿는가?’라고 묻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내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부자 청년은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선한 일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렇습니다. 선한 일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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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이는 무엇이 슬펐을까?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을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펐을까? ‘둘 다’일 것입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퍼한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도 포기할 수 없고 재물도 포기할 수 없는데,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진퇴양난’, 즉 ‘딜레마’가 되어버린 것이고, 그 상황 자체를 슬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가 슬퍼했다는 말은,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영원한 생명’과 ‘재물’을 동등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그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 젊은이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서도, 많은 재물을 계속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하느님만’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과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부자 젊은이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이야기의 배경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모두 겨냥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는 말은 사도들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부유하게 살고, 죽은 다음에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부유함은 하느님의 복’이라는 생각은 ‘가난은 하느님의 벌’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난 체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고, 교만이라는 죄와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선조들에게 물질적인 복을 내려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약시대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시기는커녕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루카 6,20)
인간 세상이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로 갈라진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불공평함 때문입니다. 이 불공평함은 부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1) 복음 말씀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해서 예수님을 찾아오긴 했지만, 그 희망이 그렇게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희망에 간절함이 없으면, 그 희망은 힘이 없는 희망, 또는 죽은 희망일 뿐입니다. 정말로 간절하게 바란다면, 자신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 쏟게 되고,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치워버리게 됩니다.
2) 그 부자 청년은 원한다고 ‘생각만’ 하면서 실천하려는 의지는 부족했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희망은 생각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3) 그 청년이 그냥 떠난 것은, “나를 따라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 ‘떠남’을 보통 ‘버림’으로 표현하는데, ‘버림’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마음이 떠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도들처럼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도 있고, 사도가 아닌 제자들처럼 실제로 버리지는 않더라도 가지고 있는 것들에서 떠나서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루카 9,62) 재물이든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애착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도 없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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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을 묻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옵니다. 오늘 복음은 가진 것이 많지만 자기 생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이를 해결하고 싶은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가 무엇을 청합니까?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청합니다. 올바른 이스라엘 사람은, 다시 말하여 올바른 신앙인은 필요한 온갖 것을 하느님께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땅”(시편 135[134],12)과 ‘율법’(119[118],111 참조), ‘축복’과 ‘약속’(히브 6, 14-15 참조), 그리고 ‘하느님 나라’(마태 25,34 참조)를 받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와 우리는 하느님께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착한 행실의 대가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가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우리 모두’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복음사가가 고른 말입니다. 이상적인 신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현존과 그분의 말씀이 효과를 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하여 주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부를 선택하는 대신 슬퍼하며 떠나간 사람, 그는 앞으로 더 슬프고 힘들 것입니다. 진정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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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어떤 청년이 질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이미 그런 것들은 잘 지켜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준 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이라는 형용사는 네 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오 복음에만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제자들과 군중을 대상으로 이웃 사랑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이미 가르치셨습니다.(마태오 복음 5장 43절-48절 참조)
유다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전은 전심전력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을 전적으로 다 바치는 데 있습니다.”(박영식, 『마태오 복음 해설』, 157면)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뛰어넘는 훨씬 더 큰 사랑이 요구된다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은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입니다. 성인은 어느 날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을 닮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이 수도 생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안토니오 성인과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이웃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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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 재산을 처분하라>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훌훌 털어버리고 따름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됩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다른 무엇으로부터 옭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내려놓으면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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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담벼락에는 커다랗게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낙서 금지”
워낙 종이나 펜이 귀했기 때문에 담벼락은 어린이들에게 좋은 종이고 그 위에 돌을 연필 삼아 낙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낙서 금지’라는 글이 가장 큰 낙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요. “떠들지 마.”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어쩌면 본인이 더 시끄럽지 않을까요? 또 이런 말도 있지요. “남자는 다 늑대야. 절대로 믿지 마.”라면서 자기만 믿으라고 남자 친구가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본인도 남자면서 말이지요.
이런 역설들 사이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정답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정답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3+2=6’이라는 수식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당연히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3+2=6’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이 경우는 참입니다. ‘거짓이다’라는 문장 하나가 들어가 ‘3+2=6’이라는 수식이 거짓인데도 참이 됩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 안에서 또 많은 역설을 품고 있는 세상 안에서 혼란을 느끼고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세상을 잘 사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멋지고 행복한 삶,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만 잘 지키면 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를 다시 묻습니다. 이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계명을 모두 지켜왔다고 예수님께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정말로 올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란 쉽지 않았나 봅니다.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나고 말지요. 그는 자기의 관점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법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즉, 세상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담긴 주님의 기준을 늘 기억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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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떤 사람>
마태오 19,16-22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
많이
가져서
많이
줘야 하기에
슬픈 사람
많이
가져서
많이
줄 수 있어
기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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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벽한 사람과 완전한 사람의 차이>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부자 청년 얘기의 시작은 부자 청년의 질문이랄까 요청에서 시작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그 비법을 알려달라는 것 말입니다.
사실 이런 젊은이는 꽤 괜찮은 젊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면에서 그렇고,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묻는 면에서 그렇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꽤 괜찮은 젊은이이고 어떻게 보면 완벽한 젊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계명을 다 준수했는데 아직 부족한 것이 뭐 있냐고, 더 해야 할 것이 있느냐고, 어떻게 보면 의기양양하게 질문하는데 주님께서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계명을 다 준수했다고 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고 답하시는데 그것에 제게는 완벽하다고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완벽한 사람과 완전한 사람의 차이를 생각게 하는데 결론적으로 볼 때 주님의 말씀은, 계명의 완벽한 준수가 완전한 사람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사람들에게 나쁜 짓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인데 그러면 완전한 사람의 요건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완벽과 완전은 기준부터 다릅니다. 청년의 완벽은 계명의 준수이고 주님의 완전은 사랑의 실천이며, 청년의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이고, 주님의 영원한 생명은 저세상 곧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첫째 요건은 포기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 것들을 다 포기할 수 있어야 완전합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완벽하게 다 갖추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두 번째 요건은 나눔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이웃 그것도 가난한 이웃과 나눠야 완전합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다 지켰느냐는 질문에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는데 실은 나쁜 짓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완벽했는지 몰라도 가진 것을 다 나누는 면에서는 부족함이 있었음이 드러난 겁니다.
나쁜 짓 하지 않은 것도 사랑이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사랑이지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요건 따름입니다. 주님을 따라 하늘나라에 가야지 완전한 사람이지 하늘나라에 가고 싶지 않고 그래서 주님을 따라가기도 싫다면, 이것이 완전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결정적인 결격 사유입니다.
이러니 완전한 사람 되는 것, 부자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 만만하게 생각하고 의기양양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완벽해도 이 면에서 완전하지 않다는,
부족하다는 생각과 자세를 늘 지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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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 -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게 하소서."(시편90,14)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얼마전 두주간의 여름 휴가를 끝내고 귀원한 도미니코 형제를 봤을 때의 반가움과 더불어 깨달음도 생각났습니다. 약4개월 동안 뉴튼수도원을 경유해 쿠바 선교 체험을 떠났던 안토니오 형제가 마침내 어제 귀원한후 끝기도때 모습을 발견했고, 반가움에 형제들의 끝기도 소리도 힘찼던 듯 싶었습니다. 끝기도후 반가움에 포옹하던 형제들의 아름다운 장면도 감동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도 먼저 도착한 형제들의 반가운 환대도 이렇지 않겠나 하는 묵상도 했습니다. 긴 휴가인 듯 하지만 지나고 나면 금방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귀원합니다. 우리의 지상에서의 휴가시 귀원 날짜는 확실하지만 인생 휴가 끝난후 귀원 날짜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날에는 죽음과 더불어 인생 휴가도 끝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얼마전 이런 깨달음을 표현한 “새삼 무슨 휴가?”란 짧은 시도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
인생인데
남은 휴가
얼마
안 남았는데
날마다
휴가인데
새삼 무슨 휴가?”
예외없이 누구나 인생 휴가 끝나면 죽음과 더불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에서 휴가 대신 소풍으로 바꿔 귀천의 마지막 연에서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과연 이 세상 인생 휴가 끝내고 귀천하는 날, 이렇게 가서 아버지께 인생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말씀 하십니다. 강물처럼,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문제는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참으로 인생 휴가중 영원한 생명을 체험했을 때,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인생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긴 듯 하지만 짧은 인생,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도 체험하지도 못하고 귀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 참 허무하고 아쉽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이런 목마름을 고백하는 어떤 사람의 다음 물음은 옛 사막 교부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은 물론 우리의 공통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물음을 읽고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모시는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 무지에 눈이 가려 보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물으니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입니다.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따를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어떤 구도자는 영원한 생명은 주님을 만났을 때의 은총의 선물인데 업적의 산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구도자의 속내를 꿰뚫어 직관하신 주님은 ‘웬만한 계명들은 다 지켜왔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냐?’는 항의성, 도전적 질문에 참으로 강도 높은 처방을 제시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바로 이 구절은 사막의 안토니오를 회심시킨 복음입니다. 과연 이 말씀을 받아들일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러나 복음의 구도자는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슬퍼하며 떠났으니 그 원흉은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많은 재물이 결정적 장애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하는 참된 회개로 이끄는 주님의 권고 말씀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났다면 계명의 자발적 준수는 물론 저절로 자연스럽게 재물의 포기도 뒤따랐을 것이나 이 부자는 주님을 눈앞에 보고도 참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복음의 부자는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 평생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후에 재산을 정리하고 주님을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따를 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바로 복음의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을 때 저절로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기념하는 성 비오 10세 교황을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고 평생 주님을 따랐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은총의 선물임을 오늘 본기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영원한 생명의 상급이라며 영원한 생명은 은총의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의 사목표어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Instaurare Omnia in Christo)" 였고 시종일관 가난을 사랑하며 가난을 살았던 교황님의 감동적 고백입니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싶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한두번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만나 따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함으로 영원한 삶의 참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한 생명,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이라 강론 제목을 택했습니다. 날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니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회개와 더불어 날로 영원한 생명의 체험도 깊어갈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판관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 잘 드러납니다. 악순환의 패턴의 반복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106장이 이런 악순환의 인간 현실을 보여줍니다. 판관들을 통해 구원해 내면 잠시일뿐 또 우상숭배에 빠지고 또 울부짖으면 주님의 구원이 뒤따르고, 다음 또 배신하고 계속 반복되는 구제불능의 사람같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도,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우리 현실을 봐도 악순환의 반복이요 과연 사람에게 희망은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래서 저는 자주 광야인생중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 셋중 하나라고 말하곤 합니다. 답은 하나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판관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된 회개가 뒤따를 때 비로소 악순환의 늪에서 탈출이요, 영원한 생명의 선물에 성인의 삶입니다.
이래서 끝임없는 자발적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영혼들에게 하사되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결코 값싼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날마다 선물로 받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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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19,21)
<버려야 할 것들!>
오늘 복음(마태19,16-22)은 '하느님 나라와 부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그에게 지켜야 계명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슬퍼했을까?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는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게 되었으니.
재물이 많은 부자 젊은이는 그 재물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보다도, 영원한 생명보다도 돈을 더 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집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놓고 싶지 않고, 잃고 싶지 않아서 꽉 잡고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일 수 있고, 권력과 명예일 수도 있고, 그것이 또한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약점들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약점을 건드리면 발끈하거나 평정심을 잃게하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들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의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꽉 잡고 있으면서 슬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내려놓고 기뻐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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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WOgrIYJx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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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우리가
애착하는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의지해 온
그것마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누지 않고서는
깊어지지 않고
깊어지지
않고서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의 방식은
언제나
나눔입니다.
나눔은
소유라는
모순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깨어있는
자유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거나
지식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실천에
있습니다.
많은 재산으로
너무 일찍
근심하는
부자 젊은이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자기 것이라
믿어 왔던
어리석은
욕망을
부수십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소유에 대한 집착은
죽음을 낳습니다.
우리 모두
잠시 머물고
빠르게 흘러가는
삶의 순례자들일
뿐입니다.
욕심으로
가득찬
복음의 돌연변이는
되지 않아야 합니다.
소유가 아닌
집착이 아닌
진실한
나눔이
영원한 생명의
문(門)을 엽니다.
공동 운명체에
새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나눔의 기쁨입니다.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할
우리 삶입니다.
욕망의 굴레에
갇힌 우리들에게
집착을
떠나고
나눔을
따르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누구나
빈손으로
떠나야 할
가난한 존재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맑은 삶
맑은 나눔
맑은 실천
맑은 복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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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여름이 멈추어야 가을이다. 멈추는 것이 성숙이다.>
많은 물질로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없는 애처로운 우리들 삶이다. 매 순간 하느님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 시간이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아픈 현실이다.
복음의 토대는 나눔과 감사에 있다. 감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참된 나눔을 실천하는 기쁨에 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이 우리의 인격이 될 순 없다.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인격을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멈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에서 자유로워 진다는 것이다. 물질의 충만함은 관계의 충만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욕심과 욕망을 멈추는 것이 삶의 참된 변화이다.
복음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한다. 우리의 걱정과 우리의 뜻이 하느님을 앞서갈 수는 없다. 물질도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죽는 것이 잘 따르는 삶이다.
물질에 죽고 욕심에 죽고 넓은 길에서 죽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복음의 길이다. 복음은 비우고 나누고 감사하는 기쁨의 좁은 길이다. 욕심을 버린 이들만이 통과하는 좁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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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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